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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2. 주제론

[디자인사] 동시대 미술작품에 나타난 ‘디자인 충동’

by ㅊㅈㅇ 2016. 7. 8.

동시대 미술작품에 나타난 디자인 충동

: 윤향로, 추미림의 작품을 중심으로



. 들어가는 글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2016.3.25.~5.29)전은 2005년 이후 10여 년간 서울에서 이뤄진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개인 작업을 집중 조명한 전시였다. 일부 친분을 가진 그룹의 디자이너들만 참여해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기존의 디자인 전시와는 차별화되는 자율적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디자인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월간 아트인컬처에 실린 그래픽 디자인전 리뷰에서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 놓인 이들은 최근 몇 년간 서로 뒤섞이고 상호 참조하면서 미술관으로 역류해 들어왔다. 미술 제도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디자인 제도는 이것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각주:1]고 쓰고 있다. 다수의 출품작들은 미술 전시의 도록이나 포스터로 제작된 것들이었고, 순수미술 분야의 프로젝트와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과 마찬가지로, 전시의 포스터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미술과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일례로, 일민미술관, 금호미술관, 대림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주요 국공립, 사립미술관에서 열린 대부분의 디자인 전시 역시 항상 타이틀에 디자인전시임이 명기된다.[각주:2] 다른 순수미술 전시에 순수미술전시임을 기록하지 않는 것과 대비되게 디자인은 특수 영역으로 간주되어 구분되어 호명된다.

오늘날에는 미술에서 전통적인 구분방식으로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조각, 회화, 판화, 설치, 비디오 등 매체로 분류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작품은 장르의 구별이 불가능한 지점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디자인 작업물인지 순수미술 작품인지 명확히 나누기 어려운 작품들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래픽 디자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 디자인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작가들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시각문화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가가 만들고, 작가는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게 된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작가의 경우,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해 다양한 소식과 정보를 접하는데, 매체를 통해 매개된 정보는 인공적인 가공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된다. 보고 듣는 방식의 변화는 시각적 인지체계의 변화를 야기하고, 더 나아가 작품 제작 방식의 변화에도 일조한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이제 붓을 드는 일보다 컴퓨터에서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을 켜는 일이 더 익숙하다.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내용이 개념적으로 정립이 되고 나면,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표현방식을 찾게 되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동시대 미술 작품에서 그래픽 디자인적 요소를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2장에서 현대미술사에 나타난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연관관계를 짚어보겠다. 뒤 이어서 윤향로, 추미림 두 작가의 작품의 제작방식, 의도, 내용 등을 살펴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순수미술과 디자인이 어떻게 각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 보도록 하겠다.

  

. 현대미술사에 나타난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연관관계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그의 저서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1949)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등장한 새로운 양식을 그 시대의 사상, 제도, 기술적 배경을 기반으로 분류하고 정리했다. 디자인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미술계와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경우에는 미술의 분야까지 모두 다루고 있다. 언급한 책의 3장과 4장의 제목은 각각 ‘1980년대의 회화’ ‘아르 누보, 당대 주요한 미술의 경향과 작가들이 지향했던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을 설명한다.

먼저 1890년 유럽 회화를 선도한 일군의 작가들을 소개한다. 세잔, 고갱, 고흐, 뭉크, 쇠라, 루소 등의 화가들은 그때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을 이뤄내기 위해 싸웠다. 르누아르가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착해 매혹적으로 그리는 데 집중했다면, 세잔은 원통, , 원뿔로 회화를 구성해 자연의 영구한 규칙을 구현하고자 했다. 인상주의자는 눈에 직접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고갱에게 회화의 본질은 영원한 의미가 담긴 요소를 품고 있는 무언가에서 받은 인상을 압축하는 데 있었다. 1890년대 회화혁명 중 빠지지 않는 것은 내용 위주의 그림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풍경, 정물, 초상화가 떠오를 뿐 종교나 철학을 다루지는 않았다. 비슷한 시기, 펠릭스 발로통은 목판화 기법을 활용해 상업 포스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영역에 들여놓은 선구자가 됐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툴루즈 로트렉을 비롯한 상업 포스터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평면적이고 간결한 구성이 특징적이었다.[각주:3] 19세기 말에 등장한 포스터는 20세기 글로벌 문화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이러한 포스터를 통해 한 세기에 걸쳐 이뤄진 문화 교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 문화에 있어서 포스터는 점차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각주:4]

