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과 바느질로 그리는 여성의 서사: 한상아의 세계
단색으로 그리는 다채로운 감각
광목천 위에 먹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작가 한상아는 먹을 갈고, 천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이 번지면 마르기를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특정 공간에 홀로 틀어박혀 같은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해 나가는 모습은 어떤 믿음에서 비롯된 종교적 행위처럼 보인다. 작가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오직 검은색이라는 한 가지 색을 이용해 완성했음에도 그의 그림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며, 수십 가지의 색으로 그려 낸 그림을 보는 듯 풍부하고 가득 찬 느낌을 전달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그리기로 선택한 대상이 전달하는 명료한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 여러 가지 기법으로 다채로운 질감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지금도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그려진 수묵화를 즐겨 찾아보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사군자를 가르친다. 주재료인 먹에 대한 존중이 있는 작품이라면 여전히 동양화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현대 동양화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상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가 몇 가지 있다. 손, 별, 꽃, 식물의 잎, 물고기, 여성의 신체, 절단된 신체, 돌, 우주, 바다, 불 등이다. 동물이나 식물의 형태는 원초적 자연을 연상시키고, 활짝 핀 꽃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에서처럼 여성의 생식기를 은유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장―프랑스의 시인 로트레아몽(Lautreamont)이 쓴 “우산과 재봉틀이 해부대 위에서 만난 것처럼 아름답다”―처럼, 그의 작품은 일상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대상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한상아는 에스키스를 통해 화면에 바로 이미지를 완성하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른 뒤, 잘라낸 이미지를 바느질로 엮어내 화면 위에서 재구성하기도 한다. 각 이미지는 각기 다른 맥락에서 존재하다가 합쳐짐으로써 예기치 않은 조합을 통해 기존과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여성성과 모성의 구현
송은아트큐브에서 2019년에 개최한 개인전 《낯선 파동》에서 두루마리와 같이 기다란 천에 펼쳐 보인 그의 이야기는 긴 호흡으로 이어지며 어떠한 서사를 문장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의 작품은 여성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통해 맞이한 큰 변화에 관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작가로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에서 찾기 힘든 꿈을 좇으면서도 동시에 모체로서는 매우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고통과 위협, 신체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되는 이중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작가는 새로운 생명이라는 미래를 꿈꾸게 하는 장소로서의 신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느낀 외로움, 절망감, 두려움, 기대감, 기쁨, 행복감 등 여러 감정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
신생아가 보는 모빌 형태로 만든 작업은, 실제로 그의 자녀가 신생아인 시기에 만든 작품이다. 광목천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솜을 채워 넣은 뒤 바느질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은 쉽게 파손될 위험이 있는 종이와는 달리 안전한 재료로 아이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지속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었다.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아이와의 사소한 일상을 함께하지 않고는 작업이 어려운 엄마-작가의 생존법인 셈이다. 아이가 점점 커지면서 엄마의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치 않은 독립적 존재로 성장한 것처럼, 그의 작업도 자라나는 아이와 같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조합과 상징으로 확장된 부드러운 세계
2021년 문화비축기지에서 보여준 〈공탑〉은 거대한 돌을 여섯 개 쌓아 놓은 작품이다. 관객의 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이 작품은 마치 절에서 볼 수 있을법한 탑과 닮았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기도 했다. 관광객들은 각자 작은 돌을 주워 사찰 근처에 자신만의 돌탑을 쌓기도 하는데, 쌓는 행위를 통해 소원을 비는 것이다. 작가의 탑 역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미로, 코로나19라는 외부적 상황으로 많은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단단하고 육중한 실제 돌과는 달리 한상아의 돌탑은 부드러운 솜이 들어간 가짜 돌로 중력을 거스르며 천장에서 내려온 끈에 매달려 있다.
그의 조각은 비록 윤곽선이 뾰족한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천과 솜으로 만들어져 위협적이기는커녕 따뜻하고 부드러운 특성을 가진다. 그는 실제로 모든 작품을 직접 손바느질해 제작하며, 작품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포근하고 커다란 덩어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 장시간 작업을 하더라도 오히려 치유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따뜻한 손길과 눈빛, 그리고 애정 어린 포옹까지,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모습은 아이를 대할 때의 모습과 닮아있다.
작가는 최근 작업을 지지대 없이 단독으로 서 있도록 구현해 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가 ‘자립한 신체들’, ‘살’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근작은 뼈대가 스테인리스스틸로 되어 있다는 조각에 가깝게 느껴진다. 또한 근작에서 표현되는 이미지로만 보더라도 역시 더욱 간결하고 집약적인 특성이 눈에 띈다. 아치형의 작품 〈현관 2〉를 그는 “불교에서 현관이 깊고 묘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여성 신체의 자궁문을 연상케 한다. 얇은 술이 잔뜩 흐드러져 있는 이 문은 신체의 신비로움과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하는 통과의례를 나타내는 듯 보인다.
2018년 위켄드에서 열린 개인전 《낯선 사이》에서 공간 전체를 하나의 호수처럼 표현한 그는 삼차원과 이차원을 하나로 봉합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옆으로 길게 펼친 작품과 수직으로 높이 세운 작품, 그리고 현재의 ‘자립’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전시장에서 구현해 내는 방식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실험을 이어 왔다. 광목에 먹을 이용하고 손바느질로 제작한다는 주요 방법론을 기반으로, 가능한 모든 제작 방식을 내용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에서 작가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치유와 연결을 꿈꾸는 바느질
‘바느질’은 무언가가 찢어지거나 떨어졌을 때, 그것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이다. 바느질은 예전부터 여성적인 노동으로 여겨져 왔지만, 수평과 수직의 운동을 반복하며 실과 바늘이 천에 침투해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따뜻한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작가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에 명확한 답은 알 수 없겠지만, 감히 추측해 보건대, 작가는 예술이 주는 힘에 대한 믿음으로 가장 가까이에는 자기 자신과 가족, 더 넓게는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는 여성들, 이 작품을 마주하고 시간을 들여 감상하고 있을 관객들에게 오늘도 무사히 보내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 공예문화 2024 겨울 / 통권 제 65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장: 문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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