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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5. 인터뷰

[인터뷰] 평등하고 자율적인 '상태'의 구현: 작가 조재영 인터뷰

by ㅊㅈㅇ 2017. 2. 8.

두산갤러리 설치 전경. 사진: 권현정

평등하고 자율적인 상태의 구현

: 작가 조재영 인터뷰 

 

2011년부터 <몬스터>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자 했는지 알려 달라.

구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상상한 어떤 상황을 또 다른 형태로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 말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materialization, realization 이다.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어떤 대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게 아마 조각이나 설치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일 테다. 나의 경우는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을 우위에 둔다. 기존 조각이 갖는 영원성, 절대성, 권위, 원본성 등의 개념에 저항하는 어떤 것을 만들고 싶었다.

<몬스터> 시리즈도 원본성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사람들은 사물 혹은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지한다. 그리고 그 각각은 힘을 가진다. 나는 사물을 개별대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상황(situation)’으로 보고자 했다. 하나의 상황을 껍데기를 만들 듯이 포장했다. 하나의 사물과 그 옆의 다른 사물을 연결시키는 구조로, 개별성을 없앴다. 상태 혹은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상황이 된다. 종이라는 재료는 껍데기를 만드는데 매우 적합한 재료였다. 여러 사물을 연결하는 선을 그리고, 정교하고 천천히 상황을 캡쳐해냈다. 특정 상태의 커버를 만든 뒤에, 일정 시간이 지나고 그것의 일부를 잘라내고 마치 세포 분열하듯이 새로운 부분을 만들어 덧붙이는 방식으로 계속 변화시켰다. 그러니까 한 작품 안에도 여러 해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셈이다.

 

여러 색의 시트지로 마감했다. 기하학적 형태 위에 얹은 색에도 의미가 있는가?

나에게 있어 컬러는 구별의 의미이다. 회화를 다루는 작가의 경우에는 컬러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나는 아니다. 단순하게 구별하는 요소로 쓴다. 처음에 한 상황의 껍데기를 만들고 나면, 그것 전체를 한 가지 색 시트지로 마감한다. 추후에 일부를 잘라내고 덧붙이면 그 부분에는 다른 색을 씌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색이 일종의 연도를 구별하는 요소로 사용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좀 더 적극적 의미에서 시각적 효과를 위해 색을 쓰기도 했다.

기하학적 형태로 최종 작업이 나온다는 것은 대상을 숫자로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서 언어는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언어가 인식의 구조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면 언어 자체가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예쁘다’ ‘못생겼다와 같은 동사에는 그 자체로 가치판단의 성격이 들어있다. 대신 이 사이의 간격은 1cm’이고 각도는 30라는 문구에는 차이를 명시할 뿐 차별의 성격은 없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언어체계를 기반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서서 대상을 인지하는 훈련을 받은 적은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지점은 바로 그런 지점이다.

 

제작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듯하다.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궁금하다.

실제로 꽃병, , 컴퓨터 등 다양한 사물을 놓고, 그것을 선으로 이을 수 있도록 측정하고 작품을 제작한다. 실제 대상이 존재는 하지만 그것들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형체는 일부 변형되기도 한다. 종이는 이 같은 개념을 가장 손쉽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다. 하지만 습도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으스러지기 일쑤이다. 칼로 자를 때에도 조금만 더 잘라도 끊어져서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고, 다 손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카드보드지 중에서도 두꺼운 편에 속하는 재료를 쓰는데 정확하게 길이를 재고 재단을 해도 오차가 종종 생겨 여러 차례 재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본드로 접합하고, 2-3회 바니쉬로 코팅하면 몇 주,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하나의 껍데기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는 수행적 의미가 크다. 내가 나 스스로를 하나의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식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찰대상을 정하는 것인데, 내 작품에서 그 대상은 나이다. 인식 자체가 생명체, 인간이 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의 인식 과정은 유추 가능하지만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실험대상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 작업에서는 관찰하는 나와, 관찰 당하는 내가 동시에 등장하게 된다.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작품을 종이로 만들어 작품이 매우 가볍고, 좌대에는 바퀴를 달아 이동이 용이하도록 했다. 좌대의 의미를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작품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권위 체제를 역전시키려는 것인가?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혼자서 들기에 충분히 가볍다. , , 면으로 이뤄져 있어 손쉽게 잘라내고 새로운 부분을 덧붙이기도 쉽다. -, -아래, 중심-주변이 없는 평등한 오브제이다. 기계적일 정도로 차가운 중립성을 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다. 좌대의 경우, 상황의 껍데기로 만들어진 오브제를 두기 위해 만들었다. 특정 형태를 위해 만든 것이다 보니, 그 상태가 사라지면 좌대도 무용지물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과 좌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섞은 구조를 만들어 보았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대는 더 중요한 작품을 올려놓는 부수적인 요소였다. 그 자체로 위계를 만드는 구조이다. 그래서 <Alices’s Room>(2017)에서는 좌대와 작품의 위치를 뒤집어 놓고, 그 둘을 하나의 상태로 포장하는 방식의 오브제를 만들었다.

