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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전시서문] 홍수진 개인전 <술렁이는 낮을 위한 조율>(쇼앤텔, 2019.7.30~8.24)

by ㅊㅈㅇ 2019. 7. 30.

홍수진 개인전 <술렁이는 낮을 위한 조율>(쇼앤텔, 2019.7.30~8.24)

매년 11월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데, 이때 수많은 수험생들의 가족이 각자가 믿는 종교에 따라 교회, , 성당 등에 가서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고 빌고 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몇몇은 절에서 백팔배를 하고, 몇몇은 교회와 성당에서는 쉴 새 없이 기도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입에 쓴 약을 마셔야 할 때도 있고,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 빙 둘러서 가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다.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힘 혹은 신에 관한 믿음 말이다.

이번 전시 <술렁이는 낮을 위한 조율>에서 작가 홍수진은 일종의 두려움과 그것을 견디기 위한 믿음, 비는 마음에 관한 작업을 선보인다. 먼저, 마치 기도할 때 손을 모으는 것 같은 자세로 두 손바닥을 마주한다. 작가는 물풀을 손바닥에 바르고, 철로 만들어 둔 구조물 앞뒤로 손을 움직이며 누에고치처럼 보이는 풀 오브제를 만든다. 손의 움직임은 얇은 실타래와 같은 흔적을 남기며, 홍수진의 시간과 행위는 형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여 그것을 루틴(routine)으로 만듦으로써, 한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표출하는 셈이다. 절이나 기도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표출이라면, 홍수진의 작업은 이 같은 비는 마음에 물체의 성질을 부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전시장 안쪽에 있는 보랏빛 계단을 가득 메운 풀 오브제들은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외부 자극에도 부서질 듯 지극히 연약해보이면서도, 뒤로 물러나서 여러 개를 한 눈에 보면 단단하고 견고한 성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울 것 같으면서도 철제로 만든 구조 내부는 부피감이 있어 안전한 피신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미줄 같기도 하고, 호롱불 같기도 한 풀 오브제들은 동굴과 같은 지하 전시실에서 관객을 만난다. 검정색, 흰색, 녹색, 회색 등의 안료를 섞어 만든 풀 오브제들은, 크기나 색이나 형태가 모두 달라, 하나하나가 개별의 생명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풀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 아주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을 따라한다면, 누구라도 해봄직한 것이다. 다시 말해, 홍수진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기술력을 가졌다기 보다는, 누구나 할 수 있을법한 기본적 행위를 마치 수행하듯 무한히 반복함으로써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를 작품화한다. 풀 오브제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작가의 손은 비누의 형태로 전시장 한편에 보존된다. 라벤더, 프랑키센스, 페츌리와 같은 허브가 들어간 5개의 비누는 전시장 내부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작가뿐만 아니라 관객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비누와 함께 전시된 영상 작업은 허브에서 증류수를 추출해서 비누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는 고대 연금술을 떠올리게 하며 아름다운 물질적 전환을 보여준다

홍수진의 작업에서 인위적 형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천과 솜을 이용해 나뭇잎의 형상을 쿠션처럼 만든 <Garden>(2016), 돌과 한지를 이용해 수풀과 같은 형상을 만든 <지속 가능한 풍경>(2016), 세 개의 나뭇가지를 서로 기대어 만든 토템과 같은 <다섯 개의 풍경>(2017) 등 그가 만든 작업은 자연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 실제 자연 풍경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특성을 보여 왔다. 자연의 형상을 닮은 예술적 시도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삶의 질서를 잊지 않으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세속의 삶에서 쌓여가는 불안과 스트레스, 괴로움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은 아닐까?

토테미즘이 부족의 기원과 특정 동식물을 연결하여 숭배하는 신앙이고, 샤머니즘이 인간과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신앙이라면, 홍수진의 믿음이 향한 곳은 어디일까?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일 것 같다. 오늘날 효율성, 기술적 진보, 과학적 성취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 믿음과 달리 예술은 사회적 효용을 잃은 낭만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듯싶다. 작가는 눈앞에 즉각적인 효과나 빼어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세상의 수많은 눈과 입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사람들이 백팔배를 하는 것처럼 비효율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처럼 보일지 지라도, 예술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허브 향기와 같이 사람들에게 은은하게 배어들어 영향을 끼치고, 또 현실에서 쉬이 접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쉼과 안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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