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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기획의 글] <흐르는 흐름>展 강남미술관 2018.9.1~6

by ㅊㅈㅇ 2018. 9. 1.



흐르는 흐름  Flowing Flow

이번 전시는 장애예술인의 창작 거점인 ‘잠실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는 작가들로 구성됐다. 참여작가 12인은 그들의 신체적 불편함을 뛰어넘어, 창조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장애는 장애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참여작가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고,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남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골똘히 몰두한다.

‘흐른다’는 동사는 종종 물과 같은 액체의 상태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액체는 고체와 달리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어디에 담기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한다. 딱딱하게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어디로든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으며 변화무쌍한 모험이 가능해진다. 시간, 사물, 공간…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비슷한 일과가 반복되기 때문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 언뜻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하루 하루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경험으로 풍성하게 채워진다.

‘흐름’은 잇따라 진행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변화의 양상을 마주하게 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들부터 분노를 금치못할 일들까지 다양하다. 잘못에는 맞서싸워서 바로잡고, 옳은 일에는 동조하며 힘들 더한다. 전시 제목 ‘흐르는 흐름’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유롭게 흘러가는 각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확장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마음 속 편견의 문을 활짝 열고, 이들의 작품에 흠뻑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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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아는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고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족필화가’다. 김경아는 주로 자신 주변의 풍경을 그려왔다. 가야할 길 혹은 가지 못한 길, 낭만이 가득한 길, 행복이 가득한 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그렸고, 꿈과 휴식의 공간으로 ‘나무’를 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명의 근원이면서, 그것을 담는 공간에 따라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물’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선보인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을 접하게 된다. 다양한 음료들을 비롯해서 강과 바다의 물 등 수많은 ‘물’ 말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평화를 느끼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작가 NASA Park은 지난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큐브(cube)’를 작품을 통해 제작해 왔다. 그가  만든 큐브는 8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관객은 누구나 그가 만들어 둔 장치를 잡아당기거나 밀면서 8개의 점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형을 마주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직육면체로 구성된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규격화된 공간에서의 삶이 각 개인의 사고방식 역시 딱딱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그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형태가 바뀔 수 있는 큐브를 만들었다. 또한 NASA Park은 버려진 자재를 재활용해 작품의 재료로 활용하여 업사이클링을 시도하며, 더 나아가 지역과 지역 주민과 소통하는 공공 프로젝트에 다수 참여했다.


‘풀실놀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엄지와 검지에 물풀을 잔뜩바르고 나서 두 손가락을 붙였다가 떼어내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풀이 마치 실타래처럼 늘어져서 두 손가락 사이를 잇는다. 이것을 작가 김은설은 ‘풀실놀이’라 부른다. 풀의 끈적끈적함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온다면, 누군가에게는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작가 김은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마치 풀실놀이와 같이 붙고 또 떨어지기를 반복한다고 여겼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경우, 표정이나 구체적 생김새 묘사는 생략되어 있는 대신, 분홍 빛깔로 엷게 익명적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대상의 개별적 특성보다는 관계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두드러지는 분홍빛의 색채는 인간의 벌거벗은 몸,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존재를 지시한다.

작가 한승민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 언어를 작품에서 선보인다. 초창기에는 식물도감, 신화, 만화 등 다양한 레퍼런스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지만, 현재는 점차 그가 직접 경험하는 일상의 경험을 이미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혹은 수족관에 방문한 뒤 작품을 제작하는 등 그의 작품은 매우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내러티브로부터 출발한다. 색의 선정, 화면의 분할, 캐릭터의 특성 등 작품의 세부적인 요소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듣고나면 작품의 흥미로운 요소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추상적 패턴과 이미지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그래픽 디자인을 보는 것과 같이 평면적인 화면 구성과 명확하게 그려진 검은 윤곽선이 특징적이다.

작가 김현우는 학창 시절 수업 시간 내내 무언가를 끄적이며 낙서와도 같은 독특한 적응 방식으로 노트 수백 권을 남겼다. 졸업 이후 그러한 노트 안에 응축된 에너지는 점차 도화지와 캔버스로 옮겨갔다. 작가는 스스로 명명한 픽셀이라는 이미지로 그가 보는 세상과 기억을 끝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만의 드로잉 방식으로 조형적 세계를 시도하고 있다. 작업실에서도 작가는 시와 에세이 같은 텍스트를 종이에 적어 내려가며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의 기록과도 같은 작업으로 그날의 심상을 노트에 옮기고, 픽셀의 형태나 기호로 변환하며 종이와 캔버스에 새로운 언어로 표현한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들은 최근에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미디어 예술과 낭독 퍼포먼스 등 폭넓은 장르로의 전환을 이뤄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픽셀들과 캔버스 위에 확장된 수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가득한 노트 작업들이 또 다른 기호와도 같은 원형적인 형태로 한 공간에 어우러지며 작가의 과거와 현재 삶을 투영한 메타포적 언어로 우리에게 다채롭고 순수한 대화를 시도한다.

