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만의 미술이라는 것이 있을까? 어떤 특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일까? 혹은 불필요한 일일까?
2012년 연말부터 2014년 4월까지 월간 <아트인컬처>에서 1년 5개월 정도 기자로 일하면서 매번 편집회의 할 때마다 느꼈던 것은어떤 주제를 가지고 가서 펼쳐 놓아도 찾다보면 이미 다 다뤄진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주제를 애써서 찾아가서 발표를 해도, 항상 몇 년도 몇 월호를 먼저 읽고 오라는 질타를 받기 일쑤였다. 내가 충분히 과월호를 숙지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나는 내가 속해있던 잡지사에서 15여 년의 시간동안 했던 일들조차 완전하게 다 파악하고 있지 못한 설익은 신입이었던 것이다. 대표나 편집장, 선배 기자들은 모두 미술계에서 나보다 적게는 2-3년 많게는 몇십년 더 오랫동안 일한 선배들이었다. 나는 그들보다 아는 작가/큐레이터/평론가도 적었고, 과거에 일어난 중요한 전시들도 많이 보지 못했다. 당연히 내가 기획하는 어떤 것이 그들 눈에는 부족해보였을 것 같다. 그 선배들은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대를 함께 보낸 동지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좋았든 싫었든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여전히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는 동지들과 나의 선배들 사이에는 끈끈한 연대같은 것이 있는 듯보였다.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내고, 함께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생긴 동지애가 아닐까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나도 그런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그게 첫 번째, 세대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다.
기자 일을 그만 두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 가지는 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는/ 내가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없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속도감 때문이었다. 5일에 편집회의, 7일에 청탁, 15일부터 편집, 22일에 디자인, 24일에 컨펌, 29일에 인쇄 감리까지 나는 그 속도에 몸이 많이 지쳤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남탓, 구조탓을 하면서 나 스스로 합리화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유능사라는 팀으로 <청춘과 잉여>전을 기획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2014년 당시 젊은 작가를 위한 공모전이나 지원제도는 많았지만, 그건 나이 제한을 둔 어떤 형식의 지원 프로그램 때문이었지, 주제적인 면에서 젊은 작가가 전시에 초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분명히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진 어떤 주제도 이전에 누군가 역시도 관심을 가졌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자로 있을 때 나는 패배주의적으로 "난 뭘해도 저들보다 잘할 수 없어"라고 낙심했다면, 작가들을 만나면서는 달랐다. 어떤 면에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젊은 작가들이 이전 선배세대 작가와 비슷한 주제로 작품을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선배 세대의 것과는 다르다고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그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이지 달랐다. 그래서 다른 세대의, 하지만 비슷한 주제에 관심을 둔 누군가의 작업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 혹은 더 나아가 협업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는 실험이 의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제적인 관심사가 공통된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은 즐겁다. 왜냐하면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유명해서, 혹은 000이라서가 아니다. 관심이 비슷해서다.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됐을 때 염두에 두었던 또 다른 것은 당시 느꼈던 보이지 않는 파벌 같은 것에 대한 반발에서다. 특정 공간, 특정 가치관을 공유하는 파벌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잡지사를 그만두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가장 나에게 많이 했던 질문 중 하나는 이거였다. "너는 누구랑 친하니?" 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무리에 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화여대에서도 인문대를 나와 현장에 뛰어들었고 아는 사람도, 친한 무리도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혹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누군가라면 할 수 있을법한 일을 했다. 주제적으로 흥미로운 일을 벌여서 할 얘기가 있는 사람들/친구들을 현장에서 만들어/만나 보겠다는 거였다. <청춘과 잉여>전시에 함께 했던 10명의 작가 역시도 원래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없다. 5명의 기획자는 오랜 시간 함께 리서치하고 스터디하면서 작가를 섭외하고 전시를 진행했다. 이 전시의 전체 예산은 2100만원으로, 10명의 작가에게 신작 커미션을 요구하고 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뼈와 살을 갈아넣는 노동력과 정신력, 시간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시가 느슨하게 보였을 수 있다. 다섯 개의 주제가 4개의 층에 나누어져 전시장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각 작가의 목소리가 잘 드러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타유니버스> 안대웅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다섯개의 주제, 열 명의 작가를 잇는 연결고리가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를 단순한 네임드라핑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기획한 사람으로서는 억울하고 더 나아가 슬픈 일이다. 