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5. 인터뷰

[인터뷰] WEEKEND_전현선 작가와의 대화

by ㅊㅈㅇ 2017. 9. 23.

전현선 ⟨모든 것과 아무것도-쓰러진 흰 나무와 숲⟩ 캔버스에 수채 100×300cm 2017 (사진: 윤병주) 


일시: 2017. 9. 21. 14:00-16:00

장소: Weekend 위켄드

인터뷰어: Weekend 최정윤, 이나정


전현선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는 작가다. 동화책에서 텍스트와 함께 제시됐던 삽화에서 영감을 받아, 초기에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끊으며,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역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에는 뿔이나 숲과 같이 단순하게 도식화된 형상을 활용해 그가 상상하는 장면을 자유롭게 표현해 왔다.

이번 전시 《모든 것과 아무것도》에서는 회화 작업 총 10여 점을 선보인다. 1층의 전시장에서는 세 폭의 긴 화면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나가며 파편화된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는 풍경을 제시한다. 2층 사무실에는 작은 크기의 작품을 여러 벽면에 설치하여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을 분절하여 나열한다. 작가는 지난 8여 년의 시간 동안 수채 물감을 주재료로 활용하여 얇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W: 이번 전시의 제목은 《모든 것과 아무것도》다. 전시 타이틀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반대되는 뜻을 가진 두 낱말을 나열했다. 연인도 사랑할 때에는 내 모든 것 같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영어 제목은 Forests and swamps》이다. 직역하면 《숲과 늪》이다.

H: 이번 전시의 제목에는 최근에 작업할 때 갖는 태도와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만날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정반대의 것들이 알고 보면 굉장히 가까이에 맞닿아있음을 느낀다. 그림을 그릴 때 한없이 분명하고 확신에 차다가도, 잠깐 뒤돌면 사라지고 기억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꿈속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회화 역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인 힘을 주다가, 이것이 단지 이미지이기 때문에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공존한다. 그래서 오히려 그림을 차분하게 쌓아가고 싶었다.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라 작은 부분들을 안정된 톤으로 쌓아 일관된 어조를 유지하며 그리려고 한다. 일상 속에서도 기쁜 감정과 슬픈 감정이 빠르게 교차하듯이 공존할 때가 있고,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던 어떤 것이 별 의미 없이 분해되기도 한다. 이런 최근의 경험들을 전시와 전시 제목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영어 제목은 국문 제목의 부제처럼 생각했다. 꼭 직역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W: 작업에서 초록빛의 색감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각양각색의 나무로 가득한 숲의 형상이다. 인물이 주도적으로 많이 등장했던 이전 작업에 반해 이번 작업에는 인물 모티프가 거의 모두 제거됐다. 내러티브 보다도 풍경 그 자체에 집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H: 작업을 할 때 항상 이전 작업과의 관계 속에서 다음으로 나가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이전 작업에 있었던 어떤 특징을 다음 작업에서 부각한다든지, 정반대의 지점으로 이끌고 나가던지, 특정 부분을 제외하고 그린다든지 하는 방식이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나에게 중요했던 부분을 빼려고 했다. 원래 인물이 만들어내는 서사적인 장면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중요해져서 오히려 극단적으로 인물을 빼고 풍경 적인 회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것들이 사라진 빈자리를 무엇이 채우고 대체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했다. 그리고 주로 세로로 된 화면을 선호했었는데, 9미터의 가로로 긴 화면을 나에게 주어준 것도 같은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아주 예전에 숲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그리던 시기가 있어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었는데, 전혀 다른 숲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W: 캔버스에 수채 물감이라는 재료가 특이하다. 지금까지도 이 재료를 고수하고 있는데 재료적 특성에 관해 좀 더 말해달라. 미디움을 섞어서 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유화나 아크릴보다 더 얇고 투명한, 평평한 느낌인가? 다른 재료로 활용해볼 생각이 있는가?

H: 캔버스에 수채로 하는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정도 된 것 같다. 계속 이러한 재료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는, 또 최선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이 재료를 가지고 그려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면서 진행해나갈 생각인데, 동일한 재료 안에서 층위와 표현 범위를 넓히고 싶다. 더욱 얇게 혹은 더욱 두텁게 라던지, 더욱 유동성 있게 혹은 더욱 견고하게. 이런 식으로 시도해보려고 한다.