아르 누보는 1895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기말 전환의 시기를 맞이한 미술가들이 과거의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찾고자 한데서 발생하게 되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 미술이 곧 생활이 되는 삶을 꿈꿨다. 고딕 부활, 미술공예, 기타 복고 경향에서 비롯된 요소들에 자연에서 추출한 형태를 섞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 아르누보는 장식분야에서 잠시나마 크게 유행했으며, 화가, 도안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 전 분야의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특정 사상을 공유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이다. 제프리 키디의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미스터 키디 명문집(2013)에서 언급되고 있는 좀비 모더니즘이라는 단어 역시 디자인 분야에서 먼저 통용되다가 순수미술 분야에서도 적용된 단어이다.[각주:5] 이처럼 20세기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디자인과 순수미술 분야는 비평적 흐름의 커다란 틀 안에서 서로 상호 참조하며 공생해온 것이다.

  

. 동시대미술 작품에 나타난 디자인 충동

디자인의 어원은 르네상스 시기의 디세뇨(disegno)’, 인문주의 운동 과정에서 인문학으로 상승된 미술, 건축, 조각, 회화의 공통 조형원리이자, 서구 최초의 통합된 조형예술 개념이었다.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어원적 기원이지만, 근대 디자인이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차별적 위계질서를 없애는 대신 독자적 조형언어와 문화적 의미를 담지하며 탄생한 것이기에 개념적으로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각주:6]

본고에서 말하는 디자인 충동을 정의하기 위해 먼저 디자인의 정의를 특정 범주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 디자인은 개념, 행위, 산물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단어다.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망은 매우 복잡다단한데, 이에 디자인 평론가 최범은 그의 저서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2013)에서 폭넓은 디자인의 개념을 세 가지 인식론적 층위-추상적, 보편적, 역사적-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 중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디자인은 장인의 노동으로 이뤄지는 제작 차원을 제외한 조형적 계획, 구상의 영역을 지칭한다. 본고에서 말하는 디자인적 요소는 최범이 말한 세 가지 층위 중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디자인 분야를 지칭한다. 충동이라는 단어는 할 포스터(Hal Foster)가 기존의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작업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쓴 단어 아카이브 충동(An Archival Impulse)’에서 가져온 것이다.[각주:7] 아카이브 충동이란 현대미술 작가들이 종종 잊혀져있는 역사적인 정보를 찾아내서, 발견한 이미지 오브제, 텍스트를 활용하여 그들이 원하는 형식으로 재해석해내는 방식을 의미한다본고에서는 순수미술 분야 작가들의 디자인 결과물에서 영향을 받은 예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디자인 충동이란 조형물의 설계나 도안, 그리고 그것을 실체화할 때 활용하는 툴이나 제작 방식의 측면까지를 모두 포함하여 점차 디자인적 성향이 커져가는 상황 전반을 일컫는다.


