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호 <untitled> oil on canvas 181.8 x 227.3 cm 2015
구멍투성이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
<Cast Away: 백경호 개인전>(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15. 9.1~20) 리뷰
무슨 매체를 활용하든 예술가가 만든 것이면 뭐든지 예슬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미술관에는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영상, 건축, 조각 할 것 없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전시된다. 혹자는 장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는 2015년 현재에도 과거의 참조점들에 대해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며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결코 그린버그식 형식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매체 자체를 하나의 형식적 한계점으로 두고 또 다른 실험을 지속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경호 작가의 회화적 실험은 주목할 만하다. <Cast away>전에 출품한 작품 8점은 1980-90년대에 출생한 젊은 미술가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면 인터넷에서 검색한 이미지, 스마트폰의 배경화면, 동네 풍경, 만화 이미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의 일부가 한 화면에 모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특정 이미지를 크게 확대하기도 하고, 형태를 왜곡하기도 하고, 포토샵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을 켜고 레이어를 중첩시켜놓은 듯 켜켜이 쌓아 올리기도 하는 등 기존 이미지들을 재조합해 화면을 구성했다.
<밍밍하고 심심한 맛>에는 피카소 풍의 인물, 풍경의 일부,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자취생의 방을 연상케 하는 빨래건조대와 늘어진 옷가지들, 낙서된 풍경사진과 냉면 이미지가 공존한다. 이 작품에는 작가가 스테이트먼트에서 언급했듯이 ‘그림 그리다가. 책도 봤다가, 애니메이션을 틀었다가, 동네산책을 하고 잠드는 그의 허름한 일상’의 파편들이 모두 담겨있는 듯 보인다. 네 부분으로 나눠진 화면은 각기 보라색, 초록색으로 구획 지어져 있으며 제각각 부유한다. 이 두 색은 센조가하라 히타기를 중앙에 배치한 <untitled>에서도 등장한다. 아스날 축구팀의 운동선수 모습, 아이폰 배경화면, 지하철 플랫폼 풍경 위에는 보랏빛 머리가 포인트인 센조가하라 히타기가 있고, 또 다시 그 위에는 계란의 단면과 구성한 요소들의 명칭, 지하철역 내부 조감도, 애니메이션 의 스틸컷 이미지 등이 얹혀져있다. <밍밍하고 심심한 맛>에서 각각의 이미지가 브레인스토밍 하듯 따로 분리되어 병치돼 있었다면, <untitled>에서는 이미지 위에 중첩되어 있어 외부에서 접하는 수많은 시각 경험이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누군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듯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beach>에서도 역시 초현실적으로 보이리만큼 이질적인 것들이 한 화면에 담겨여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 엘즈워스 켈리의 하드엣지 페인팅, 비치볼을 든 여성, 나이키 운동화와 해변가 풍경. 이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해변 풍경 위에 다른 이미지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듯 겹쳐져 있어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음직한 이런 이미지는 일견 몽환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작가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익숙한 세대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듯 보인다. 작년에 출간된 책 <단속사회>에서 저자 엄기호는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기술한다. 현실세계에서 교감을 나눌 수 없게 된 각박한 현실 속에서 온라인 세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와 끝없이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적으로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트위터, 페이스복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중계 방송하기도 하고, 취향이 비슷한 집단과 교류한다. 이런 개인의 욕망이 모여 페이스북의 뉴스피드(news feed)가 구성된다.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작동시키면 그 누구라도 세상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뉴스부터 연예인 가십, 드라마/영화/만화 등의 허구의 세계까지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이 뉴스들은 ‘친구’들이 게시한 순서대로 아무 개연성 없이 나열돼 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다니는 것이다. 그는 온라인 공간에서 이처럼 선후관계 없이, 개개인의 주목하는 것을 수시로 업데이트 하는 방식의 정보가 공유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작가 개인이 선택한 이미지 정보를 프레임 안에 배치한다.
그가 선택한 이미지 레퍼런스는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도상들은 시대의 아이콘으로서의 명징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팝아트 작가들이 회화의 소재로 주로 사용한 도상이 코카콜라, 포드 자동차,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 시대를 대표하는 종류의 것들이라면, 그가 선택한 이미지들은 매우 일상적이다 못해 취향 편향적이라 일반적인 관람객이 모두 인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고베여자대학 문화학과 교수를 지낸 문화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그의 저서 <허류지향>에서 요즘 젊은 세대는 정보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회 속에 살면서 모르는 것, 관심 없는 것에 관해서는 ‘건너뛰면서’, ‘구멍투성이’인 세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검색 키워드 하나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찾아보는 일이 손쉬워진 만큼, 매순간 놓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역시 줄어든 셈이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젊은 세대를 ‘성장’이나 ‘성공’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선형적인 타임라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지향했다면, 이제 젊은이들은 완성된 지도 위에서 이곳저곳을 차례로 여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밥 니카스(Bob Nickas)는 그의 저서 <훔치는 것이 미래다(Theft is Vision>(2008)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다고 여겨지는 작금, 작가들은 과거의 형식들을 레퍼런스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재호출하고 변형해 나간다고 말힌다. 이는 미술사에서 나타난 다양한 스타일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재활용함을 뜻한다. 역사적 선형적 흐름, 진보의 개념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새로운 개념인 셈이다. 전시장에서 짧게 나눈 대화에서 백경호 작가는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관심 있는 스타일을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듯 탐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출품작이 이전의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형식적 특성을 가진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떠나는 자전거 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여행이 오래도록 즐겁기를 기대한다.
* 윌링앤딜링 전시 카탈로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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