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덜어내는 방법
원앤제이갤러리, 김병조 윤향로 《FW19》(2019.6.11~7.7) 전시 리뷰
김병조, 윤향로의 전시 《FW19》를 보기 위해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회색의 카페트로 깔끔하게 마감된 바닥과 빈틈없이 정돈된 흰 벽이다. 발자국 소리마저 집어삼킨 멸균된 공간에 20여 점의 작품이 무심하게 배치되어 있다. 전시장에는 대부분 흰색, 회색, 검은색 등 무채색으로 마감된 미니멀한 오브제가 놓여 있고, 이와 더불어 작품의 정보를 상세히 담은 보증서가 작품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위치해 있다. 보증서를 읽어보면, <프랭크 모리스>나 <제니 로렌스>와 같은 익숙하지만 완전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름들이 작품 제목으로 적혀 있다. 이 전시가 담고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에 관해 좀 더 살펴보자.
가장 먼저 이 전시의 제목 《FW19》는 패션에서 주로 구분하는 봄, 여름 시즌(SS)과 가을, 겨울 시즌(FW)을 지칭하는 단어 뒤에 년도를 붙여, 매년, 매 시즌 출시되는 패션 브랜드의 의류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마치 매 시즌마다 새로이 나오는 의류와 같이 그들의 전시가 열릴 것임을 암시하는데, 실제로 작년에 소쇼룸에서 《SS19》(2018.10-26~11.30)라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전시로 일회적으로 완결되지 않고 일종의 연속성을 갖는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이들의 변화하는 관심사를 긴 호흡으로 펼쳐 보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전시나 작품이 주는 무게감을 조금은 덜어낸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지점은 ‘협업’이라는 장치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병조는 타이포그래피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해왔다면, 예술가 윤향로는 최신 이미징 기술을 활용해 ‘유사 회화’를 만들어내는데, 각자의 방법론과 기술을 서로 주고받으며 혼자서는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다. 두 작가는 창작에 있어서 개인의 영역을 상호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며 작가를 신화화하는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다른 분야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기존 관심사, 주제의식은 확장되고, 작품은 더욱 다층적 레이어를 획득한다.
출품한 작품을 제작한 방식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작품명으로 제시된 알쏭달쏭한 이름은 미술사와 디자인사에서 추출해낸 레퍼런스를 결합한 형태로,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정보나 컨텐츠를 차용해 작품을 제작했다. 이와 같은 제작 방식은 수많은 데이터가 생산되고, 공유되는,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에서 자연스러운 것일 테다. 기존의 차용미술(appropriation art)이 원본을 상이한 맥락에서 보여주어 비판적 접근을 가능케 했다면, 이들의 차용은 원본의 작업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고, 그 외연을 복사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표피적이고 유희적이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김병조, 윤향로 둘 다 평면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주요하게 해 온 작가임을 상기해볼 때, 《FW19》는 2차원의 평면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어가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회화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로, 몇몇 작가들은 공간으로 직접 침투하는 일종의 환경으로서의 회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김병조와 윤향로는 평면 이미지를 접어서 사물로 변형하여 공간 속에 위치시켰으며, 이를 위해 철판과 인테리어 필름 등 얇고 견고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이들이 평면으로 구상한 작업이 사물로 실체화되기 위해서는 미술품 제작을 위한 전통적인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대신, 작품을 설계하고, 재료를 선택하고, 주문 발주하여, 완성된 대상을 검수하는 일을 거쳐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선택된 사물들은 그것이 작품임을 말해주는 보증서와 함께 전시장에 놓여 관객을 만난다.
'Art > 3.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리뷰]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 <토끼가 거북이로 변신하는 방법>(니콜라이쿤스트홀, 2019.6.28~9.8) (1) | 2019.09.01 |
---|---|
[전시리뷰]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소식 (0) | 2019.07.01 |
[전시리뷰] <베틀, 배틀>(토탈미술관, 2018.8.9.~9.9) (0) | 2019.0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