본래의 의도가 저렇게 왜곡되어서 받아들여질 수 있구나하는 그런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이 전시 홍보에 큰 영향을 끼쳤던 한 평론가는 다른 세대의 작가가 마치 링 위에서 싸움을 하듯이 누가 우세하고, 누가 약세며, 누구는 싸울의지가 없어보인다는 내용을 담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청년 세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좌담회를 제안했고, 우리는 그것을 열었다. 주최자로서 완전하게 내용을 컨트롤하지 못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의도했던 방향과 다른 결론으로 다다르는 분위기가 됐다. 제어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청년 세대의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그 좌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들, 방향성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많은 오해와, 내부의 각기 다른 욕심들은 우리를 분열되게 하였고,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광주로 떠났다. 7개월 여간 머리를 비우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은 또 그곳 나름의 문제들로 골치를 썪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를 반겨줬던 사람은 딱 한 사람, 이상훈이었다. <청춘과 잉여>전에서 박미나 작가와 한 팀을 이뤄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했던 작가다. 그는 4-5년 동안 한가지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 드는 작가였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작업실에서 오직 작업에만 매진하는 그였다. <청춘과 잉여> 이후 별다른 전시에 참여하지도 않고 계속 해오던 작업만을 묵묵하게 지속하고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그와의 대화에서, 그가 나에게 불어넣어준 자신감은 나로 하여금 다시 뭔가를 하게 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어떤 것을 다시 정면으로 바라보고 온몸으로 부딪칠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해주었다. 동세대의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이 컸고, 무엇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었다.
12월 즈음인가, 마감일을 2주반? 정도 남겨놓고 급하게 원고 청탁을 한 건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은진 큐레이터로부터 온 전화였다. <서울 바벨>이라는 전시 도록에 글을 써달라는 거였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일을 벌려놓고 나는 광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방관했다. 진짜 행동하지도 않았으며,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공간들에 직접 가본적도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에 관해서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으니까 팩트를 중심으로 나열해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무슨 일들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이뤄졌는지는 알고 있었으며, 각기 다른 위치에 산재해 있는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서 정리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가치 판단도 최대한 배제한 채, 내가 생각한 팩트를 나열하는 타임 라인식의 글을 쓰겠다고 말했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물론 모든 기록이 그렇겠지만 기록한 사람의 가치관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최대한 사실을 기반으로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미술관 도록에 처음으로 글을 기고해보는, 나에게는 새로운, 특별한 경험이었다.
<청춘과 잉여>는 세대에 관한 전시였지만, 각기 다른 다섯개의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문으로 치면 정말 방대한 주제를 건드린 셈이 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적으로 담당했던 파트-회화에 관해 집중하는 전시를 해보고 싶었다. 아니, 해야할 것 같았다. 박미나- 이상훈 작가와의 작업은 정말이지 행복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저 두 작가에 비해 내가 회화에 관해 가진 지식/열정은 비교할 수도 없게 미천하지만, 더 알아보고 싶었다. 다시 말해, <룰즈>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청춘과 잉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대적인 것, 그리고 회화. 그 두 가지의 큰 주제를 엮어서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젊은 세대 작가'로 주로 언급되거나 활동하는 사람은 또 다시 어떤 분파처럼 그루핑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명해졌고,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분명히 한 세대를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적인 요소, 지역적인 요소, 문화적인 요소, 교육의 요소 등 각기 다른 배경에 따라 같은 세대라고 하더라도 취향,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각각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세대라도 일부 누군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벌이고 있는 누군가를 주제적인 면에서 모아보고자 했다. 여러 특성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한 가지에 집중한 것이다. 몇몇 작가에게 나는 흥미로운 말들을 듣기도 했는데 오해가 많았다. "당신은 이런 추상적인 회화를 좋아하니 구상적인 작업을 하는 나를 좋아하지 않겠군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경향이 유일한 미래라거나 좋은 회화라고 주장하기 위해 이 전시를 한적이 없다. 나는 잘 그린 구상회화도 정말 사랑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 회화는 다 이런가요?" 절대 아니다. 정말 많은 갈래의 다양한 특성이 있다. 그 중에 한가지 기준으로 내가 찾아서 엮은 것뿐이다. 평론가적 성향이 강한 기획자가 있다면, 나는 기자적 성향이 강한 기획자인지도 모르겠다.
