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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검정으로 그린 ‘회화 같은 회화’ : 배윤환 개인전 <WAS IT A CAT I SAW?>(인사미술공간, 2014.5.9~6.5)

by ㅊㅈㅇ 2015. 12. 15.


배윤환 <Golden Soup> 캔버스 위 오일파스텔과 아크릴 150x210cm  2013  (인사미술공간 1층 설치 전경)


검정으로 그린 ‘회화 같은 회화’ 

<WAS IT A CAT I SAW? : 배윤환 개인전>(인사미술공간 2014.5.9~6.5) 리뷰


속물과 잉여의 시대다. 보통 정의하길, 속물은 “체제 내에 포섭되어 소 비하는 주체”이며, 잉여의 경우 “속물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 이들 가운데 속물되기를 유예하고 있는 존재들”이다.1 사람들에게서 선한 윤리의 경로를 추구할 ‘진정성’은 사라진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2014년,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가 그러하다. 그러한 사회에서 먹고 입고 숨쉬며 자란 젊은 세대는 속물과 잉여, 두 카테고리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자신이 속물임을 인정하는 속물과, 끝까지 아닌 척하는 속 물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술은, 회화는 어떤 모습을 띠게될까. 상품임을 자처하는 회화? 아니면 끝까지 예술성을 추구하는 ‘척 하는’ 회화?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배윤환의 개인전에서는 유사(pseudo)-진정성을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 ‘회화 같은 회화’를 만날 수 있었다. 

전시가 18세기 낭만주의 회화나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판화에서 본 듯한 이미지를 재조합해 만들어 낸 신풍경임은 미술사적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아마존의 밀림, 아치형 다리, 유럽풍의 길거리 풍경, 낡은 벽난로, 나무로 된 장식장, 오리엔탈 특급열차 등 이질적 풍경을 조합해 현실과 비현실을 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 나든다. 명확한 레퍼런스는 밝히지 않았지만, 디즈니 만화든, 헤밍웨이 의 노인과 바다든 분명 어디선가 본듯한 혹은 읽은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신작, 가로 50m, 세로 2.17m의 대형 작품 <WAS IT A CAT I SAW>(2014)가 그렇다. 50m 중 절반은 둘둘 말려있고, 나머지 절반은 공개돼 있어, 궁금증을 유발한다. 진행방향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이 작품은 파편화된 이미지 조각들 을 한데 모은 상상의 패치워크(patchwork)같기도 하고, 혹은 비선형 적 서사 구조를 갖춘 거대한 (비)이야기 같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조차 배윤환의 그림에서는 ‘스타일’이 된다. <Golden Soup>(2013)는 8명의 남자 광부들이 고생해서 캐낸 금을 수프로 만들어 그자리에서 마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느날 꽤 긴 시간의 그리기 노동 끝에 땀범벅, 검정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탄광 에서 일하는 광부를 연상하게 됐다”고 배윤환은 작업의 개요를 밝히기도 했는데, 한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림의 양식을 ‘그림으로’ 소비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은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의 작업은 특정 상황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지하 전시장에 디스플레이 된 10여 장의 드로잉은 상당히 ‘낡아 보이는’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을 달고 있다. 초현실적으로 그려진 주택 사이를 어슬렁대는 고양이를 그린 <악플러들>(2012), 배에 탄 남자가 악어의 입을 막고 있는 <김미영 팀장>(2012) 등. 작품명은 미술 작업의 우화적 속성을 ‘지금, 여기’에 대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한편 그보다 눈에 띠게 드러나는 것은 석판화의 ‘양식’을 차용한 ‘석판화 스타일 드로잉’이다. 배윤환은 석판화를 찬양하면서도, 원래 제작 방식을 따라하기 위한 수고는 들이지 않는다. 대신 수차례 실험을 거쳐, 적정한 묽기의 검정 오일파스텔 로 석판화와 가장 비슷한 느낌의 드로잉을 제작한다. 석판화에 대한 그의 경의의 표시는 <Juggernaut>(2013)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작품 오른편 구석에 작게 쓰인 서명 옆에는 “1/365”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마치 에디션 넘버를 의미하는 것 같은 이 숫자는, 석판화를 모방한, 그러나 실제로는 드로잉으로 구현한 ‘가짜’인 것을 더욱 강조하는 가짜 ‘에디션 넘버링’이다. 작가는 “365일 중에 하루”라는 의미이자, 석판화 요소를 차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배윤환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한 이미지를 무작위로 조합한, 욕망으로 빚어낸 의사-현실계를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진짜 같은 가짜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 ‘회화 같은 회화’다.

* <퍼블릭아트> 2014년 6월호 게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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