작가 박주영은 빛과 그림자, 바람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예민하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받아들인다. 박주영은 청각장애 때문에 인공와우로 의지하여 완벽하게는 잘 못 듣지만 시각과 촉각 등 다른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여 대상을 인지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오선지, 레코드판, 음표와 기호, 바이올린의 활, 탬버린 등 소리를 암시하는 요소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각기 다른 굵기의 펜을 다섯개씩 엮어서 오선지와 같이 한 번에 다섯줄을 동일한 간격으로 그릴 수 있는 장치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의 움직임에 작가가 직접 반응하고 교감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작업과 함께 모터로 계속 원을 그리면서 한송이의 꽃을 미세하게 움직이게 하는 바이올린 활로 만든 오브제 작업, 그리고 다양한 드로잉을 함께 선보인다.

작가 박은영은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마음에 남게되는 흔적(emotional baggage)을 주제로 작업을 진행해 왔다. 거품, 거울, 실, 유리, 물 등 투명한 물체에 굴절된 그림자를 이용한 설치 작업을 통해,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화장품 포장 상자를 이용해 각기 다른 형태의 창문 모양을 커팅하고, 내부에 조명을 설치해 빛이 만들어낸 다양한 그림자로 공간을 채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실제로 거주했던 집의 문과 창문의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예전의 다양한 기억을 소환해 낸다.

작가 임병한은 통가마 무유소성 기법을 이용해 도예 작업을 한다. 통가마 무유소성은 80시간 정도 장작을 때면서 날리는 재가 기물 표면에  붙어 자연스럽게 유리질이 형성되는 자연유 기법을 이용한다. 오랜시간 장작불을 견뎌낸 작품은 투박하고 거친 외형과 소성중 일어나는 요변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작품으로 태어난다. 이번 전시에는 <조각 배> <파울> <기원>을 출품한다.

전통적으로 불을 때는 작업을 시작할 때 가마가 잘 나오기를 <기원>하며 정화수를 떠놓고 정성스레 소성을 한다. 가마를 열고 만나는 <조각 배>와 <파울>은 깨지고 터진 실패작일수도 있지만 작가의 선택으로  관객들에게 새롭게 선보이는 온전한 작품으로 제시된다.

작가 이동엽은 몸의 뼈, 사람의 형태, 인체의 구조를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해 왔다. 그는 유년 시절 골육종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초기에는 자신의 신체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 혹은 활동 보조기구 등을 이용하며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다루는 작업을 지속했다. 이후에는 점차 보편적 주제로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세포나 뼈 이미지를 기본 단위로 활용해 공간으로 무한하게 확장되어가는 유기적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종이, 캔버스와 입체 오브제에 펜, 아크릴 잉크와 먹 등을 이용해 농담을 다채롭게 조정하였으며, 세밀한 선의 묘사가 특징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 위에 완성한 유기적 드로잉 시리즈와 함께, 작품이 걸린 벽면으로 드로잉이 끝없이 확장되는 시도를 선보인다. 그의 유기적 드로잉은 자신과 관객을 잇는 하나의 관계망이자 네트워크이다.

작가 정도운은 특정 인물에 관한 작업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그는 가장 먼저 관심있는 인물을 인터넷에서 집요하게 검색한다. 검색의 대상은 자신의 가족부터 유명 가수, 정치인까지 다양하다. 그는 캔버스 위를 특정 인물의 나이, 출생지, 가족관계, 가수의 경우에는 출시한 앨범과 수록된 곡 제목 등 해당 인물과 연관된 정보로 가득 채운다. 정도운은 사람들과 직접 관계맺는 일에 서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캐리커쳐와 같이 특정 인물의 특징적 부분을 재미있게 포착하여 표현해내는 등 탁월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정도운에게 작품은 세상과 접촉하는 방식이며, 자신만의 소통의 창구다.

작가 신동민은 화려한 색채를 과감하게 활용해 정글의 이미지, 동물, 인물, 도시 풍경 등을 형상화 한다. 거침없고 순수한 동시에 현대적 조형미를 가진 그만의 시각언어, 그리고 성당 건축 창문에 새겨져있던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이 화면을 빈공간 없이 채워진 화면 구성이 그의 작품의 주요 특성이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집중력을 가진 신동민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한다. 밀알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도 일하고 있는 그는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의 풍경이나 이미지들도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한 간접적 경험에서도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해 이국적 정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황성원은 형태나 색에 구애받지 않는 물질 본연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왔다. 어떤 형태로든 변형 가능한 특성 때문에 파라핀을 재료로 활용했으며, 판화의 기법을 이용해 특정 오브제의 표면을 찍어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황성원은 현대의학으로 명명할 수 없는 통증을 이겨내야 했고, 이 때문에 힘겨운 일상을 보냈다. 고통의 완화를 위해 먹었던 약, 뜸 치료 등 치료에 활용된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기도 했다. 황성원에게 작업하는 일은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며, 또한 작가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reflection>은 전시장 한쪽의 유리벽에 pvc 필름을 이용해 바깥의 풍경이 반영된 형태로, 빛을 따라가며 길을 만드는 일종의 길잡이(pathfind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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