<룰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긴 시간을 들였던 과정은 바로 작가 리서치다. 졸업 전시회를 보고,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보았던 작가들을 연락해서 만나고, 작업실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듣고, 글을 썼다. 동료 작가에게 또 다른 작가를 소개받기도 했다. 그들을 섭외하는 일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가장 먼저 내가 누군지 그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나는 그럴싸한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장의 명함으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산도, 공간도, 주제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기획에 관해서 설명해야했고, 나에 관해서 긴 시간, 내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했다. 내 제안을 차갑게 거절한 사람도 있었고, 나의 꿈을 비웃기도 했다. 그렇게 7명의 작가로 전시를 꾸리게 됐고, 그 중간에도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많이 발생했다. 7명 중에 4명은 대학 바깥에서는 전시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비재현적 회화라는 다소 큰 틀이지만,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머리로 판단하여 전시에 초대했다. 내가 그 작가의 어떤 작업이 왜 좋은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남들이 다 좋다고 하기 때문에 나도 좋아야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왜 이 전시에 이 작가를 초청했는지, 어떤 작업이 나에게 왜 좋게 느껴졌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간을 섭외하는 일 역시도 쉽지 않았다. 7명의 작가의 회화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3월 말께에 기금이 발표가 났고, 부랴부랴 계약서를 쓰려고 준비를 했다. 추상적인 회화작품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의 물리적 특성은 딱 두가지. 흰 벽과 높은 천장이었다. 그런 곳은 미술관밖에 없는데, 사실상 미술관에서 나 같은 무명 기획자의 기획전을 열어줄리가 만무했다. 몇 번 연락을 해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모두 거절 당했다. 12월까지 정산이 완료되어야 하기 때문에, 6월~11월 사이에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했는데, 4월에 연락해서 해당년 저 기간에 일정이 비어있는 공간이 당연히 많지 않았다. 수차례 공간 대표를 만나 기획안 피티를 했고, 여러차례 거절이 이어졌다. <청춘과 잉여>를 진행했던 러프한 공간과는 달리, 하얗고 깔끔한 공간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누군가는 나에게 "왜 하필 상업화랑에서 기획전을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섭외 가능한 희고 높은 천장을 가진 공간을 찾았을 뿐이다. 어떤 전시를 볼 때 그 전시가 열리는 공간의 히스토리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절박했다. 다른 색으로 도색된 벽을 흰색으로 바꾸지 못하게 해서 불발된 경우도 있었고, 대관료가 너무 비싸서 진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전시의 전체 예산은 1200만원이었고, 7명의 작가로 이뤄진 기획전에 300만원 이상을 대관료에 쓸 수 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엊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들었다. "큐레이터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냐고".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독립 큐레이터는 갑을병정 중에 '정'도 되지 않는다. 공간을 섭외하기 위한 미팅에서 나는 공간 측에서 어떤 요구를 해도 전시를 실제로 벌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최대 약자이고, 경력이 많이 없는 상태의 독립 큐레이터는 작가들에게도 자신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납득시켜야하는 '정'의 위치에 선다. 대체 어떤 면에서 누가 나를 권력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기금을 받은 모든 전시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겠지만, 당연히 내 사비를 더 쓴다. 쓰다보면 항상 모자라기 때문이다. 예산 분배에 실패한 나의 잘못인 것을 어쩌겠는가. 