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과 덴마크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양 국가 간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그 중에서도 덴마크 코펜하겐의 니콜라이 쿤스트홀(Nikolaj Kunsthal)에서 열린 전시 <토끼가 거북이로 변신하는 방법>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덴마크에 관해 아는 것을 떠올려보면, 덴마크 요구르트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정도임을 감안해볼 때, 그들 역시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상징적인 이미지 몇 가지로 한국을 이해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표피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의 교류나 이해를 넘어서기 위해,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한 니콜라이 쿤스트홀 큐레이터 힐린느 뉘복 베이(Helene Nyborg Bay)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김인선은 상호 국가를 서로 방문하며 서로에 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힐린느 뉘복 베이는 2018년 9월에 한국 방문을 통해 미디어시티 서울,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를 비롯해 많은 한국 동시대미술 작가와 전시를 보았고, 김인선은 2018년 11월, 몇몇 작가들과 함께 코펜하겐을 방문해 공간과 도시에 관한 사전 리서치를 진행했다. 한국, 혹은 덴마크의 스테레오타입이나 선입견을 제쳐두고,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한 시도였다.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따 온 전시 제목 ‘토끼가 거북이로 변신하는 방법’ 역시, 한국을 보여주는 특정 주제를 지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대신, ‘틀림’이 아닌 ‘다름’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전시가 개최된 니콜라이 쿤스트홀은 12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코펜하겐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로, 1795년 화재로 대부분이 불탔으며, 1800년대에는 폐쇄된 상태로 있다가 1912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모양을 띠게 되었다. 해군박물관, 도서관 등 기능을 바꾸어 사용하다가 1957년 전시공간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는 플럭서스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중요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발원지이며, 1990년대 중반부터는 덴마크의 실험적 동시대미술을 선보이는 장이 되었다. 네오바로크 양식의 13세기의 아름다운 교회 건물과 독특한 역사를 갖춘 이 공간에는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또한 코펜하겐의 중심부인 콩겐스 광장(Kongens Nytorv)과 니하운(Nyhavn) 항구 근처에 위치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며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전시장은 1층과 2층으로 크게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층과 2층 사이에 작은 공간이 중간지대처럼 위치해 있었다. 1층에는 평면, 오브제, 설치 등 완성된 형태를 갖춘 작업이 주로 전시됐다면, 2층에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적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로와정의 사운드 작품 <was it a cat I saw>(2018)을 접하게 된다. 전화 소리, 자동문, 문자 등 평범한 소리들을, 여기저기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듣게 되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만남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이뤄질 경우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도록 한다. 가벽이나 좌대 등 전시장의 공간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정형은 주어진 환경에서 특정한 기능을 갖춘 대상을 예술품으로 변모시키는 오브제 작업을 한다. 덴마크에 머무르는 동안 천장이 낮은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팬던트 조명을 덴마크에서는 많이 활용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덴마크에서 구한 다양한 형태의 부산물을 이용해 샹들리에를 제작했다. 기능을 다해 버려질 수도 있었던 자재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전시장을 밝게 비춘다. 백정기는 ‘물’의 순환적 특성 때문에 작품에서 물에 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 왔다. 인간이 태어나고 또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 역시 깨끗한 마시는 물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과정을 갖는다. <자연사박물관>(2019)은 물이 아무리 희석된다고 해도 그 안에는 모든 생물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믿음으로, 각종 생물 종을 설명하는 라벨과 함께 수백 개의 유리병에 물을 담아 전시한다. 그는 병들의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놓아 전시 중에도 끊임없이 물의 입자가 공간을 떠돌 수 있도록 했다. 백정기와 야스마인 피셔(Jasmijn Visser)가 함께 제작한 <The Stopper>(2018)는 서울에 있는 백정기의 아파트 싱크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데,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과 다른 시간대의 공간을 병치시켜, 물의 순환을 더욱 강조한다.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도시 공간을 픽셀화해서 재구성하는 추미림은 코펜하겐의 실루엣을 시트지로 벽에 새겨놓았다. 스텐실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과 함께 제작 과정에서 활용한 틀도 함께 전시하였는데, 전시장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풍경과 중첩되어 무한히 확장되어 나간다. 1층 전시장 가장 안쪽 제단 위에는 장종완 작가의 <Organic Farm>이 벽면 가득 걸려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담은 그의 그림은 동물의 가죽 뒤편에 그려져,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각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성물이나 상징이 놓이는 벽면의 가장 위쪽에는 흰 여우 한 마리가 빨간 책을 한권 들고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어, 종교적 관습에 대한 작가 특유의 유머와 냉소를 확인할 수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층에 작은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는 권하윤의 <489년 프로젝트>가 전시됐다. 현재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권하윤은 해외에 체류하면서 한국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 많이 등장하는 DMZ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접근하고자 했고, 2014년 파주에 머물면서 진행한 한 군인과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DMZ를 3D 애니메이션으로 상상하여 재구성했다. 권하윤은 신화화된 공간으로서의 DMZ가 아닌, 한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DMZ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기존에 정치적으로 도구화된 DMZ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여기저기 묻혀있는 지뢰 때문에 긴장감이 고조되지만, 폭탄이 터져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에서는 숭고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된다.
