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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미셸 푸코, 마네의 회화, 1971

by ㅊㅈㅇ 2016. 10. 13.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미셸 푸코, 마네의 회화, 마리본 세종 엮음, 그린비, 2016.

1. 마네의 회화

미셸 푸코는 1971년 튀니스에서 마네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는 마네가 인상주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인상주의 이후의 20세기 회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미술에서는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을 재현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캔버스 내부의 조명을 재현함으로써 그림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조명이 변화한다는 것을 부정하였으며, 감상자의 이상적 위치를 고정시켰다. 푸코는 마네가 이런 서구의 재현적 회화의 은폐, 착시, 생략의 기법과는 정 반대로 서구 회화의 전통이 숨기려했던 캔버스의 속성, 한계를 전면적으로 드러낸다고 해석한다. 푸코는 강연에서 마네의 그림 총 12점을 크게 세 군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1군의 그림들에서는 마네가 캔버스 공간을 다룬 방식을, 2군에서는 마네가 조명의 문제를 다룬 방식을, 3군에서는 감상자의 자리를 작동시키는 방식을 집중 탐구한다.

a. 캔버스의 공간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에서는 나무로 재현된 거대한 수직선, 인물들의 머리선으로 표현되는 수평축이 그림 안에서 강조된다. 등장인물들의 입체감은 상대적으로 축소됐다.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1873~4)에서도 마찬가지로 입체감이 소거되었으며, 그림의 앞쪽과 뒤쪽의 거리가 짧아 인물들이 돌출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가장 왼쪽의 인물은 한쪽 다리만 캔버스 안에 그려져 있어 그림이 옆까지 걸쳐져서 연장되는 듯한 타피스리(벽지) 효과를 보여준다. <막시밀리앙의 처형>(1868)에서도 수평적인 벽과 수직적인 병사들의 위치가 캔버스 내의 수평, 수직축을 반복, 배가시킨다. 병사들과 희생자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은 걸로 보아 인물의 크기가 비슷해야하는데, 마네는 의도적으로 희생자를 작게 그리는 기법을 사용했고, 우리는 그림 속에서 실제 거리를 지각할 수 없게 됐다. 관객은 그림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 기호에 의해 주어질뿐인 회화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보르도 항구>(1871)에서 볼 수 있는 수평축과 수직축의 반복은 마치 캔버스의 내적인 기하학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마네의 이 그림에서 몬드리안의 <회색 나무>(1911)와 같은 추상화의 탄생 역시 떠올릴 수 있다. <아르장퇴유>(1911)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직축과 수평축을 겹쳐놓아 캔버스 조직의 속성을 재현했다. <온실에서>(1879) 역시 종이벽과 같은 납작한 녹색 식물을 배경으로 최대한 입체감을 배제하고 그린 인물을 통해 공간의 폐쇄성과 수직과 수평의 작용을 강조한다. <비어홀의 여종업원>(1879)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데, 한 명은 옆모습만, 한 명은 모자만 보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사치오의 <세금을 바치는 예수>와 같이 고전적 작품에서는 배경이 있고,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지만, 마네의 경우에는 인물도, 시선도 정확히 묘사되고 있지 않다. <비어홀>은 실제로 <카페-콩세르의 구석>(1878)의 두 번째 버전으로, 마네가 잘라낸 광경 때문에 우리는 작품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그림은 비가시적인 것을 향하는 시선이 된다. <철로>(1872)에서도 배경에 기차가 내뿜는 연기 때문에 관객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고, 캔버스 면을 한정하는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만을 강조한다.

