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3. 리뷰

[전시리뷰] 빛과 그림자를 평평하게 옮기는 방법: 이희준 개인전 《에메랄드 스킨》(이목화랑, 2017.11.17.~12.9)

ㅊㅈㅇ 2017. 11. 18. 23:06

 

이희준 <Venetian Blind no.1-6>, Oil on linen, 91 x 72.9 cm, 2017


빛과 그림자를 평평하게 옮기는 방법

: 이희준 개인전 에메랄드 스킨(이목화랑, 2017.11.17.~12.9) 리뷰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파란색, 녹색, 군청색, 보라색까지 푸른 계열의 색채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색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화면 위에 펼쳐지는 형태가 기하학적(geometrical)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번 전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과 블라인드 각도에 따라 그 위에 생성되는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를 다룬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정이나 직장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오브제인 블라인드는 이희준이라는 작가의 눈과 손을 거쳐 새롭게 재해석되고, 색과 선과 같은 조형요소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 총 11점의 유화 작업과 30점의 드로잉으로 구현됐다.

20169, 이희준이 첫 번째 개인전 Interior nor Exterior: Protorype(기고자)에서 선보인 일련의 작업은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과 건물 내부 인테리어 등 일상 속에서 접하는 건축적 환경의 조형성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두 번째 개인전 Speakers(2017, 위켄드)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여러 종류의 스피커로 옮겨갔으며, 이번 Emerald Skin(2017)에서는 블라인드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다룰지에 선택할 때-물론 해당 시기에 그가 관심을 둔 소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지만-주제적으로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그가 대상을 바라보고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환원의 과정 그 자체다.

대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기 위해 작가는 가장 먼저 하나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수집한다. 그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접 경험하거나, 직접 촬영한 이미지여야 할 당위가 없는데, 그 이유는 회화 작품 안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서정적인 내러티브를 담고자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3인칭의 시점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두고 이리저리 줌-인 혹은 줌-아웃하는 과정을 거치며, 사진을 크롭(crop)한다. 마치 실험대 위에서 관찰대상을 마주한 과학자처럼 말이다. 입체감을 가진 3차원의 오브제는 잘려나간 사진 안에서 선과 면, 색으로만 구성된 평면으로 치환된다. 이 과정에서 이희준은 펜, 색연필, 마커 등을 사용해 수많은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다양한 색과 선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내기 위한 일종의 초벌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목화랑 전시 전경 2017 


앞서 선보인 두 번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에서는 대부분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매트한 화면을 만들어냈다면, 이번 전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차이점은 유화로의 재료적 변화에 있다. 드로잉에서 그치지 않고, 캔버스로 또 한 번 변용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실험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는 일정한 분량의 흰색 물감을 섞어 색의 그라데이션(gradation)을 만드는데, 그 붓질 역시 일정한 점으로 집적되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물결처럼 남아있는 붓질은 납작하게 치환된 표면 위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앞서 어떤 대상을 그릴지에 작가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러나 대상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표현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빛은 회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윤곽선과 그림자, 그리고 빛은 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다시 말해, 회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표현을 통해 회화적 표면에서 삼차원적 현실성을 구현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다. 블라인드는 빛에 영향을 받고, 그림자를 필연적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에서 이전에 이희준이 다루었던 건축적 환경이나 스피커와는 성질이 다른 대상이다. 화면으로 평평하게 옮기는 그의 번역 방식에 일종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작가 역시 블라인드를 다룸에 있어서 빛과 그림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전시장을 몇 바퀴 돌아도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자는 <Venetian Blind no. 3>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라데이션의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거나, 표면 위에 올라간 물감의 양으로 굴곡을 표현하거나, 표면의 질감을 다르게 마무리하는 등의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재료의 실험은 평평함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그가 빛 혹은 그림자를 표현할 수 있는 예외적 방식이었던 듯하다.

일전에 농담처럼 팬톤(pantone)에서 매 시즌 선정하는 트렌디한 컬러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어떨지 이야기한 적 있다. 어떤 대상을 실험대 위에 놓을지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톤의 색으로 그 실험을 집도할지 결정하는 데에도 사사로운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전시를 아우르고 있는 색의 분위기가 푸른 톤이라고 해서, 차갑고 정적이며 차분하다는 등의 감상평을 남기는 것이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회화의 주제가 되는 대상에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작가 개인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일정 수준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두기가 그의 실험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전 세대의 추상 미술과의 차이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지극히 단순하고 직설적인 언어적 표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학자, 디자이너와 같은 어떤 무심함으로 회화를 대하는 태도, 매우 건조하게(dry) 느껴질 정도의 선택의 과정들은 그가 앞으로 해나갈 또 다른 실험을 기대하게 한다

 

이희준 <Venetian Blind drawing no.30>, Color pencil on paper, 33.8 x 19.4 cm, 2017

이희준 <Venetian Blind drawing no.10>, Color Pencil on paper, 33.8 x 19.4 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