수채로 작업을 하면 밑에 칠해진 붓 자국과 색이 완전히 덮이는 경우가 없다. 그리기 시작한 처음 붓질부터 완성할 때까지의 내 속도나 망설임들이 스며들면서도 드러나게 되는 표면에 만족감을 느낀다.

전현선 ⟨서툰 관찰자의 기록⟩ 캔버스에 수채 162.2×372.7cm 2015 

W: ⟨모든 것과 아무것도⟩는 세 폭으로 이뤄진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가? 위켄드 공간을 보고 떠올린, 새롭게 시도해보는 구성으로 알고 있다. 작품이 설치되었을 때 어떤 효과를 기대했는가?

H: 항상 삼면화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삼면화의 전통적인 형식을 빌려온 것은 아니다. 전시장에 작품을 보러 들어갔을 때 보는 사람을 둘러싸고 양옆으로 길게 놓인 장면을 상상했다. 한 곳에 서서 바라본 파노라마적인 풍경이기도 한 동시에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연속된 장면이기도 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작품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된 하나의 풍경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씩 작업할 때 온전히 그 작업에만 집중하면서도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며 진행했다.

 

전현선 ⟨사물과 기록과 뿔⟩ 캔버스에 수채 194×150cm 2016 

전현선 <잊기 위한 기록들>  캔버스에 수채 100×100cm 2017


W: 이번 출품작 ⟨모든 것과 아무것도⟩에 보면 2층에 전시한 작은 작품들과 같은 요소들이 큰 화면 곳곳에 배치된 것도 볼 수 있다. 마치 큰 벽에 포스트잇을 붙인 듯이, 떠오른 여러 모티브를 화면 안에 따로 분절된 면 위에 위치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플랫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2016년 작 ⟨사물과 기록과 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면 내의 면 분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듯 보인다.

H: 2층에 전시한 작은 작품들은 큰 작업들을 모두 끝낸 후에 그렸다. 그동안 그렸던 큰 작업들을 돌아보면서 작업 과정 중에 느꼈던 순차적인 확장이나 계속 존재했던 중심점들을 상기시키며 하나씩 담아보았다. 나란히 전시한 다섯 개의 작품들은 크기도 점차 커지고 그림 속에 그려진 이미지들도 점차적으로 레이어를 축적하면서 진행한 작업들이다. 나는 조각들, 부분들을 모아서 전체 화면을 만들어나가는데, 이러한 작업 방식을 더욱 도드라지게 제시하기 위해서 메모지, 색면, 장면의 일부분, 도형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레이어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관계 속에서 캔버스에서 어떤 질서를 형성했으면 한다.

W: 초기에는 (2010~2013) 동화의 삽화에서 활용되는 문법을 이용해 그림을 구성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연극적 순간을 화면에서 다루기도 했다. 할머니, 늑대, 여우 등.. 특정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작품도 있다. 초기 작업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달라.

H: 이미지를 마주할 때 어떤 판단 기준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했었다. 그 기원이 어디에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다가 유년기에 보았던 동화책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언어보다 이미지를 먼저 받아들이고 읽었을 것이다. 순수한 상태에서 받아들인 이미지들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고전적인 동화책의 삽화를 재구성하며 그 속에 당시 내가 마주한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개입하는 작업을 했다.

 

전현선 ⟨뿔과 대화들⟩ 캔버스에 수채 145.5×112.1cm 2014

노은주 전현선 ⟨하나의 기록들⟩ 캔버스에 아크릴 390.9x193.9cm 2016


W: 플레이스막에서 열었던 《뿔의 대화들》(2015), 인사미술공간에서 기획과 전시에 참여한 《뿔의 자리》(2016)에서는 반복적으로 ‘뿔’이라는 모티프를 활용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뿔을 그렸던 것인지 궁금하다. 뿔에 처음 매료된 특정한 계기가 있었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작가가 뿔을 대하는 태도나 의미가 예전과 달라진 지점이 있는가?

H: 처음 뿔을 ‘뿔’이라고 부르며 그림 속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이유는, 화면 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부분과 대조를 이루는 이질적인 소재가 필요해서였다. 이전에 그린 그림들 안에서도 계속 뿔은 존재해왔다. 산, 새의 부리, 텐트 등 조형적으로 삼각형의 형태를 내가 선호해왔었던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사물의 형태를 입고 있었던 원뿔을 ‘뿔’이라고 명명하면서부터 뿔은 나의 작업의 중심이 되었다. 내용적으로는 우연히 선택되었지만, 조형적으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작업을 연속적으로 해나가는 편인데, 작업들이 스스로 어떤 ‘시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한다. 같은 뿔의 형태를 그리더라도 그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역할이 되어버린다. 뿔과 이름 없는 산, 그리고 숲 자체는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시기에 따라 그것이 차지하는 무게감이나 힘이 달라지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각각 다르게 부르기로 했다. 통틀어 ‘뿔’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림을 굴러가게 하는 중심축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동시에 어떤 것들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뿔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작업을 하는 중에 계속 발휘되는 힘 같은 것이다.