b. 조명

<피리부는 소년>(1866)을 보면, 소년 뒤에는 아무 공간이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어느 곳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미세한 그림자만이 소년이 발을 딛고 있는 공간과 인물을 구별시킨다. 전통적 회화에서는 조명이 항시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떤 조명도 캔버스 위나 아래,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조명은 캔버스 외부에서 오지만 완전히 수직적으로, 정면에서만 온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에서도 조명에 관해서만 살펴본다면, 이 그림에서는 왼쪽 위에서 비치면서 빛의 원천이 되는 전통적 조명이 있고, 또 하나의 조명은 정면에서 수직으로 비치며 여인의 몸을 정면으로 때리고 있다. 앞쪽에서 갑작스럽게 오는 이 조명과 전통적 조명은 하나의 캔버스 안에 병치되어 있고, 이는 그림에 부조화라는 성격과 내적 이질성을 부여한다. <올랭피아>(1863)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테마를 변조한 것이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는 몸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빛이 왼쪽 위에서 드리워지지만, <올랭피아>의 경우에는 캔버스 앞쪽, 감상자가 위치하는 곳에서 오는 강렬한 빛이 있다. <올랭피아>에서는 그림을 바라보는 일과 그림에 빛을 비추는 일이 동일한 것이 된다. <발코니>(1868)에 나타나는 녹색의 문은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캔버스의 사각형을 재생하고 배가시킨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창문 안쪽을 거의 볼 수 없는데, 그것은 빛이 그림 밖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빛은 그림 앞쪽에 있고, 모든 어두운 부분은 그림 뒤쪽에 있는 그림이다. 관객은 장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몸짓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고 오직 시선들만을 볼 수 있다.

c. 감상자의 자리

<폴리-베르제르의 바>(1881) 뒤에는 거울이 있는데, 이는 앵그르의 <오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에서처럼 매우 고전적으로 사용되어오던 장치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은 관습과는 다르다. 먼저 거울이 그림 뒷부분 전체를 점유하고 있어 공간을 폐쇄한다. 또한 정면 조명이 사용됐는데, 동시에 거울에는 두 개의 조명이 비추어져 있어 두 개의 빛을 중첩시켜 놓았다. 거울이 있다면 앞과 뒤에 동일한 요소가 나타나야 하는데, 마네의 그림에서는 그렇지 않다. 거울에 비친 여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관객 역시 오른쪽으로 이동해야한다.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그녀 정면에 서있어야 한다. 화가는 동시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자리에 서 있고, 관객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도록 요구된다. 또한 오른쪽 상단 끝에 거울에 비친 남성이 있기 위해서는 여인 앞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정면 조명이 있기 위해서는 또 아무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이 그림에는 세 가지 양립 불가능성의 체계가 존재한다. 첫째, 화가는 중앙에 위치하고 또 오른쪽에 위치해야 한다. 둘째, 여인 앞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또 없어야 한다. 셋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한다. 삼중의 불가능성이 바로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근본적 속성이자 매력이다. 마네에게 모든 것은 재현이었지만, 재현 내에서 캔버스의 물질적 요소를 작동시켰기에 오브제로서의 그림과 오브제로서의 회화를 발명한 것이고, 또 그것은 언젠가 우리가 재현 자체를 버리고 공간의 순수하고 단순한 속성과 공간이 작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근본 조건이다.

푸코는 마네를 처음으로 그림 안에서, 그림이 재현하는바 내에서 화가가 그리는 공간의 물질적 속성들을 과감히 허용하고 작동시킨 화가로 소개한다. 푸코에 따르면 15세기 이후 서구 회화에서는 회화가 어떤 공간의 단편에 놓이거나 새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은폐하며 교묘히 피해나가려는 전통이 있었다. 회화가 이차원의 표면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시키고 물질적인 공간을 재현된 공간으로 대체해 왔다. 15세기 이래로 회화는 이차원의 표면에 기초하면서도 삼차원을 재현하려 해왔다. 푸코에 의하면 이러한 회화의 시도는 세 가지 사실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첫째, 회화는 사선이나 나선을 특권화 함으로써 직선에 의해 구획된 공간 내부에 각인돼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둘째, 회화는 그림 내부에 다양한 조명 효과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이 놓인 위치나 빛의 방향에 따라 변화하는 실제 조명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셋째, 감상자에게 이상적인 자리를 설정함으로써 그림은 감상자가 앞에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푸코는 서구 회화의 전통을 이렇게 개괄한 후 마네의 혁신성을 그림에 재현된 것의 내부에 캔버스의 물질성 자체를 출현시킨 점에서 발견한다. 마네는 이 물질성을 재현 내에 재도입함으로써 오브제로서의 그림혹은 물질성으로서의 그림을 발명한 것이다. 푸코는 캔버스의 물질성을 안정된 재현 공간과 관련한 이른바 외부로 규정한 후에, ‘의 요소를 재현 내부에 출현시킨 점이 마네의 혁신성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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