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예순이 좀 지난 남성이 있다. 이름 난 기업에서 신입사원부터 고위 임원직에 이르기까지 30년 가까이 일한 뒤 서너 해 전에 은퇴했다. 은퇴 직후에는 좀 작은 규모의 회사 두어 곳에서 고문 명함을 건네준 덕에 사회 속 좌표를 유지하며 살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지난 일이다. 은퇴 후 그의 모든 순간은 내리막의 시간을 구성하는 일부다. 모든 순간이 과거와 경쟁한다. 과거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지금은 과거와 이어지는 선상의 일부다. 내리막의 시간에 사는 그의 지금은 언제나 최저치를 갱신하고, 그래서 그의 순간들은 언제나 남루하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려고 분투한다.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체성의 닻을 과거에 둔다. 뱉어지지 않은 채 마음속을 맴돌고 있는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정확히 하자면 “나는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이었어”로 수렴한다. 그의 분투가 성공한다고 해도 지금 순간들이 충만해질 리는 없다. 그에게는 지금 순간을 살 능력이 없다. 그는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 매일 집을 나선다. 출근으로 시작하고 퇴근으로 맺는 하루의 꼴이야말로 그가 놓을 수 없는 최소한이다.
그 오피스텔의 1층에는 여느 오피스텔과 다를 바 없이 편의점이 하나 있다. 곧 있으면 서른이 될 청년이 편의점에서 밤마다 알바를 한다. 예순 넘은 그가 편의점을 지나 ‘퇴근’하고 두어 시간이 지나면 청년이 출근을 한다. 청년은 편의점에 취업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취업준비생이다. 대학 4학년이던 지난해, 그리 놀랄 것 없이 취업에 실패했고 결국 졸업을 한 해 미뤘다. 올해 역시 상황은 지난해와 그리 다르지 않다. 취업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청년은 지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막막하다. 막막함은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닥쳐올 미래는 뻔하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취업을 할 수 없다면,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겠지. 취업을 할 수 있다면, 형편은 물론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취업 뒤의 미래조차 전도유망할 것이라고 청년은 믿지 않는다. 운이 좋아봤자 갈 수 있는 직장이란 거기서 거기다. 그중 제일 좋은 곳에 들어간다 해도, 벌어들일 수입이야 빤하고 그걸로 모을 수 있는 자산은 어떤 안정도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더 35 이상 돈을 벌지 못하는 때가 온다면? 그가 애써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하는, 그러나 닥치고야 말 미래다. 그리하여 서른이 갓 되지 않은 청년조차 내리막의 시간을 산다. 그의 지금은 미래와 이어지는 선상의 일부다. 그 미래는 어떤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도 밝지 않은 것 같다. 돈 버는 부모와 함께 사는 지금이 어쩌면 그가 누릴 최고치이고, 그래서 그의 지금 순간들은 언제나 남루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간과 싸운다. 지금은 온전히 지금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과거가 혹은 미래가 끊어지지 않는 실이 되어 질질 달라붙는다. 누군가는 지금을 과거와 견주느라, 누군가는 지금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하느라 허덕인다. 이 싸움은 모두 의미 혹은 무의미와의 싸움일 것이다. 순간을 순간-들의 연결 안에서 해석하고, 그를 통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서 삶의 서사를 구성하고, 나아가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게 늑대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누리는 행운이자 겪게 되는 고통이다. 지금 순간이 내리막의 시간을 이룬다고 해석될 때,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인식은 고통 쪽으로 기운다. 그럴싸했던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남은 건 내리막뿐이라는 고통. 또는 그럴싸한 미래는 내 몫이 아니고, 아차하면 지금보다 더 나쁜 쪽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말 내리막뿐이라는 고통.
지금을 즐기라는, 온전히 현재를 살라는 잠언이 해법처럼 주어지기도 한다. 인간이되 늑대처럼 살라는 주문인 셈이다. 그러나 늑대처럼 사는 것이 인간에게 지속가능한 해결책일 리는 없다. 인간이 늑대처럼 지금을 감각하는 순간이 물론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늑대가 아닌 인간이 해석하지 않고 감각만 하며 일상을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은 해석하고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는 뇌를 갖고 태어난다. 그러니 이 내리막의 시간을 돌파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지 파고드는 수밖에.
흔한 방식의 사회 속 위계로 과거와 지금을 연결 짓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전도유망하지 않을 미래에라도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있을 것이다. 어떤 기준에서는 내리막일 것이, 또 다른 기준에서는 오르막일 수도 있다. 10년, 20년, 30년짜리 서사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한 달, 6개월, 혹은 1년짜리의 충만한 서사들을 이어붙이며, 그 시간 안에서 ‘남들만큼’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필연적으로 정신승리에 불과할지라도.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각자가 들려주는 나름대로의 이야기들, 나름대로의 해석과 나름대로의 의미부여들.
시간의 동물에게는 그런 이야기의 역량이 필요하다.
촐처: http://audiovisualpavilion.org/wp-content/uploads/2015/06/AVP_document_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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