내가 들인 시간, 마음, 이동 비용, 정신적 노동력 등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없고, 실제로 내가 살아가기 위한 비용은 다른 방식으로 충당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도,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내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작가들에게는 더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일을 벌이기 위해서 온갖 데에 민폐를 다 끼치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빚만 계속 쌓여간다. 독립 큐레이터는 이 일을 도대체 왜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쏟아부어가면서 전시를 만든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기다림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연을 끊는 방법 밖에 없다;
이 모든 일들은 마치 나비 효과처럼 쭉 이어져가면서 하나가 일어나면 그 다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도움을 준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혹은 내가 만든 기획안 내용에서 어떤 종류의 가능성을 보고 믿어준 사람이다. <청춘과 잉여>전 기금 선정 당시 심사위원 5인 중에는 백기영 큐레이터, 임근준 평론가가 있었고, <룰즈>전 기금 선정 당시 심사위원 5인 중에는 홍승혜 작가가 있었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지원 당시에도 <룰즈>의 기획안을 냈었는데, 김종호 실장이 나의 기획을 흥미롭게 봐 주었다. 기금은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심사위원에 따라서도 결과가 극명하게 달라지기 쉽고, 심사위원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독립 큐레이터도 이런면에서 작가들과 동일하다. 끊임없이 심사를 받아야 하고, 나의 작업에 대해서 설명해야한다. 그리고 선택당하는 입장에 놓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선택받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기금을 받지 못했다면, 이 전시를 과연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룰즈>전이 열리기 한 달 전쯤 인스타그램을 통해 갑자기 연락을 한 통 받았다. 제니 조 작가였다. 나보고 함께 공간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공간 섭외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 나였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위켄드다. 공간명을 함께 구상하고 운영방식, 방향성 등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달 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간 문을 열었다.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하지 못한다고 했고, 꿈은 현실이 됐다.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같은 세대의 동료가 합심하며 무언가 함께 만들어나가자는 큰 틀에서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저렇게 계속 이어졌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에는 속도가 붙었다.
두산갤러리에서 공동기획한 <사물들: 조각적 시도> 역시 큰 틀에서 이어지는 맥락 안에 있다. 신진 큐레이터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동 세대 작가들과 전시를 하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것을 따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또래의 작가들과 전시를 하게 됐다. 이 전시를 하면서도 작가 리서치에 가장 긴 시간을 쏟았다. 세명의 기획자는 각각 6-7명씩 작가를 리서치했으니, 총 18-20명 정도의 작가를 찾아본 것이다. 그 중에서 최종적으로는 4명을 초대하여 전시를 했다. 원래 알던 작가도 한두 명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청춘과 잉여> <룰즈>에서 했던 것처럼 작가 리서치에 긴 시간을 들였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은 항상 너무도 힘든 과정이지만, 그만큼 보람있고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알게되고, 신뢰를 쌓고, 함께 일을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영향력을 서로에게 끼치는 것, 그게 아마도 이 일을 하면서 얻게되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위켄드를 운영하면서 들었던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나에게 한 젊은 예비작가가 와서 해준 말이었다. 내가 편견없이 계속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함께 일하는 것처럼 보여서 좋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나를 더욱 힘나게 했다. 그리고 예비작가들이 벌이는 다양한 프로젝트, 전시들을 꼭 가서 찾아서 보았다. 개인적으로 초대를 받은 경우에는 꼭 갔다.
