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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전시서문] 금산갤러리, 권용래(Kwon Yongrae) 개인전 <빛의 정원>(2016.7.20~8.16)

by ㅊㅈㅇ 2016. 7. 6.

 


진실된 아름다움을 찾아서


언젠가부터 정치적 메시지나, 특정 이슈, 이론적 맥락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조형 요소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는 작품을 대규모 기획전이나 국제 비엔날레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듯하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수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몇몇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전통적 범주의 매체를 벗어나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매체를 활용한 조형적 작품은 비평의 대상에서 조금씩 멀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하기의 즐거움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조형적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쫓는 의사(pseudo)-수도승과 같은 작가가 있는가 하면, 시청 앞 광장에서 데모 장면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도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 권용래는 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각자의 관점과 방향성에 맞게 자신의 관심사를 긴 시간동안 집요하게 하지만 조용하게 붙잡고 있는 이들을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작가 권용래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관객이라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이 형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자연스레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림자와 반사된 빛이 한 몸처럼 붙어 물결처럼 흐드러져있어, 일견 얼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 유심히 관찰해보면, 이 같은 형체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기본단위 수십, 수백여 개를 망치로 표면을 두들겨 울퉁불퉁하게 한 다음, 그것들을 캔버스 내의 각기 다른 위치에 고정시켰다. 이러한 형태는 마치 음식을 담지 않은 그릇과 같은데, 이때 그 그릇에 담길 음식은 작가에게는 곧 이다. 작가는 직접 설치될 장소를 선정하고 조명을 매달아 그의 그릇에 빛을 빼곡하게 담는다. 몇몇의 스테인리스 조각에는 색을 덧칠해 반사되는 빛에 컬러감을 더하는데, 이를 통해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빛은 흔들리는 바다 물결처럼, 혹은 타오르는 불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쪽에서 조명을 동시에 비추는 경우에는 날아가는 비둘기의 힘찬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빛의 파동은 끝없이 확장되며 작품이 설치된 공간 내에 은은한 울림을 준다.

그가 이 같은 작업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82학번인 권용래는 대학 시절 작업실을 운영할 비용이 충분치 않아 지하실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이라고는 작은 환기구 하나. 그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만을 볼 수 있었다. 예술은 진지하고, 무겁고, 의미 있고, 암울하고, 가난하며, 낭만적인 어떤 것이라 믿었던 시절, 그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 작업실에서 은박지 조각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의 경험을 통해 작가는 빛이 반사된 모습이 물감으로 재현했던 그 어떤 형태보다도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깡통 뚜껑, 알루미늄 조각 등의 가장 적합한 재료를 찾기 위한 실험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레이저 커팅한 스테인리스 유닛을 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2002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난 14년 여간 그는 빛을 활용한 형식 실험을 지속해 오고 있다.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는 빛의 반사도, 그림자도 없이 캔버스 위에 직각으로 꽂혀있는 스테인리스 조각들만을 목격하게 된다. 권용래가 제작한 구조물은 그 자체로서는 텅 비어있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그러다 불을 켜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안료로도 구현해낼 수 없는 색채와 형태가 스멀스멀 살아난다. 작가가 만들어둔 구조물은 빛이 그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비어있던 작품이 순식간에 가득 차게 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빛을 작품의 주재료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작품의 설치가 완료될 때에 작가는 자신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광경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품은 액자 혹은 캔버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담기는 빛, 다시 말해, 작품의 바깥에 있다. 비어있지만 가득 차 있고, 작품의 본질이 그것의 바깥에 있는, 이 같은 모순적 상황이 가장 삶과, 그리고 현실과 닮아있다는 점에서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2시간 정도 진행된 인터뷰 가운데 권용래가 꽤 긴 시간을 들여 설명한 작품이 한 점 있다. 그것은 바로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1857~9)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전원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낀다고들 말하지만, 실상 그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내일의 먹거리를 걱정하며, 남아있는 이삭 한 톨까지 줍지 않으면 다음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이다. 작가는 예술작품이 진실과 다르게 미화되거나 신화화되는 낭만주의적 태도를 경계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 진실을 가리는 도구, 혹은 잘못된 신념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세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여 작품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성이다. 그는 구체적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 대신, 마치 수도승이 도를 닦듯이 스테인리스 조각을 망치로 내리 쬐며 평평한 표면을 구부러뜨리는 작업만을 반복한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 옷을 입듯이, 같은 행위를 꾸준히 반복해서 만들어낸 그만의 구조물은 인간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자연물, 빛을 받아들여 조형적인 형상을 생성해 낸다. 그것은 아마도 권용래가 생각하는 가장 진실 되고,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지만 동시에 틀린 답도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쫓으며 산다. 누군가는 자극적인 컬러의 화려한 드레스를 보고 아름답다 느끼는가하면, 누군가는 한강변을 산책하다 찰나의 순간에 마주한 수면 위의 반짝임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권용래는 작품을 통해 비우는 행위를 통해 채워지는 인생의 진리를, 또는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에 관해 말한다. 비우고, 또 채워지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콜라의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천천히 조금씩 음미해야하는 뜨거운 차를 앞에 놓고는 불편함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통해 조용하게 그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산책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하고 싶다


권용래 / 1963년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소나무갤러리, 갤러리시몬, 성곡미술관, 금산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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