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을 바라보며
광화문 광장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각종 단체들의 시위가 있다. 지방 각지에서 온 경찰 버스들이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고, 길이 막힌 줄 모르고 몰려오는 차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로 광화문 일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이런 시위의 현장의 중심에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심장 박동보다 빠르게 울려 퍼지는 비트는 사람들을 더욱 흥분하게 하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흥으로 채운다. 어쩌면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딱 이정도의 엔터테인먼트, 그것뿐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뉴욕의 덤보(Dumbo) 지구는 공장 지대였던 지역이 예술가의 아지트로 변신한 곳이다. 창고용 선박은 고급 스튜디오로 바뀌어 예술가들의 작업실, 호텔, 바, 갤러리, 유기농 제품을 판매하는 숍 등으로 바뀌었다. 덤보 지구는 비교적 월세가 저렴한 도시의 낙후한 공간에 화가, 디자이너, 밴드 등이 모여 예술적 공동체를 이루며 해당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예로 손꼽힌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재탄생시킨 이 같은 지역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고급화되고, 자연스럽게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래 살던 사람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뒤따른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로 홍익대 주변, 삼청동, 경리단길, 문래동, 성수동 등에서 이 같은 현상을 목도해 왔다.
문화예술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지고, 이들의 삶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예술 바깥의 여러 도시의 조건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완전히 순수한 상태에서 열리는 예술 행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 환원, 도시재생사업, 혹은 재단이나 국가의 사업 등 여러 목적을 가진 이해집단이 공존하며, 즉각적으로 가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해당 작품과 전시가 존재하는 데 그 기반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은 사회적 영향력의 자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예술가에게 기회는, 혹은 기획자에게 예산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주어지기도 하고, 우리 모두는 불가피하게 그것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 <어긋나는 생장점>은 예술 바깥의 여러 맥락, 상황 속에서 예술가의 가능한 실천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다.
전시가 개최된 공간 ‘문화비축기지’는 1973년 1차 석유파동을 겪으며 정부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만든 마포석유비축기지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난 41년간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1급 보안시설이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문화생산의 공간이 되었다. 기존 5개의 탱크는 문화 공간이 되었고, 해체된 탱크의 철판으로 만든 T6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T1와 T6의 공간을 이용해 진행된 <어긋나는 생장점>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용도가 변경된 이곳에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공존하며 하나의 전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전시의 주제로 삼는다. 본질적으로 합치되기는 어렵지만 필연적으로 공생하는 관계, 그리고 그것을 중재하는 기획자를 떠올린다면 이번 전시에 가장 적합한 제목이자 주제가 아니었을까.
참여한 네 명의 작가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환경에 반응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갈대로 멋지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전시가 진행 중인 T1에 당도하게 된다. 육중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콘크리트 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 전시장에 진입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김경태의 사진 작업 <Sectional Views>이다. 김경태는 여러 장의 이미지를 합성하여 화면 전체에 걸쳐 선명하게 초점을 맞춘 것 같은 효과를 주는 포커스스태킹 기법을 사용해 문화비축기지의 잘려진 단면들을 촬영했다. 지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그의 작품은 문화비축기지 공간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으로, 멀리서만 보던 것을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마주함으로써 익숙함 속에서 생경함을 이끌어낸다. 물질 자체가 가진 성질과 색깔 등은 잘려진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구성요소로 기능하며 미니멀한 색감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작품은 나무 지지대 위에 놓여 마치 비석처럼 서있는 형태로 전시되었는데,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이 공간이지만,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기념비와도 같이 보이도록 하는 장치이다. 작품이 놓인 공간의 색과 김경태의 작품은 비슷한 톤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원형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이환희와 안상훈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먼저 전시장 중앙에는 이환희의 철로 만든 육중한 조각 <Gurney>가 놓여 있다. 작품배치도를 확인하기 이전에는 마치 이 공간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보일만큼 이 작품은 색이나 재질감이 공간이 가진 무게감과 잘 어울린다. 이환희가 원래 제작해 온 회화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형적 요소가 3차원의 공간 내에 새로운 재료로 구현된 작품처럼 보인다. 좌우 대칭을 이룬 안정적인 형태감은 짐짓 석관을 연상하게 하는데, 현재는 석관을 더 이상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과거의 어떤 시점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본 김경태 작품의 모뉴멘털한 특성은 이환희의 작업과도 연결되며 느슨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파빌리온의 유리벽에는 비닐과 아크릴을 이용해 제작한 안상훈의 작품 <솔직히 나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가 전시됐다. 비닐이라는 연약하고 투명한 재질감은 이환희의 철 조각의 무게감과 대비되며 일종의 균형감을 느끼게 한다. 색과 형 그 자체를 이용한 유희적 붓놀림은 유리벽 뒤의 겨울나무의 모습과 대비되며 인위적 흔적을 강조한다. 비닐이라는 재료가 본질적으로 갖는 일회적 특성, 보관의 어려움 등은 그의 작품이 유리 파빌리온에서 이번 전시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또 사라지게 될 유한성을 극화시켜 보여준다. 전시 공간이 가진 여러 층위의 레이어 위에 새로운 층위의 이야기를 일시적으로 얹었다가 또 제거하는 행위는 공간의 맥락을 활용한 장소 특정적 작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시장을 나가 T6로 이동하여, 원형 통로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정지현의 <Big Service>를 마지막으로 관람할 수 있다. 정지현의 작품은 일반 탁구대에 비해 두 배 정도 크기가 큰 탁구대로, 관객이 직접 탁구를 치며 작품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붙특정 다수의 관객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지 않는 대신, 크기가 변형된 익숙한 사물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탁구채를 잡아들게 된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딘가 불편하게, 어딘가 이상하게 변형된 정지현의 작품은 예술도 마찬가지로 약간의 불편함, 혹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어떤 것임을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작가는 일반적인 미술 전시 장소가 아닌, 이곳 문화비축기지에서, 공간의 특수성을 발판으로 삼아, 각자의 작업에서 고민해왔던 지점을 반영하고 적용한 신작을 선보였다. 몇몇은 비교적 자신의 기존 작업세계에 충실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몇몇은 주어진 상황과 한계에서 조금은 불편한 질문들을 제시하고자 하기도 했다. <어긋나는 생장점>에 참여한 작가, 기획자, 그리고 기관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함께 서 있다.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듣는 것과 같은 이들의 하모니는 각기 다른 속도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어긋나는 생장점> 전시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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