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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5. 인터뷰

[인터뷰] 시각 매뉴얼을 따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수행자 : 작가 송민규 인터뷰

by ㅊㅈㅇ 2016. 9. 20.

 

시각 매뉴얼을 따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수행자

: 작가 송민규 인터뷰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111장의 평면 작업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벽 가득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몇 가지 패턴이 변형, 반복, 재조합된 이미지인 듯한데, 갈색, 베이지, 파란색, 남색, 보라색, 회색 등 언뜻 채도가 비슷해 보이는 색채들을 사용해 묘한 통일감을 갖는다. 드로잉이 끝나는 지점에는 수영장 끝에 대서양이라는 제목 아래 짧은 문구들이 정렬되어 벽에 붙어 있다. 시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짧은 메모 모음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문구들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평면 작업의 이해를 돕는 단서가 될 수도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거듭 더해진 물음표들을 안고, 전시장의 윈도우 섹션과 모퉁이 구석에 당도하면, 플라스틱 패널을 엮어 만든 조형물을 발견하게 된다. 완벽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막연한 조형적 아름다움에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 송민규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그에게 직접 들어보았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문구들과 이미지가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문구들은 각 드로잉의 개별 제목과 같이 기능한다. 작업 순서에 따라 제목을 찾을 수 있다. 특정 사건을 겪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등 일상에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단어를 나열했다. 이 단어들은 하나의 기호로 번역되어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다시 말해, ‘의욕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존재하고, 그 이미지가 화면 위에 배치되는 것이다. 초기에는 특정 단어와 이미지가 일대일로 연결됐지만, 추후에는 여러 단어가 합쳐졌을 때의 이미지를 상상해 우연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각각의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도안집에서 추출해 낸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SF영화나 8비트 게임 이미지 등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기호화된 패턴들이다. 게임에서 레이저 총을 쏠 때의 효과, 로켓이 출발할 때의 효과 등 만화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에서 따왔다. 특정 장면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같은 SF영화들은 대체로 악이 궤멸되는 극적인 폭파의 순간을 맞으며 끝난다. 이 같은 극적인 순간에 직선과 곡선이 뒤엉킨 조형적 구도나 만화적 효과에 관심이 있다.

특정 패턴을 동일하게 반복하기 위해서 플라스틱을 레이저 커팅 하여 템플릿을 만들고, 스텐실 방식으로 찍어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에는 총 백장 이상의 템플릿을 활용했다. 한 이미지에 최소 서너 개의 템플릿을 사용해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드로잉에 사용한 색채 역시 한정적으로 느껴지며, 채도가 비슷해 보인다.

최근 진행한 인물 시리즈의 경우에는, 색의 선정 역시 데이터를 기본으로 했다. 인쇄할 때 활용되는 잉크체계 파랑, 자주, 노랑, 검정(CMYK) 네 가지 요소에 값을 입력하여 색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건(C), 생각(M), 감정(Y), 물리적 접촉 여부(K) 등을 수치로 나눈 뒤 그 값을 입력해 색깔을 만들었다. 만들다보니 색의 층위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애정이 많으면 색이 진해지고, 적으면 옅어지는 정도였다.

과거의 작업과는 달리 화면 전체를 균일하게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특정 내러티브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미지를 중앙에 배치하는 방식의 작품을 제작했었다. 그러다 화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회화 작업을 열망하게 됐다. 이런 변화를 가져 온 계기가 있다. 한 동안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근무했다. 생업은 선생님이라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작업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시간만큼은 내가 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교무실에서는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마우스를 이용한 작업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색과 선만을 이용한 일종의 조형 연습처럼 화면 위에서 즉흥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봤다. 컴퓨터를 활용해 조형 연습을 하면서 화면을 활용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동료 작가가 했던 말이 있다. “감각은 심상이 아닌, 근육이다.” 화면을 다루는 감각 역시 수행을 통해 체득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작은 크기의 드로잉 여러 점으로 한 시리즈를 구성한 이유가 궁금하다.

책상에 앉아서 일상적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사이즈가 A3 또는 A4 규격이었다. 사이즈를 더 키워서도 해봤는데, 똑바른 선을 긋는 것이 긴 호흡에서는 완벽하게 조종되지 않았다. 수많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겪고 결정한 크기이다. 종이 가격, 액자 가격 등도 크기에 영향을 미쳤다. 기성제품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르는 것을 통해 작가가 처한 상황, 사회적 조건 등을 작품 안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액자의 크기, 작품 사이의 간격, 추후 보관할 상자의 크기 등까지 모두 고려했다.

좋은 편집 디자이너는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 책 한권의 편집에 적용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포맷 안에서 통일성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시에도 적용이 된다.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자율성을 갖고 작업하는 것이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특정 모듈의 반복을 통한 창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난감 레고가 떠오른다.

덴마크 레고 본사에서 주최하는 레고대회에 수차례 선정되어 출전하기도 했다. 1미터 크기의 미국식 트레일러, 중세시대의 고성, 가상의 배트맨 자동차, 스타워즈에 나온 함선 등을 만들었다. ‘서울 드로잉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는데, 주특기는 타일블록으로 덮어 레고의 요철을 모두 숨기는 마무리 디테일이다. 각 부분을 모듈화해 분리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고, 그러면서 스스로 좌우대칭의 강박이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 경험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이나 만남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업이 많은 듯하다. 경기창작센터 입주 이후 변화한 환경을 다룬 작업은 없는가?

경기창작센터에서 만난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와 나눈 대화에서, 그리고 작업실에서 항상 보이는 허브모텔, 입주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 등을 주제로 한 드로잉이 있다. <낭만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창작센터에 관한 작업이다. 2016년 이곳에 입주한 작가들의 레지던시 첫 전시 제목은 <낭만적 나침반>이었다. 전시 공간 옆에 위치한 카페에 하루 종일 드로잉을 했던 날이 있는데, 아침 10시에 프로젝터를 켜고, 오후 6시에 끄러 온 학예사 이외에는 아무도 전시장을 찾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거리, 홍보 부족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전시장은 텅 비어있었지만, 참여 작가들은 수동적인 태도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변화는 없는 상황, 혹은 이 같은 불편한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다. 각기 다른 색깔, 뒤틀린 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이는 빈약한 구조, 맞물려있지 않은 톱니바퀴들. 아무도 찾지 않는 전시에 관한 기념비라고도 볼 수 있다.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관해 들려 달라.

지금까지는 주로 진행했던, 내가 직접 겪은 사건 사고를 코드화하는 작업을 A라고 부른다면, 앞으로 시도해보게 될 B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특정 사건을 다루는 작업이고, C는 아무 내러티브 없이 완전히 조형만 남아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사건을 다룰 때에는 그 사건을 세밀한 관점으로 접근해, 대상 내의 부조리함도 동시에 드러나길 바란다. 기존의 내러티브를 완전히 헤집어 놓고 싶다. 그러다보면 BC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휘슬러는 예술가를 일컬어 정신노동자라고 말했다. 예술가의 노동이란 지적 개념과 심미적 효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수행의 길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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