나는 유학을 가지 못했다. 시간적, 언어적, 경제적 여러가지 외부 사정에 의해서 포기했다. 어쩌면 그만큼의 간절함이 없었는지도, 혹은 그만큼 능력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해외에서 선진한 무엇인가를 배워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전문성을 갖출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사실상 밑바닥부터 한단계 한단계씩 올라가는 일은 참 어렵다. 시간이 오래걸리는 것도 당연하다. 마인드셋을 변경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있고, 변화되는 직무에 대한 빠른 이해나 능력 자체에 대한 어려움일수도 있다. 혹은 단순 자신감의 부족일지도 모르겠다. 코디네이터에서 어시스턴트로, 큐레이터로, 혹은 그 이후에 다른 직급으로의 변경은, 시간이 쌓인다고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었고, 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있더라도 나는 뽑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것인가? 자리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가? 자기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모델을 만들면 큰 조직에 속하지 않더라도 계속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와 마찬가지로 독립 큐레이터도 프리랜서의 개념이라면, 일을 계속 만들어서 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오히려 공간이나 예산은 없더라도, 내 페이스에 맞춰서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더 좋은 아닐까? 진짜 좋은 기획이 만들어진다면 공간이나 예산은 어떻게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청춘과 잉여> <룰즈> <사물들: 조각적 시도> 세 전시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나의 관심사는 사실상 우리 세대의 미술에 관한 것이다. 회화나 조각이라는 전통적 장르에 국한해서 그 특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함께 이뤄졌다. <청춘과 잉여>는 2000여명, <룰즈>는 (제대로 카운트하지 못했지만) 대략 1000여명, <사물들: 조각적 시도>는 1500여명의 관객이 전시를 관람했다. 신진 독립큐레이터의 기획전으로는 관람객이 많았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다면 그것은 사람들 역시도 80년대 출생의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읽을 수 있는 특성이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에 어느정도 공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수의 자주 언급되는 일부가 아니라, 각자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누군가를 새로이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룰즈> 전시에서 기억에 남는 코멘트는 "잘 몰랐던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렇게 전시를 통해 보게되어서 기쁘다"였다. 또 다른 코멘트는 "작업 하나하나가 잘 보이면서도 동시에 공간 내에서 연출이 자연스레 잘 어우러져서 조형적으로 완성도 있는 전시를 본 것 같다"였다.
세 전시가 모두 끝나고 위켄드 운영을 1년동안 하면서 공간적 거점이 생겨나니 만나게 되는 사람이 더 늘어났다. 기쁜 일이었다. 매 전시 오프닝마다 전시하는 작가의 지인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한 번 인사를 나누었다고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적으로 만나는 동 세대 작가들이 많아진다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느꼈다.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내가 보았던 세계가 너무도 편협하고 좁았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세 전시를 모두 마친 올해는 휴지기를 보내야겠다 생각했는데, 나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기도, 기획 의뢰가 있기도 했다. 마음같아서는 모두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만 수락했다.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어떤 전시가 좋은 전시이냐만큼이나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항상 걱정한다. 과연 내가 해도 될까? 하지만 자신감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했던 무언가를 좋게 보았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고, 그렇다면 이 일은 내가 해도 될 것이다. 만약 아주 뛰어나게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도 더 나아질 것이다. 어떤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전시를 하면 할 수록, 작품세계도 더욱 견고해지고 단단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지는 모습을 본다. 첫술 밥에 배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획자도 처음부터 완성형의 능력을 모두 탑재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학자도 마찬가지로 계속 논문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세계 최고의 논문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쓰다 보면 또 쓰고 싶은 주제가 생각나고, 또 그것들이 쌓이다보면 더 잘 쓰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내가 세대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함께 나아갈 동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쓴 바 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4년의 시간동안 3번의 기획 전시를 했고, 공간을 운영하면서는 6번의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느리긴 하지만 조금씩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이 생겼나고 믿는다. 적어도 나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나의 진심을, 나의 노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마음들이 어쩌면 유일하게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하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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