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문화회관 설치 전경 (photo 이경윤)
선으로 구축한 사색의 공간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 프로젝트 <정진경: 다른 시선-외면하지 않기>
플라스틱 프리 챌린지
최근 몇 년 사이,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난 변화 중에 하나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한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에서도 테이크아웃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마트에서도 비닐백을 유료에 판매하며 각자 구매한 물건을 담아갈 가방을 챙겨오도록 하고 있다.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않는 대신 자신의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마실 것을 담아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얼마 전, 코에 깊이 박힌 플라스틱 빨대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거북이를 사람들이 구조하는 동영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장비를 이용해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빨대를 빼내려고 애를 쓰지만 쉽지 않고, 거북이가 꽤 많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 한 후에야 겨우 제거할 수 있었다. 바다 속에는 우리가 버린 수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크고 작은 크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은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바다 속에 쌓여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로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진 동물들은 먹이처럼 보이는 쓰레기를 먹고 있다. 소화도 되지 않고, 썩어서 사라지지도 않는 이러한 인공물은 인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가 인류를 영원히 괴롭히게 된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비롯한 일회용품의 무분별한 사용과 폐기는 직접적으로는 동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스스로에게 해악을 끼친다. 그만큼 환경 문제는 다른 세상,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우리 코앞에 닥친 심각한 문제다. 이렇게 끊임없이 쓰레기를 생산해내다가는 정말로 쓰레기 더미 위에서 살아가게 되는 날이 곧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간에 쌓아 올린 여러 층의 선들
대구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에서 소개되는 정진경의 <다른 시선-외면하지 않기>전은 일회용품의 무분별한 소비 행태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 유리로 된 전시 공간 외벽에는 시트지를 이용해 화려한 색채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안쪽에는 실로 캐스팅한 오브제들을 전시한다. 작품에서 다루는 대상이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되어 전시장을 지나치는 관객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인지할 수 있다. 작가는 쇼핑백, 캔, 봉투 등 우리 모두가 매일 사용하고 또 버리는 그런 대상들을 소재로 삼았다.
판화를 전공한 정진경은 기존에 일상적인 오브제를 대상으로 실크스크린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컵이나 접시 등을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업에는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컵을 작가가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그 조형요소를 살피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과정은 대상 자체의 비범함 때문이 아니라, 그 물건을 사용하고 또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에서 대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발견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살피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술의 역사에서 정물을 그린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완벽하게 통제된 작업실 내에서 작가가 원하는 조도와 구도를 갖춘 채,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고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정물은 모델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바깥 풍경처럼 환경적 영향을 받지 않아, 작가 자신이 원하는 형식 실험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진경도 마찬가지로 컵, 포트 등의 대상을 다양한 표현방식을 활용해 시각화했다. <함께 먹습니다>(2013)에서는 우묵한 그릇과 젓가락 부분을 희게 남겨두고 그 배경을 보랏빛 펜을 이용해 평평하게 가득 메우는가 하면, <들여다 보자>(2011)에서는 연필로 여러 크기와 종류의 컵과 접시를 비교적 입체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으며, <움직이기 시작하다>(2009)는 잔뜩 쌓아놓은 종이컵의 형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작품이다. 언급한 작업을 비교해봄으로써 비슷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재료와 표현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얼마나 다른 감각이 전달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2018년부터는 평면을 중심으로 다뤘던 작업을 3차원의 공간에서 구현해 보는 실험을 감행한다. 실제 오브제 위에 흰색 명주실과 본드를 한 땀 한 땀 붙여 캐스팅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정진경은 컬러실이나 철사, 굵은 실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해 보았으나 마치 판화나 연필로 평면 위에 옮길 때 만들어지는 드로잉선의 느낌과 가장 흡사한 것이 흰색 명주실이었다고 언급했다. 명주실을 이용해 입체 작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더 오랜 시간 해당 오브제를 관찰하고, 만지게 된다. 평면 위에 특정 공간을 얇은 드로잉 선으로 채워나가듯, 얇은 실로 한 줄씩 채워나가는 이 과정은 지극히 노동집약적이다. 작가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작업실에 홀로 앉아 이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어쩌면 한 줄씩 실을 붙여나가는 행위를 통해서 평범하지만 소중한 것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원래 물체의 색이나 질감을 흰색 실을 통해 중화시킴으로써 원래의 대상이 가진 성질을 없애고, 대상의 외형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언뜻 보기에 백색의 단단한 오브제 같은 정진경의 작업은 속이 텅 비어있는 빈껍데기, 원래 오브제의 기능을 상실한 엷은 조각이다. 작품 제작의 과정은 드로잉선과 같이 작은 유닛으로 분해하여 재구성하는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가벼운 재료로 만들어진, 연약한 이 조각 작업은 3차원의 공간에 쌓아 올린 정진경의 드로잉이다. 조심스럽게 쌓아 올려진 선은 작가의 손끝에서 조금은 삐뚤빼뚤한 결을 만들어내며 독특한 질감을 전달한다.
정진경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성은 공간의 ‘비움’에 있다. 유리로 된 전시 공간의 내부는 기존 다른 판화 혹은 드로잉 작업에서와 유사하게 많은 부분이 비워져 있다. 대상의 디테일을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 대신, 작가는 대상의 실루엣을 비워내는 방식으로 구성한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만큼이나 빼는 것의 결정 역시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데, 유리 공간에서 보게 되는 빈 공간은 지나치게 많은 물건으로 가득한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색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환경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전에는 실 캐스팅을 한 대상이 숟가락, 접시, 신발 등 일반적인 일상 사물이었다면, 이번에 유리 상자에서 소개하게 될 작업은 플라스틱 의자, 비닐 쇼핑백, 페트병 등 일회용품이 많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음료를 다 마시고 버리려고 내 던져둔 찌그러진 페트병과 물건을 사서 담아온 비닐 쇼핑백은 형태도 흐트러지기 쉽고, 어찌 보면 그것의 역할, 기능이 다한, 버려지기 직전의 물건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정진경은 일회용품을 소재로 선택함으로써 단순한 조형 실험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환경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2003년 마가렛과 크리스틴 버트하임 쌍둥이 자매가 설립한 IFF(Institute For Figuring)에서 진행한 <쌍곡선 코바늘뜨개질 산호초 프로젝트(Hyperbolic Crochet Coral Reef Project)>를 떠올릴 수 있다. 과학자인 마가렛과 조형예술대학 교수인 크리스틴이 고안한 이 프로젝트는 쌍곡선 기하학, 지구의 기후변화와 글로벌 워밍, 지역에 따른 해양생물 등을 주제로 삼는다. 바다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산호들을 뜨개질의 방식을 통해 재현해내는 작업이다. 또한 원하는 사람 누구라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현재까지 만 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해 뜨개질을 해 산호초 모양의 오브제를 만들었고,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더 나아가 <독성의 산호(toxic reef)>는 비닐과 뜨개질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더욱 직접적으로 인류의 소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비판한다.
예술의 힘은 대상이 가지는 조형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제시되는 사회의 상황과 맥락 하에서 특정한 메시지로 발현된다. 작가의 손을 통해 새로운 문맥을 입은 일상 오브제들은 쉬이 보아서는 놓치기 쉬운 대상의 본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특정 이슈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정진경의 작업에서 일상의 오브제를 활용한 형식 실험에서 환경 문제로까지 더욱 확장되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인위적인 소재로 만들어진 진짜 같은 가짜의 세계에서 우리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이 필요할까?
봉산문화회관 설치 전경 (photo 이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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