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 충동: 아스팔트 키드가 그리는 세상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우리의 삶은 변화했다. 손 안의 작은 컴퓨터를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도 하고, 은행 업무를 즉시 처리할 수 있고, 슈퍼마켓에 가지 않아도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으며, 각종 SNS를 통해서 개별적으로 절대 연락하지 않을 먼 지인의 일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헤비 인터넷 유저들과 지금 가장 핫한 이슈에 관해 논쟁을 펼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이러한 기계를 통해서 세상의 수많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접한다. 바쁜 일상에 지친 수많은 현대인들은 손바닥만 한 기계를 통해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지 않고도 아무런 문제없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길을 걸으면서도, 대중교통 수단에 몸을 맡겨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금 과장을 더해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온전한 자연물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매개된 이미지들, 인공적 시각 기호들을 접하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 스마트폰 화면, 책이나 잡지, 도록 등 매체의 공통적 특성 중 하나는 네모반듯한 경계 안에서 콘텐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네모’들을 더 세분화해서 기본 단위를 상상한다면, 그 역시도 또 다른 ‘네모(디지털의 최소단위인 픽셀, pixel)’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 추미림이 했던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는 처음 핸드폰이 등장했을 때, 메뉴를 사용자에게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던 아이콘을 만드는 일이었다. 가로 16, 세로 16칸의 창 안에서 256가지의 색을 활용한 픽셀 이미지를 제작했다. 마치 십자수를 하듯, 각 칸을 각기 다른 색으로 채우고 나면,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됐다. 추미림이 작가뿐 아니라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그리드(grid)와 픽셀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개최했던 개인전 <POI(Point of Interest)>에서는 파리, 분당 등 작가가 거주했던 도시 네 곳을 구글어스(Google Earth) 프로그램을 통해 사진으로 접하고, 그 위에 작가가 직접 경험한 기억을 덧입혀 작가만의 지도로 재해석해 낸 작품을 선보였다. 잉크로 프린트된 지도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특정 건물 위를 칠했다. 그 지도를 더 간략하게 기호화한 뒤 몇몇 건물이 높인 자리에 빨강, 노랑, 초록 등 단색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도형 입체물을 얹은 작품도 출품됐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모든 면이 대체로 반듯한 건물 모형은 마치 작가가 이전에 만들었던 핸드폰 속의 픽셀 아이콘과 닮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각기 다른 형태의 알록달록한 색 덩어리들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얇은 선들로 건물들이 모두 이어져 어떤 동선(動線)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 나아가 추미림은 종이를 여러 겹 쌓아 만든 미니어처 건물을 부착해 평평한 지도에 높이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부조(浮彫)처럼 건물은 올록볼록 튀어나와 컴퓨터 화면 위에서의 평평함이 아닌, 부피감과 물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는 실제로 갈 수는 없었지만 그리워했던 도시들의 새로운 풍경화를 인터넷을 통해 발견한 지도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가 만든 이미지는 자칫 디지털 이미지와 같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을지라도, 여러 장의 종이를 겹겹이 오려 붙이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해 붙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수공예적으로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눈과 마우스로만 하는 작업이 아닌, 손과 가위, 풀과 같은 실질적인 재료를 손으로 직접 사용해서 물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면서 작가가 어떤 희열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이전에 작가가 했던 작업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2016년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에 출품된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의 온도 차이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작가는 “소셜 네트워크 바깥쪽의 현실에서의 삶에 관한 것”을 만들고자 했다고 작업노트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신작에 사용한 기법은 다름 아닌 판화의 기법이다. 누군가가 도자나 판화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물의 형태가 뚜렷이 있는 경우 상당한 인내심을 요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작가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제작방식을 선택하는 것에는 아날로그적 작업방식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미림은 “컴퓨터에서 작업한 도안을 종이에 출력하고 그것을 일일이 칼로 오려내어 템플릿을 만들고 스텐실 기법을 사용해 찍어냈다. 붓과 스펀지에 물감을 묻혀 두드려 만들어진 픽셀은 거친 표면이 생겼고 회화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언뜻 이전 <POI>전에 출품한 기호화된 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은 공장, 연기, 십자가, 네모, 아파트, 계단, 덤불처럼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들로 구성돼 있다. 어떤 부분은 여러 번 물감이 묻어 짙은 색을 띄고, 어떤 부분은 옅어 마치 먹의 농담을 활용해 제작한 전통 수묵화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잉크의 짙고 옅음, 도형의 가장자리 윤곽선에서 미세하게 전달되는 떨림 등의 우연성은 분명 확인할 수 있지만, 붓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템플릿을 활용해 찍어낸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기하학적 도형이 주는 명료한 느낌이 있다. 전시에는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에서 사용됐던 템플릿 역시 함께 제시된다. 얇은 종이로 만들어져서 다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의 템플릿은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은 시간과 물리적 행위를 연상케 하는 단서로 기능한다. 추미림이 이전 작업에서 개인적 내러티브의 전달, 혹은 주관적 경험을 시각화하는 데 몰두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기본 그리드를 활용해 제작한 기하학적 유닛들을 다양하게 접합시킨 형태의 변주를 시도함으로써 형식 실험 자체에 더욱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추미림의 작품이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취하고 새로운 시각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매우 익숙한 ‘아스팔트 키드’가 그려내는 이 시대의 풍경화라고 볼 수는 없을까 자문해본다. 인디자인과 같은 디자인 툴을 켜면 흰 화면이 나온다. 그 바탕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드’라 불리는 가상의 안내선이 배치되어 있다. 작가뿐 아니라 디자이너로도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추미림이기에, 그에게 그리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과도 같은 것일 테다. 전시 제목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그리드를 고정된 벽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것으로 보고 수면위의 물결이 흔들리듯 일렁인다고 쓰고 있으며, 그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모듈이 탄생했다고 기술했다.
추미림은 특정 기능을 손쉽게 전달하기 위한 픽셀 아이콘부터 기호화한 지도 위의 건물, 이제는 선과 선이 결합해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듈들을 화면 위에서 선보인다. 이미지는 점차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서술적 특성을 갖기보다는 자율적인 형상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다. 표현방식은 종이를 쌓아 만든 부조에서 종이를 오려 스텐실기법으로 찍어, 손으로 직접 제작하는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지만, 찍는 행위에서 발생되는 우연한 떨림 등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일련의 전시를 통해 추미림은 그리드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의 변혁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제작방식은 아날로그적 방식을 고수하며 수공예적 특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그의 다음 행보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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