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랙 오웬스, 「알레고리적 충동: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향하여」
Craig Owens, “The Allegorical Impulse: Toward a Theory of Postmodernism”
이 글은 1980년 옥토버(October)지의 봄호에 게재된 논문으로, 알레고리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설명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한다. 오웬스는 ‘알레고리’를 하나의 기법, 태도, 과정, 지각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보고, 현대미술에서 보이는 다양한 알레고리적 충동을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가진 파편적이고 해체적인 특성을 알레고리적 특성으로 해석한다.
알레고리(allegory)는 그리스어 ‘다른(allos)’과 ‘말하기(agoreuo)’가 합성된 ‘알레고리아(allegoria)’의 영어식 표현이다. 알레고리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사법의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다른 것으로 말하기’라는 용어가 함축하듯, 알레고리는 두 겹의 의미 층을 가진다. 표면적으로는 인물, 행위, 배경등의 형상화를 통해 일차적 의미를 만들고, 그 내면에는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개념과 같은 이차적 의미를 배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레고리적 작품에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내용보다도, 그것이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에 접근하는 것이 핵심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신고전주의 미술가는 알레고리를 혁명의 정당성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다. 고대의 덕목들이 정치적 선전 문구로 전락하자 알레고리의 권위는 실추됐고, 19세기에 괴테(Goethe)는 미술에서 나타난 알레고리의 도식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이후 그린버그가 말하는 모더니즘 미학의 등장은 미술에서 사용됐던 알레고리적 방식의 퇴보를 가져왔다. 작품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내포하고 작품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표방하는 모더니즘 미술에서 외적 요소를 통해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 알레고리적 시각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미술의 분리를 주장한 그린버그식 시각예술은 알레고리의 '읽기'적 속성을 배격해 왔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있어서 읽기가 새롭게 부각되고 '담론(discourse)'의 형식으로 이행함에 따라 알레고리는 시각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미술을 형식적인 요소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등의 맥락을 포함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오웬스는 알레고리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흐르는 일관된 충동을 설명하는 원리로 사용한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겹쳐지는 과정에서 이미지 그대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를 통해서만 의미가 발생한다. 그 때문에 작품 내에 본래적 의미를 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교체된다. 작가가 마련한 알레고리적인 장치는 작품 안에 있지만, 이것은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다의적 의미의 층을 가진다. 고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적 이미지는 여러 해석을 통해 해독해야 할 문자로 제시되고, 이에 따라 알레고리는 본질적으로 '읽기'의 속성을 갖는다.
오웬스는 텍스트의 병치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알레고리의 속성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나타나는 차용의 원리, 장소특정성, 전치(displacement)의 특성에 적용시킨다.
알레고리와 현대미술 사이의 최초의 연계는 이미지의 차용 현상을 근거로 한다. 차용이란 빌려온다는 의미로, 미술사 혹은 대중매체에서 등장한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와 결합하거나 기존 이미지에 작가가 부여하는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본 이미지가 갖는 기존의 의미와 그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생기는 새로운 의미가 중첩되면서 제3의 의미가 생성되는데, 이를 알레고리적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원본 이미지의 여운은 사라지고, 작품에서 알레고리는 하나의 보충물이자 덧붙여진 표현이다.