W: 《뿔의 자리(2016)에서는 다른 참여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작품 제작을 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작품이 어떤 종류의 제약이 되는 조건들을 만들어 제시했다고 알고 있다. 매번 혼자 작업하는 회화 작가에게 공동 작업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는가?   

H: 공동의 작업물, 공동의 소유라는 것이 흥미롭고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의 기록들⟩은 세 개의 피스로 되어있는데, 지금은 내가 한 피스, 노은주 작가가 두 피스를 보관하고 있다. 좀 더 나은 보관장소가 나타나면 그곳에 보관하게 될 것 같다.

페인팅 협업 작업은 두 사람에게 모두 낯설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페인팅이 공동의 영역이 되는 경험을 겪고 나서 다시 나의 작업으로 돌아왔을 때 조금은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것 같다. 내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살리기 위해 내가 그동안 했던 그림들을 계속 바라보고 따라 그려보기도 하면서 내 것을 되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그리기에 대한 회의감과 답답함이 느껴질 때 또 다른 방식으로 협업을 시도해본다면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가능성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W: 이전 작업들에서는 여성이나 어른이 아닌 어린 소년의 이미지 역시 자주 등장한다. 구체적인 누군가를 지시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사람을 드러내는 기호 같다.

인물을 그릴 때 너무 몰입되지 않는 인물을 선택한다. 자화상으로 유추되고 싶지 않아서 남자이면서 소년인 인물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야 화면 안에서 나와 거리감이 있는 등장인물의 역할을 맡게 된다. 어떤 상황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릴 수 있는 인물 캐릭터는 셀 수 없이 다양하겠지만, 나는 나로부터 멀리 있는 인물을 선택한다. 내가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표정이나 포즈를 요구해서 찍은 사진을 참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키워드로 찾은 기록 사진 속 무명의 인물 사진을 참고하여 그린다.

초기 작업에서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많이 꺼내오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인물이다. 부여된 역할만을 수행하는. 오래된 사진 속 소년이었을 때의 외삼촌을 ‘피터’라고 부르며 주인공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외삼촌의 유년기나 삶과는 상관없이, 한 장의 사진 속 단편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데리고 왔다.

W: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다. 특정 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업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지금 읽고 있는 것 하나만 소개해달라.

H: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한 권을 읽으면 꽤 오랫동안 그 여운과 영향 아래에서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지금 기억나는 소설은 카프카의 ⟨성⟩이다. 주인공은 어떤 임무를 가지고 성 주변으로 형성된 동네에 가는데, 정작 성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성의 주변에서 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성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내가 다가가고자 하지만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주변에만 머무르고 서성거리게 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W: 작업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 혹은 메시지가 만약 있다면 무엇인가? 혹은 작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탐구하는 주제를 언어로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다면 부탁한다.

H: 나는 항상 이미지와 텍스트/서사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중세 서양에서는 글을 못 읽는 사람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제시했다. 성경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리는 사람의 상상에 따라 이미지가 모두 다르게 표현된다. 이런 이미지의 자유로움과 오해에 관심을 가졌다. 

예전부터 어떤 장면적인 것, 이야기적인 것들을 한 화면에 그릴 때 구체적인 상황을 먼저 상상하는데 정작 그림을 그릴 때는 그것을 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삽화는 이야기의 내용과 굉장히 밀접해서, 삽화 이미지를 보면 볼수록 텍스트로 향한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텍스트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흐트러뜨리고 파편적으로 끊어 놓으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화면을 볼 때 시선이 몰입되기보다 튕겨 나오며 방황하기를 바란다.

회화는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로 완벽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그림을 볼 때, 가능성이 열려있는 자유로움과 풍부함을 느꼈으면 한다. “말이 필요 없는 미술”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는 지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작업과 전시를 볼 때도 그 사람이 제시하려고 했던 것 이상의 것이 전달되면 말이 필요 없어지고 즐겁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