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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1. 작가론

[작가론] 심혜린(Shim Hyelin): 매일의 삶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세계

by ㅊㅈㅇ 2017. 9. 4.

심혜린 <Slipstream_oil on canvas> 130.3×163.3cm 2016


매일의 삶을 기반으로 이상적인 세계

: 심혜린의 작품에 관한 짧은       


2017, 오늘날의 동시대미술 현장에서추상 미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우리는  추상을 손쉽게 구상의 반대말, 특정한 형상을 인지할 없도록 제작된 회화나 조각 작품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구상 혹은 추상의 기준으로 대상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오늘날 미술에서 회화나 조각은 활용가능한 여러 매체 하나이며, 중에서도 추상미술은 좁은 분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흐름 속에서 추상이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변화와 역사에 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 우리는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를 살고 있다. 문화예술을 비롯한 모든 창조적인 산업 분야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작품들, 혹은 중요한 전시에서도 개별 작품의 의미보다도, 특정한 개념이나 의도적으로 부여한 의미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의미의 과잉 현상 역시 물질적 풍요와 함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 하나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추상미술이 어떤 역할을 갖는다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현재의 정의를 끊임없이 탈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2014 미국 뉴욕에서 동시대 회화를 중점적으로 다룬 전시가 있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이하 MoMA)에서 열린 <영원한 현재: 무시간적 세상의 당대 회화(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2014.12.13.-2015.4.5.)전이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로라 홉트만(Laura Hoptman)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소설에서 사용한 단어무시간성(atemporality)’ 인터넷 시대에 과거 모든 시대의 스타일들이 공존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무시간성은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대중음악, 패션 여타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으로, 음악에서도 복고가 유행하고, 패션에서의 트렌드도 반복되는 것처럼, 미술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보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타일이 혼종적으로 나타나는 오늘날의 트렌드에서도 의의를 찾을 있다고 주장했다.[2] 기존의 회화사에서 나타난 여러 형식적 주제적 실험들이 한데 뒤엉켜 혼종적 양상을 띄는 것이다. 사실주의적으로 정치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미술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추상적 미술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동시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다른 시점에서 그것의 의미를 새로이 읽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2016 필자는 원앤제이갤러리에서 <룰즈>라는 그룹전을 기획했다. 1980~90년대 출생의 세대 작가들 비재현적 경향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회화 작가를 많이 만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제한된 환경 속에서 대중에 공개하고, 이면에 내재된 의미를 찾고 싶었으며, 함께 미래에 관해 토론할 있는 동료를 만나고 싶었다. 전체 전시의 키워드는규칙(Rules)’으로 정했다. 7명의 참여작가는 특정 사회정치적 이슈나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며, 작품 바깥의 삶과의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작품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와 작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파열음 자체에 집중한다. 전시 제목룰즈(rules)’ 참여 작가 모두가 자신이 온전히통치(rules)’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규칙(rules)’ 고수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붙였다. 보통 규칙은 여러 사람이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이자 질서를 의미하지만, 전시에서 지시하는 작가들의규칙 지극히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규칙을 명확하게 남에게 설명하거나 공표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규칙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차이가 있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자못 객관적이고 명확해 보이는 규칙마저 실상은 목적이 지극히 불투명하고 자의적이다.[3]

2017 4, 심혜린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작업 역시 어떤 면에서는 추상적이라고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면 매체를 주로 다뤄왔다. 그의 작품이 가지는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심혜린의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다양한 원색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각각의 형태와 색은 빠르고 생동감 있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공존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소리를 강렬하게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중심과 주변, 앞과 , 안과 밖의 구분 없이 평평하게 균일한 구성을 갖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모습의 부분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인과 관계를 가진 하나의 서사로서의 전체라기보다는 자의적이고 개별적으로 조직된 전체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시간 차를 두고 여러 차례 색과 선을 덧입히는데, 이는 이전과 다음,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조율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계속해서 과거는 깨어지고, 현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직조되며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붓질을 통해 기존의 화면 위에 무언가가 더해지거나 삭제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평형 상태가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겹의 레이어가 쌓인 캔버스는 바니쉬 처리를 통해 다시금 완전한 평평함에 다다르게 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각각의 이미지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동그라미, 타원형, 직사각형, 구름 모양, 원뿔, 화살표, 뼈다귀, 나뭇잎 형태, 외에도 길고 짧은 여러 선들이 등장한다. 몇몇의 작품을 통해 만들어진 같은 형태들은 작가의 손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으로, 구체적으로 특정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해 하나의 상징처럼 읽힌다. 이는 회화라는 심혜린이 만들게 문장 위한 일종의형태소같은 것이다. 심혜린의 기본 도형들은 뜻과 기호 사이에 필연적 연관성이 없는자의성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같은 기본 단위들은 2015 열렸던 행사 <굿->에서 압축 스티로폼을 재료로 작은 오브제로 제작되기도 했다. 작가는 특정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그것들을 나열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됐다고 언급한 있다.[4] 같은 기본 형태소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있다.

<BLURAY>(2016), <Induction>(2016) 같은 작품을 통해서 그의 형태소들은 안정적으로 화면 내에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 사람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은 캔버스에 선과 색이 빼곡히 메워져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안에 풍덩 빠지게끔 한다. 오버 페인팅임에도 불구하고, 액션 페인팅과는 달리 시간 차곡차곡 여러 층을 쌓아 만든 이미지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도 그냥 지나칠 없어, 오랜 시간 관찰하도록 이끈다. <몸을 바꾸는 낮과 >(2013)이나 <끼워진 뼈와 >(2015) 같은 이전 작품에서 외부의 특정 이미지를 레퍼런스 삼아 직접적으로 화면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 BLURAY>(2016) 같은 근작에서 활용하는 형태소들을 특정 이미지를 분해하고 단순화한 기호로 읽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의형태소들이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론적인 부분은 보는 사람 각각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작품을 개인으로 상정한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게 된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무언가를 먹고, 어딘가로 향하며, 누군가를 만나,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런 .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편린들을 조각조각 모아 이어 붙인 형태를 떠올려 본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조각들이 한자리에 모여 누적되면서 사람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은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작품을 하나의 사회로 생각해 본다면, 심혜린의 작품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여러 구성원들의 역할과 일상, 그리고 관계가 뒤얽힌 공동체로 읽히기도 한다. 넘치지도, 남지도 않는 평등한 이상주의적 사회 말이다.

심혜린은 자신이 만든 기본 형태소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평면을 직조해낸다. 구현된 세계는 넘치거나 모자람 없는 이상적인 평등함을 가진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 혼란스러움 속에서 일시적인 평화를 느끼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와 개개인의 앞에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해나갈 힘을 얻는다. 기묘하게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여행자처럼 말이다.



[1] Robert Linsley, Beyond Resemblance: Abstract Art in the Age of Global Conceptualism, London: Reaktion Books Ltd., 2017, p, 9.

[2] Laura Hoptman, 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2014.

[3] 최정윤, <룰즈> 전시 카탈로그, 서울: 원앤제이갤러리, 2016.  

[4] 심혜린 작가와의 인터뷰, 공간사일삼, 2017. 4. 28


* 이 글은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2017.8.16~29) 전시 도록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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