 

금호미술관에서 선보인 <Anachrony>(2016)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는 열린 구조의 공간이고, <Through another way>(2014)는 공간의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떠낸 작품이다. 공간의 건축적 요소에 관심을 가진 것인가?

백화점에 가보면, 그곳을 만든 사람의 이익에 맞춰 사람들의 동선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철에서도 우측통행을 하라는 표시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규칙이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서 통제, 조종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Through another way>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당시 나는 오피스텔에서 살게 되었는데, 모든 방 구조가 정확히 똑같았다. 규격화된 공간 속에 한 개인이 들어가 살아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갑갑함을 느꼈다. 편리성, 합리성을 위해 살고 있지만, 공간이 주는 느낌이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공간을 자유롭게 변형시키고 싶었다. 원형의 커다란 기둥이 정 가운데 놓여있는 건물 로비를 지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기둥을 피해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았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둥의 위치를 관통해서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보았다. 공간이나 건축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사회 혹은 집단이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Alice’s room><Moster><Through another way> 작품에서 다룬 개념이 결합되어 발전된 형태로 읽힌다.

그렇다. 1차적으로는 껍데기라는 점에서 맥락이 이어진다. <Monster>는 대상이 특정 사물들이었다면 <Through another way><Alice’s room>은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느낀 점은 사물들을 계속 연결하다보니 그것이 계속 증식하고, 어느 순간 공간의 개념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공간의 건축적 요소 일부의 커버를 만들지만, 물리적 한계 때문에 공간 전체를 그대로 다룰 수는 없다. 그래서 신체 스케일을 기준으로 그것보다 조금 큰 형태로 전시장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공간이 사물화되고, ‘사물이 공간화되는 과정을 거쳐 평균치의 스케일이 만들어지게 됐다.

<Alice’s room>은 현재 머무르고 있는 금천예술공장의 계단, 환풍기 등 공간의 일부를 가져와 조합한 것이다. 현실 공간이나 사물의 커버로 3의 공간을 만들어본 것이다. 중간 중간에는 각기 다른 오브제를 연결하기 위해 임의로 직육면체의 형태를 집어넣었다. 어디엔가 존재하는 요소들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각각의 의미를 모두 비워내고, 차갑게 남은 구조만이 전시장에 옮겨진다. 비워내기를 시도하다보면 결국은 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Alice’s room>의 일부는 책꽂이 같기도 하고, 책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사물을 말할 때, 아직 명명되지 않은, ‘3의 사물을 만들어내고 싶다. 책꽂이 혹은 책상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런 기능에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책상 같지만 의자일 수도 있고 그 어떤 것도 아닌 상태를 만들고 싶었달까. 필요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만, 만약 내가 이름을 짓는다면 숫자로 붙이고 싶다. 의자 혹은 책상의 원래 기능, 색깔을 덜어내고 하나의 구조가 있는 덩어리로 치환시키면서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를 매우 불안해하고 또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작품을 통해 지향하는 상태는 그런 것이다. 비어있는 상태, 무의미한 상태, 아무것도 아닌 보류의 상태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름, 언어, 색깔을 입혀나가고 그런 인식 체계에 길들여져 있다. 인간은 결국 언어와 이름 속에 살다 죽는다. 나는 그것을 계속적으로 비워내려고 시도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좋아한다.

 

작품이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다루다보니,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 다른 작가의 작품이 겹쳐 보인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in between)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작품의 부분이 비워진 형태를 갖추고 있어 공간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공간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구조(structure)이다. 구조 개념을 부각하기 위해서 나무로 만든 오브제 위에 흰 페인트로 도색했다. 마치 하나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개의 레고 블록을 끼워 넣은 것처럼 각각이 분리된 덩어리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한 덩어리의 벽이 아니라 큰 구조 속에 개별 유닛이 있다는 느낌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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