차용 현상을 활용한 작가로는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이 있다. 레빈은 이미 유명해진 미술가의 사진작품을 재촬영하는 리포토그래피로 차용의 전략을 구사한다. <무제(에드워드 웨스턴을 따라서)>는 레빈이 남성 사진가 웨스턴의 작품을 다시 찍은 작품이다. 웨스턴은 그리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작품에서 조각의 자세를 훔쳐, 자신의 어린 아들 닐을 찍은 사진이었고, 이것을 레빈은 다시 찍어 복제품을 만들었다. 이미 존재하는 복제품을 복제한다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레빈은 독창성 가치 소유에 대한 가정들을 약화시킨다. 레빈은 작품 표면에 끊임없이 겹쳐지고 뒤섞이는 텍스트의 짜임을 형성하여 그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유동적이고 미완의 것으로 남도록 한다. 오웬스는 이러한 점에서 레빈의 작품을 거듭 수정한 양피지와 같은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진 작업에서 차용의 방법을 통해 알레고리적 특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작가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있다. 셔먼은 <무제 필름 스틸> 연습에서 미디어에 투사되는 틀에 박힌 여성의 전형들(직장 여성, 천진한 소녀, 성적 노리개 등)을 상기시키는 포즈와 무대장치를 갖추고 자신을 촬영한다. 이 작업은 대중매체에 투사된 여성 이미지가 보여주는 순진무구함을 해체하고 있다. 셔먼의 이미지는 ‘흉내내기(mimicry)’를 비난하고 있으면서도 셔먼 역시 흉내내기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 바로 비판된 그 행위를 불가피하게 하게 되는 것이다. ‘흉내내기의 흉내내기’인 셔먼의 작업은 ‘수사의 수사’인 알레고리의 정의에 상응한다. 이러한 해체적 충동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일반의 특징이며 모더니즘의 자기 비평적 성향과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연계성은 장소 특수성(site-specificity)에서 분명해진다. 장소 특정적 작품의 한 예인 대지미술은 그것이 위치되어 있는 장소를 강조함으로써 작품을 장소의 맥락과 결부시킨다. 자연과 인위적 산물인 작품의 병치를 통해 알레고리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 예로,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은 작품과 그것이 놓인 장소의 지형적 특수성과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심리적 효과를 함께 고려하여 장소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소용돌이 모양의 방파제(Spiral Jetty)>는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의 밑바닥이 소용돌이친다는 지역신화에서 형태를 착안해 냈다. 이 작품은 인위적으로 철거되지 않고 자연에 내맡겨져 부식되고 특정 장소에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스미드슨은 작품에 침식해 들어가 궁금적으로 작품을 부식시키는 힘을 작품의 일부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현상의 덧없음과 일시성을 상징하며, 20세기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비영속적 특성 때문에 대지미술 작품은 대부분 사진으로 보존되고, 알레고리적 미술로서의 사진은 안정되고 고정된 이미지 속에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고착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세 번째 적용은 전치(displacement)의 전략에서 드러난다. 사진 이미지는 사물의 한 부분을 제시하는 현실의 파편이며, 이는 전체로서의 사물이 지니는 총체성이 파괴된 상태이다. 사진 조각을 끌어 모아 놓은 포토몽타주는 파편의 병치를 통해 알레고리적 의미를 생성한다. 그 예로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라우센버그는 <알레고리>(1959-1960)라는 제목의 콤바인 페인팅에서 무작위로 수집한, 일상생활에서 버려진 듯한 현대사회의 이미지들로 평면을 채운다. 철판, 천, 글자 도안 등 표면 위의 오브제들이 가진 일관된 속성을 발견해내고 배열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레오 스타인버그는 라우센버그의 컴바인 페인팅에서 보이는 오브제가 제시한 유일한 은유는 ‘쓰레기장, 저장소, 교환소’라 언급했다. 현대소비사회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모아놓은 그의 작품이 미술관에 놓이게 된다면 매우 모순적 상황에 놓이게 것이다. 그것을 통해 미술관이 스스로 자신이 ‘쓰레기 처리장’으로서의 미술관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에서 이것은 작품 스스로를 비난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인데, 미술관이 주장하는 지적 해독가능성의 근거인 통일성을 표방하는 미술관을 해체하기 위해 작품 자체도 쓰레기 처리장의 일부임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전략적 동기에 의해 자신의 해체 담론이 오직 미술관 안에서만 작동하게 된다.
작품 자체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형식에 치우친 모더니즘 미술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작품과 작품 외적 요소의 관계에 주목한다. 알레고리적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작품이 사회적 맥락을 둘러싼 기호가 소통하고 있는 장소임을 인식해야 한다. 알레고리적 작품이 제시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관객이 규정하는 맥락에 따라 변동 가능한 불완전한 기호로 존재한다.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인 속성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알레고리적 속성은 의미 해석이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 알레고리적 작품은 고정된 의미의 틀을 벗어나 역으로 작품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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