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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심상용 <비엔날레, 미술의 관료화 또는 관료주의 미술의 온상> 1999 요약 발췌

by ㅊㅈㅇ 2018. 10. 2.

1999년부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그런데 아직도 비엔날레는 건재할 뿐만 아니라 점점 커져만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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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는 이전에 작은 것들에 할애되었던 비용, 관심, 관객을 한 곳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중 소규모의 전시를 시야에서 멀어지게 하고 소외시키며 생존 경쟁에서 밀어낸다. 글로벌 경제 하의 다른 영역들에서처럼 몇 안되는 거대한 것들만이 생존에 유리한 환경으로 재편한다. 이 새로운 문화지형학에서 미술 소통은 전례없는 비용이 들고, 에너지를 소모한다. 비엔날레는 이제 국가가 주도하는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남, 상호교류, 교감, 세계성, 독자성, 근원적 동질성, 범세계적 인류애, 생태적 문화회복... 

오늘날 세계의 비엔날레들이 사용하는 용어 사이의 공통점은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공통점은 그것들의 출처가 결코 예술의 장이 아니라는 점, 트로이의 목마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것들로, 미술 요새의 자율성을 잠식해나가는 용어들이라는 점이다. 

대형화, 이벤트성, 제도 권력화, 비엔날레 형 작가와 작품의 양산...

비엔날레의 개최에서 요구되는 전문성이란? 

세계 예술에 대한 정보나 경향에 대한 민감함, 세계 전문가들과의 교류, 이름난 작가를 동원해 주최측에 보람을 안겨줄 능력 등. 복잡해진 조직과 기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행정력과 후원을 따는 데 필수적인 사회성, 예산의 정확한 실행과 관객 수를 관리하는 관료적 전문성 등. "목표를 상실한 효율성"의 지식이다. 이런 종류의 전문성은 자율적 전문성이 아닌, 관계적 전문성이다. 창조와 관련된 지식이 아닌, 조직하고 동원하며 회유하는 기술과 새롭게 보이게 하는 연출 기술로 구성된 방법적 차원의 전문성이다. 

문제는 모두가 계약직으로 물러난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계약직은 그때그때의 현안 외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문제는 계약이 끝나면 그만이고, 사후의 문제는 알 바 아닌 것이다. 모두가 관계되고 모두가 영향받는 궁극적인 행위의 방향은 점점 더 비인격적 기구의 수중에 맡겨진다. 이 안에서 각 주체들은 허약하고 무기력하다. 

한국미술은 2년 주기의 파도타기 양상을 보인다. 저널은 많이 듣던 이름들의 홍수를 만나 부산하고, 학회는 심포지엄을 열고, 대학도 단체관람에 합류한다. 개최 도시의 공무원들은 부대 행사로 날 새는 줄 모른다. 파도타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파도를 타거나, 다음 파도를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 파도만이 중요한 게임에서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파도는 재정의 파도이고, 인력과 분위기의 파도이다. 그 귀결은 무엇일까? 과도한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 집적과 그 이후에 찾아오는 공황 상태 사이의 극적인 불균형이다. 타성에 젖게하는 주기성과 낭비, 극빈의 불균형이 소수의 승리주의와 대다수의 방관주의, 냉소주의, 도피주의, 허무주의를 양산한다. 만성화된 주기성은 모든 것을 폐기해버린다. 이 리듬은 미술로 하여금 2년마다 새로운 선언을 내놓아야하는, 2년 단위로 낡은 것이 되는 속절 없는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미술은 이제 주기성을 띠는 것, 매우 시사적인 것, 빠른 시류를 타는 것이 되었다. 

대형 국제전의 진행과정과 귀결은 천편일률로 유사하다. 모든 촉수를 동원해 세계미술의 동향을 살핀 다음, 그 반열에 오르는 데 장애가 되는 지역적이고 촌스러운 요인을 자체 검열을 통해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국제적 양식이고, 현대적인 현대미술이다. 알려진 작가와 그들을 취급하는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매뉴얼이다. 세계와 현대, 이 두용어로 이루어진 세계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동질성의 세계다.

비엔날레는 예술담론의 내부 깊숙이 파고든 물량주의와 자본의 오만한 승리주의의 모습이며 예술의 위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소모적인 소통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도, 오히려 그것이 없어질 때 세계 각지역의 진정한 예술 교류에 가담하고 지속 가능한 소통양식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작은 규모의 단체가 고안하는 다양한 만남과 교류의 방식이 생산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또한 기념비성에 압도되고 주눅들었던 시선을 다시 척박한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과 만나고, 그것들과 단절되었던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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