1. 윤향로: 레이어 집적으로 만든 풍경

윤향로는 도안집 혹은 만화 이미지에서 이미지를 차용해 그것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해 온 작가이다.[각주:8] 2008년 제작한 <교과서 시리즈(Textbook Series)>(2008)는 기존 이미지에 약간의 조작을 가해 기존의 착한 이미지를 폭력적인 상황으로 맥락을 변경하는 형태이다. 특히 교과서에 사용된 중립적인 이미지는 모범이 되는 전형과 같은 특성을 갖는데, 이에 조작을 가하여 성적인 행위를 연상시키는 자세나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도덕 5-1>에서 학생들은 또래 친구의 시체를 학교 운동장에 묻고 있으며, <발표>에서는 손을 든 아이들이 주먹이 아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체제 순응적 성격을 가진 익숙한 도안 이미지를 가져와 선을 단순화하고, 배경을 삭제시키는 등 불필요한 정보나 감정적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단순화하였으며, 이러한 특성 때문에 폭력적인 상황을 통해 발생되는 공포심에 작가는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기존에 교과서를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 혹은 도안 사전에 실려 있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가져와서 그것을 재조합하는 형태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향로 작업에서 디자인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2012년에 개최한 첫 번째 개인전 <숏 컷(Short Cuts)>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을 재구성한 영화 숏 컷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 윤향로는 일상적 사건사고를 통해 삶의 붕괴 양상을 경험하면서도 마치 아무 일이 없는 듯 무관심 속 평온한 현실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일상의 폭력과 폭발의 지점을 사유한다.”[각주:9] 이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납작한(Flatten)>(2012)은 만화책에서 가져온 무수한 폭발 효과를 나타내는 기호들을 모아 만든 변화이다. 특정한 사건을 전달하는 인물이나, 배경과 같은 핵심적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고, 주변적이라고 여겨지는 만화 내에서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기호들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교과서 시리즈>에서 기존 이미지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맥락을 바꿨다면, <납작한>에서는 만화 내에서의 특정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기호만을 따로 떼어내 자신만의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2013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김현진 큐레이터 기획의 그룹전 <기울어진 각운들>에서는 만화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인 <피그먼트 프린트(Pigment Print)>(2013)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미국의 DC 코믹스(DC Comics) 만화책의 표지를 수집하여 인물, 타이틀, 로고를 모두 제거하고 상황이 발생하는 공간과 흔적만을 남겨둔 인쇄물 작업이다. 책의 표지에는 주로 해당 만화책의 가장 중요한 장면-주로 주인공과 악당이 맞서 싸우고 있는-이 채택되는데, 핵심 정보를 의도적으로 모두 누락시키고 주변적 요소들을 작품의 주제로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은 마치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 각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기존 이미지의 역할 바꾸기 게임과 같이 기능한다.

위와 같은 실험은 201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빌어먹을 풍경(Blasted (Land) scape)>에 출품한 작품에서 그 의도가 극대화된다. 작가는 <슬램덩크>, <은하철도 999> 등 대중만화에서 심리적 정황이나 인물의 모션을 예상하게 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스파크, 동작선 등의 도식을 따와서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캐릭터와 대상을 삭제하고 남은 도식을 여러 차례 쌓고 배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축적된 데이터 레이어는 디지털 인쇄되어 각기 다른 사이즈로 출력돼 전시장에 걸렸다. 윤향로는 이미 존재하는 그래픽 디자인(만화)의 일부분을 떼어낸 뒤 그 요소들을 결합한 풍경화를 제작하고 그것을 프린트한 것이다.[각주:10]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그래픽 디자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 보인다. 전시와 연계하여 300페이지 분량의 데이터 도판을 담은 드로잉북도 함께 발간했는데, 책에는 총 2652개의 레이어가 사용됐다. 여러 만화책을 한 장씩 평판 스캔한 뒤,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모두 지운 다음 본래 판형을 유지하면서 레이어의 순서를 뒤섞어 한 폭의 풍경화를 제작한 것이다. 스캔본을 활용해야했기 때문에 1200dpi로 고화질로 스캔했고, 용지 역시 표백된 종이를 사용해 바탕이 더 하얗게 보이도록 했다.[각주:11]

<교과서 시리즈>(2008), <납작한>(2012), <피그먼트 프린트>(2013), <빌어먹을 풍경>(2014)에 이르기까지, 윤향로는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하여 우리 주변에 산재한 폭력에 관해 말하거나, 이미지의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상황을 모두 삭제하여 주변 정황만을 작품의 주제로 전면적으로 드러내거나, 또는 만화에서 사용된 동작선이나 스파크만을 따와 수백개의 레이어를 쌓아 새로운 형태의 풍경화를 만들어 냈다. 활용하는 소재, 편집 방식, 인쇄 방식 등 기존에 디자인된 책이나 만화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형태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2. 추미림: 픽셀 스페이스와 그리드 충동

