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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베틀, 배틀>(토탈미술관, 2018.8.9.~9.9)

by ㅊㅈㅇ 2019. 1. 15.

<베틀, 배틀(Looms & Battles)>(토탈미술관, 2018.8.9.~9.9) 리뷰

 

독립큐레이터 조주리가 기획한 <베틀, 배틀>은 전시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의복과 직물을 다루는 전시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 전시는 전통 길쌈과 식민지 방직노동에서 동시대 글로벌 패스트 패션까지, ‘베틀’(Loom)로 상징되는 직조와 의류 생산의 낡은 사슬과 폐허의 풍경들을 비추어본다. 이 전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연구자의 참여뿐만 아니라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와 패션디자이너가 일종의 팀을 이루어 그들이 가진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옷 만들기 배틀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토탈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자유연구모임: 외부입력이 제작한 출판물을 마주하게 된다. 연구모임의 결과물로 제작한 베틀-’ 7권은 투명한 비닐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관객은 소량으로 만들어진 이 책자를 전시 관람 내내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지만, 관람을 마치고는 반납해야 했다. 비닐 가방을 들고 전시장을 거니는 관객의 모습은 마치 쇼핑을 하기 위해 카트를 끌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었다. ‘베틀-은 전시 안에 있는 복잡다단한 맥락을 관객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베틀, 배틀>에서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는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하며, 대부분 이 전시를 위해 신작을 제작했다. 페미니즘과 치안의 문제, 대통령의 의복, 계급의 문제, 패스트패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 브랜드의 역사 등 옷과 관련된 여러 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화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흥미로웠던 작업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메인 전시장과는 조금 동 떨어져 있는 독립된 공간에 흑표범 작가의 <선영, 미영, 미영>이다. 이것은 한국의 공포영화에서 여성 귀신이 항상 입고 등장하는 소복이라는 전통적 의복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기존의 소복과는 다른 소재와 패턴을 활용해 현대인을 위한 일종의 보호막을 만들었는데, 설명 문구와 함께 그 보호막을 한쪽 벽면에 걸어 놓고, 몇몇 여성이 해당 옷을 입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사진을 함께 전시하였다. 여성 퍼포머이자 연구자로서 젠더에 관한 편견을 깨뜨리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인 흑표범은 기존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라는 주제와의 접점을 흥미롭게 찾아냈다.

조은지의 <대통령은 사랑을 위하여>는 새롭게 정의된 대통령의 옷을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대통령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정파, 남녀, 계급을 초월하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더 나아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여 사랑하는 이상적인 대통령상을 떠올리게 한다. 옷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으로, 강력한 이미지 메이킹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사회 속에서 여러 종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중에서도 정치인, 대통령에 관해 언급할 때 몇몇 방송에서는 그들의 패션을 집중 분석하기도 한다. 김민정 교수는 여성신문에 실은 컬럼에서 여성 대통령의 경우 정치적 언슬보다 패션 외교에만 유독 주목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조은지 작가가 제안한 대통령의 사계절용 노동정장 세트는 형광, 표백처리를 하지 않은 자연가공한 원단인 광목을 이용하여 제작됐다. 최대한 단순하고 활동하기 편한 디자인, 옅은 누런색의 색깔의 이 옷은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보다는, 보온성과 흡수성이 높아 옷의 기능에 충실하다.

이완의 <29.98>유니콘 프로젝트의 첫 번째 브랜드다. 29.98은 증권시장에서 주가 1일 상승 제한 폭에 가까운 퍼센트의 수치를 의미한다. 이처럼 상징적 숫자를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것은 유니클로지오다노에서 팔법한 베이직한 아이템들이다. 검정 후드티, 흰 반팔티, 검정 운동화 등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써져있는 브랜드 로고 이외에는 별 다른 특성을 찾아보기 힘든 물건을 진열했다. 작가 이완은 2013년부터 <메이드 인>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매일 먹고, 쓰는 모든 물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하며, 하나의 오브제를 통해 한 국가의 사회, 역사, 경제적 맥락을 되짚는다. 이완은 <29.98>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오브제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한편으로는 미술 작가가 하나의 기업처럼 기능하는 상황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융합(fusion)’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연구의 대상과 논의를 확장해 나간다. 미술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술 내의 주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분야(예를 들어 과학, 게임, 건축, 영화, 음악 등)를 함께 다루는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종종 두 분야 모두에서 전문적이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베틀, 배틀>은 미술과 패션 이라는 두 가지 다른 트랙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두 분야 모두에 대한 진지한 선행 연구가 있었으며, 그것이 효과적인 협업의 형태로 구현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베틀, 배틀>은 디스플레이나 전시장 구성 등에 있어서 패션이라는 또 다른 주제적 요소를 잘 시각화했다. 투명 비닐 백에 브로셔를 담아둔다던지, 옷의 형태로 제작된 작품을 선반에 올리거나 행어에 걸거나 마네킹에 입혀두는 등 옷가게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디스플레이 방식을 가져와 작품을 전시해 쇼핑을 하러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각 팀은 마치 개별 옷 브랜드처럼 브랜드 로고를 만들어서 전시장에 일부 삽입하였는데 그 역시도 잘 어우러졌다. 기획자와 작가 간의 소통이 얼마나 긴밀하게 오랫동안 이루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하나의 잘 컨트롤 된, 기획자의 '작품'으로서의 전시였다.

그러나 단단한 주제전일수록 수반되는 필연적인 단점도 있다. 개별 작가를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몇몇 작가는 원래 하던 작업과 긴밀한 연장선상에 있는 작가도 있지만 조금은 그 연결고리가 느슨해 보이는, 일시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작가도 눈에 띈다. 그리고 각 작가들의 작품 결과물이 이라는 형태로 대부분 나오다보니, 전시장 안에서 시각적 구성요소가 일견 비슷해 보여 자세히 설명을 읽거나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었다. 이 단점은 앞서 말한 장점-잘 컨트롤 된 기획자의 작품으로서의 전시-의 동전의 이면과 같은 것으로, 기획자의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선영, 미영, 미영, by 흑표범 X Jeune June

대통령은 사랑을 위하여 by 조은지 X 쉐장

29.98 by 이완 X 소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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