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난지,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추상미술」, 『월간미술』, 1997년 4월.
필자는 미술가들이 미술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지평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추상미술의 경향이 20세기 미술의 지층 속에 박제된 화석과 같이 남아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주변에 네오 제오, 포스트 컨셉츄얼리즘, 모조 추상 등의 이름으로 여전히 추상형식의 미술이 건재한 상황이 바로 이 같은 주장의 근거가 된다. 당대의 추상작가들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추상미술 자체가 내부로부터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상미술은 이제 모더니스트가 만든 옥좌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그간 누려온 영화를 풍자하기 위한 형식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이 한국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시대를 공유하는 현상이므로 유사한 감각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더니즘의 역사도 짧고, 그 영향력은 서구에 비해서는 약했으며, 전통 혹은 정체성에의 요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1980년대 이후 모더니즘 미술과 재야의 민중미술이 추상 대 형상, 형식 대 내용의 대립이 의미를 잃게 된다. 세계미술 정보의 빠른 유입이 가능해지면서 바깥 동향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포스트 모던적 흐름에 편승하게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추상미술을 한마디로 수식한다면 ‘다원적’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추상미술은 기본적으로 방법, 매체, 주제상의 한계가 없어 그것을 어떤 범주로 묶어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그럼에도 설명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신세대 추상미술 작가를 글에서는 네 가지 특성으로 분류한다. (1. 신체와 재료의 즉물성에 근거한 추상화면, 2. 모더니즘에의 비판적 성찰을 위한 개념적 작업, 3. 기호 형상의 추상회화, 4. 레디메이드 이미지로서의 추상형태) 첫째, 이전 추상작가들의 관심이 신체를 통해 드러난 내용에 있었다면 신세대 추상작가들은 몸 자체를 더 주시한다. (박영남, 김춘수, 이종목, 최인선, 윤동구) 두 번째로, 모더니즘 회화가 근거한 평면성을 벗어나기 위한 형식상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넓은 맥락에서 모더니즘의 역사와 그 근거를 이룬 이분법적 논리를 떠나고자 하는 방향을 취한다, (이인현, 문범, 박영하) 세 번째로, 전세대 추상미술에서 표현의 한계를 느끼고 형식 뿐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미술의 필요성을 절감, 사실주의 형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기호를 제시한다. (박관욱, 이기봉, 엄정순, 이지은) 마지막으로, 추상형상은 미술사 속에서 끊임없이 차용되는 레디메이드 이미지가 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홍승혜, 설원기, 이상남)
빌헬름 보링거의 생각처럼 추상양식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공포스럽거나 불완전한 현실에 대처하거나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만든 인공적 대응물일지도 모른다. 미술사의 골격을 이뤄온 조형의지라는 의미에서 추상에 접근할 때, 그것이 모더니즘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모더니즘의 죽음 이후에도 추상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하게 된다. 이전과 다른 점은, 이제 설득력을 잃은 모더니즘의 어휘로는 추상을 말할 수 없기에 그것을 설명할 다른 맥락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추상의 종언보다는 추상의 확장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추상이 순수형식과 초월적 의미로의 도피였다면, 포스트모던 추상은 현실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대처한다. 모르는, 알 수 없는, 무한한과 같은 개념을 함축한 세계, 하지만 그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추상미술은 풍경화보다 더 리얼할 수 있다는 리히터의 말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추상미술가 역시 선배들이 믿었던 이상의 실재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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