추미림은 인터넷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해 왔다. 작가 추미림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각주:12] 그가 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 중 하나는 처음 핸드폰이 등장했을 때, 메뉴를 사용자에게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던 아이콘을 만드는 일이었다. 가로 16, 세로 16칸의 창 안에서 256가지의 색을 활용한 픽셀 이미지를 제작했다. 마치 십자수를 하듯, 각 칸을 각기 다른 색으로 채우고 나면,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됐다.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개최했던 개인전 <POI(Point of Interest)>에서는 파리, 분당, 베르사유 등 작가 거주했던 도시 네 곳을 구글어스(Google Earth) 프로그램을 통해 사진으로 접하고, 그 위에 작가가 직접 경험한 기억을 덧입혀 작가만의 지도로 재해석해 낸 작품을 선보였다. 실제로 갈 수는 없었지만 그리워했던 도시들의 새로운 풍경화를 인터넷을 통해 발견한 지도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 잉크로 프린트된 지도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특정 건물 위를 칠했다. 그 지도를 더 간략하게 기호화한 뒤 몇몇 건물이 높인 자리에 빨강, 노랑, 초록 등 단색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도형 입체물을 얹은 작품도 출품됐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모든 면이 대체로 반듯한 건물 모형은 마치 작가가 이전에 만들었던 핸드폰 속의 픽셀 아이콘과 닮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각기 다른 형태의 알록달록한 색 덩어리들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얇은 선들로 건물들이 모두 이어져 어떤 동선(動線)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 나아가 추미림은 종이를 여러 겹 쌓아 만든 미니어처 건물을 부착해 평평한 지도에 높이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부조(浮彫)처럼 건물은 올록볼록 튀어나와 컴퓨터 화면 위에서의 평평함이 아닌, 부피감과 물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2016년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에 출품된 작품은 컴퓨터에서 작업한 도안을 종이에 출력하고 그것을 칼로 오려내 템플릿을 제작, 스텐실 기법을 활용해 찍어낸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언뜻 이전 <POI>전에 출품한 기호화된 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은 공장, 연기, 십자가, 네모, 아파트, 계단, 덤불처럼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들로 구성돼 있다. 전시에는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에서 사용됐던 템플릿 역시 함께 제시된다. 얇은 종이로 만들어져서 다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의 템플릿은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은 시간과 물리적 행위를 연상케 하는 단서로 기능한다. 추미림이 이전 작업에서 개인적 내러티브의 전달, 혹은 주관적 경험을 시각화하는 데 몰두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기본 그리드를 활용해 제작한 기하학적 유닛들을 다양하게 접합시킨 형태의 변주를 시도함으로써 형식 실험 자체에 더욱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추미림의 작품이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취하고 새로운 시각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매우 익숙한 아스팔트 키드가 그려내는 이 시대의 풍경화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디자인과 같은 디자인 툴을 켜면 흰 화면이 나온다. 그 바탕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드라 불리는 가상의 안내선이 배치되어 있다. 추미림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는 특성은 그리드를 지키고자하는 느슨한 욕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선과 선을 결합해 만들어낸 기하학적 모듈을 선보인다. 아날로그적 제작방식으로 우연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있지만, 작품 제작의 초기 단계에서 컴퓨터 툴을 활용한 기본 도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가는 글

디자인 제도 내에서 디자인이 아니라고 분류되는 자율적인 예술작품이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미술 분야 내에서도 디자인적 특성이 강화되고 있는 작품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에드워드 루샤(Ed Ruscha)<26개의 주유소>(1963)가 고속도로 섹션에 놓여야할지, 미술 섹션에 놓여야할지, 사진 섹션에 놓여야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던 상황에 처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앞서 살펴본 윤향로, 추미림의 경우처럼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주제, 표현방식, 표현수단 등이 앞으로 더욱 혼재되어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점차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 전통적인 형태의 전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전시로 이러한 현상을 짚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전시 제목을 붙이고 디자이너로 활동해 온 이들의 결과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서 소개한 작가들처럼 작품제작 방법론에 있어서 특정 경향성을 나타내는 작가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될 수 있을 듯싶다.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혼성적 특성이 더욱 또렷해져가는 시점에서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비평의 토대 역시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미스터 키디, 이지원 역,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스테파노 반델리, 2014.

정현PBT(Photoshop Brush Text)』 서울초파원형출판, 2014.

니콜라우스 펩스너권재식김장훈안영진 역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서울비즈앤비즈, 2013.

최범,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 안그라픽스, 2013.

Wendy Wick Reaves, Ballyhoo! Posters as Portraiture, National Portrait Gallery, 2009.

 

정기간행물

임승현, 추미림: 디지털 시대의 향수, 월간미술, 2014. 10. p.173.

강정호, 윤향로: 두 가지 현실 사이, 아트인컬처, 2012. 8.

 

전시 카탈로그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도록, 서울: 일민미술관, 2016.

    김형진, 최성민,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일민미술관, 2016.

윤향로 개인전: Blasted (Land) scape도록, 서울: 아르코미술관, 2014.