2층에는 장준호, 조현, 윤가림, 로와정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전통적 조각 기법을 활용해 나무 오브제를 만드는 장준호는, <누운 말들의 풍경>(2019)이라는 일종의 게임을 제안한다. 카페트 바닥에는 야광실로 꿰매어 우리나라 장기판을 구현해 두었고, 나무로 만든 말 위에는 킹, 퀸, 비숍 등 동판으로 된 뱃지를 얹을 수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서양의 체스와 동양의 장기를 섞어 만든 혼종적인 게임을 할 수 있고, 각 말 사이의 관계에는 정해진 위계가 없어 관객이 직접 게임의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의 말은 그 자체로서도 일종의 공예품이 되지만, 동시에 관객이 게임을 하기 위해 말을 이동시킬 때, 역동적인 풍경이 만들어진다. 조현의 <Wallflower>(2018)는 VR로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게임 형식의 작업으로, 게임의 목적은 주어진 시간 동안 체력과 존재감 레벨을 적절히 유지하며 살아남는 것이다. 사람들과 만나면 존재감은 올라가지만 체력은 내려가고, 혼자 있으면 체력은 유지되지만 존재감은 떨어진다. 관객은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며 타인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에 관해 고민해보게 된다. 옆에는 게임 플레이를 시연하는 녹화 영상이 재생되고 있어 직접 해보지 않더라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적’ 문화의 단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윤가림의 작업은 전통 다식 만드는 법을 다루고 있다. 음식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매개가 된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한국의 전통 디저트인 다식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해 덴마크의 관객과 함께 한국의 맛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작가가 제시한 레시피에는 정확한 재료의 양이 적혀있지 않아 참여자의 판단에 따라 맛이 변화할 수 있다. 또한 준비해간 재료를 다 사용하고 나면, 현지에서 비슷한 재료를 조달하게 되어, 하나의 문화가 또 다른 문화권에서 받아들여지면서 변화하고 적응의 단계를 거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시 종료시점에 만들어지게 될 다식의 맛을 궁금하게 한다. 그 뒤편에는 큰 잔치를 위해 차려지던 고임상을 기반으로 한국의 전통 잔칫상을 재현하였으며, 전통자수기법으로 서양의 음식재료로 쓰이는 꽃을 수놓은 병풍을 함께 전시하여, 여러 문화적 요소들을 한데 뒤섞는다.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려는 길에 마지막으로 아치형의 문과 문 사이의 벽에 놓인 로와정의 영상 작업 <Still Life>(2019)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작가가 코펜하겐에 머물면서 묵은 숙소의 모기장에 위에 still life라는 문구를 수놓은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으로, 밖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 영상은 안과 밖의 공간을 잇는 사이공간을 보여주며,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보는 사람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코펜하겐의 일상의 모습은 전시장 안에서 생경한 모습으로 관객을 만난다.
이 전시는 하나의 명징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개별 작가들의 관심사를 이어 붙여서 작금의 한국 동시대미술의 가능성을 폭 넓게 보여주고 있다. 참여한 10인(팀)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개인의 소소하고 작은 고민, 작업을 대한 태도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다름’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국제 교류의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 월간 <퍼블릭 아트> 2019년 8월호 pp.106-111 아트월드 꼭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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