    박재용, 발파된 잉크 방울들, Blasted (Land) scape, 인사미술공간, 2014.

젊은 모색 2014도록,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014.

    류한승, Intermission & Intervention, 2014 젊은 모색전, 국립현대미술관, 2014.

POI(Point of Interest)> 도록, 서울: 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14.

    김인선, 추미림 작가를 소개합니다, POI(Point of Interest)전 도록, 2014.

 

웹페이지

윤향로 웹사이트 http://yoonhyangro.tumblr.com/

추미림 웹사이트 http://www.chumirim.com/



  1. 윤원화, “내일을 향한 디자인”, 『아트인컬처』, 2016.5., p. 67 [본문으로]
  2.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사물학-디자인과 예술>(2014.6.5.-2015.1.11.), <디자인: 또 다른 언어>(2013.7.25.-2014.5.4.), 금호미술관 (2016.4.29.-9.11), (2014.3.20.-8.17), 서울시립미술관 (2013.10.22.-2014.2.16.) 등이 열렸다. [본문으로]
  3. 니콜라우스 펩스너,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 서울: 비즈앤비즈, 2013. p. 78. [본문으로]
  4. Wendy Wick Reaves, Ballyhoo! Posters as Portraiture, National Portrait Gallery, 2009. [본문으로]
  5.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포스트모던의 비평 효과는 한 순간에 파괴돼 버렸고, 세기말 닷컴광풍을 거쳐 밀레니엄에 이르자 오늘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오늘이 아니었다. 미디어테크놀로지의 발달로 20세기가 더욱 생생하게 오늘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20세기를 데이터베이스 삼아 끝없이 재구성되는 스킨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20세기의 핵심이 로버트 휴즈가 표현한 ‘새로운 것의 충격’이라면, 21세기의 특징은 ‘오래된 것의 충격’이다. 지속적으로 20세기에 이뤄진 성취를 재발견, 재구성하고 그 힘에 놀라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고 언급했다. ; 임근준, 「오래된 것의 충격(Shock of the old」, 『디자인정글』, 2015.4.9. http://goo.gl/IzQCqO [본문으로]
  6. 근대디자인은 1900-30년대에 걸친 서구 문화의 아방가르드 시기에 가능했던 디자인 존재 방식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갖는다. 귀족주의적 전통, 기계시대의 활력, 사회혁명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1930년대에 이르면 근대 디자인은 소멸하고 새로운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현대디자인은 1920년대 말 불황 타개의 수단으로 미국에서 탄생하여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스타일링을 조형 문법으로 삼았다. 근대디자인이 하나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합리적인 세계를 조형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현대 디자인은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의 순환적 실천 방식이었다. ; 최범, “디자인 개념의 인식론적 층위들: 추상, 보편, 역사”,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 안그라픽스, 2013. [본문으로]
  7. 할 포스터가 사용한 이 제목은 본래 크렉 오웬스의 “알레고리적 충동: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향하여(The Allegorical Impulse: Notes Toward a Theory of Postmodernism”, October 12 and 13(Spring and Summer 1980)를 참조하여 사용한 것이다. ; Hal Foster, “An Archival Impulse”, October, Fall 2004, No. 110, pp.3-22. [본문으로]
  8. 윤향로는 1986년 출생하였으며,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평면조형을 전공했다. [본문으로]
  9. 우아름은 이 작품을 일컬어 “배경과 지시문이라는 변죽을 입은 두 벽면은 하나의 텅 빈 무대공간을 선사한다. 이 연극같은 상황에서 관객은 가상의 배우가 된다. 한 쪽에서 폭발 효과들을, 한 쪽에서 ‘박수갈채’, ‘환호’, ‘야유’, ‘흐느낌’, ‘비명’이라는 단어들의 웅성거림을 보고 있자면 머릿속에 파열음이 울린다.”고 썼다. ; 우아름, <숏 컷>전 서문, 175갤러리, 2012. [본문으로]
  10. 그래픽 디자인이란 여러 가지 인쇄 기술의 특성을 이용해 시각적 표현효과를 꾀하는 디자인, 혹은 인쇄물을 뜻한다. [본문으로]
  11. 탁영준, 「윤향로, 수백 개의 풍경으로 만든 중층적 풍경화」, 『아트인컬처』, 2014. 10. [본문으로]
  12. 추미림은 1982년 출생으로,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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