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아 개인전 <낯선 파동>(송은아트큐브, 2019.8.1~9.4)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 지와 같은 일상적인 선택부터 인생을 좌우하는 가치관에 관한 선택까지…. 선택의 기로에서 한 가지를 결정하고 나면 가지 못하는 길이 생기고,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잇따르게 된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 중 하나는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일일 것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두 남녀는 자유의지에 따라 결혼을 하고, 더 나아가 자녀를 출산한다. 의료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다. 10개월 동안 태아를 뱃속에 품어 세상으로 내보낸 어머니라는 존재는, 갖은 신체적 변화와 고통을 겪으며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동반자로,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여성에게 닥친 물리적인 변화는 ‘몸’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경험은 한 개인에게 명백하게 ‘낯선 파동’을 만들어낸다.
30대의 여성 작가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인 한상아는 이번 전시 <낯선 파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삶의 변화를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풀어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은 실체의 일부만을 가리거나 혹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의 모습으로 마치 무인도를 탐험하는 사람처럼, 문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원시의 자연에서 홀로 표류하고 있다.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선인장과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가 우거진 이곳에서, 미지의 여성은 무사할 수 있을까? 마치 파노라마처럼 쭉 이어지는 그의 그림은 각기 다른 시간의 장소와 경험을 한 데 모은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에서 딸에게 또 그 자녀에게 이어지는 관계의 굴레는 유한한 인간의 일생을 이어붙인 무한한 삶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수풀을 헤치고 가면 또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올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생명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부터,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까지, 어머니의 역할은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 몸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한상아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었지만 또한 누구나 겪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삶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한상아는 먹을 주 재료로 활용한다. 바탕으로는 종이 대신 미색의 광목천을 사용하는데, 광목천은 종이보다 두껍기에 먹이 반응하는 속도가 느리고, 더 나아가 자연의 색을 띄고 있어 따스한 느낌을 담았다. 작가는 천을 구입하면 가장 먼저 다리미질을 하여 천을 고르게 펴낸 뒤, 분무기를 이용해 물을 먹이고, 그 다음 먹으로 적셔나가며 작품을 제작한다. 일부분은 가위로 오려내어 그림 위에 바느질을 하여 꿰매기도 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라고 여겨졌던 공예적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 여성주의 작가들이 작업에서 천 조각을 꿰매고 붙이는 등의 기법을 활용해 순수미술보다 저급한 미술로 간주되었던 공예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던 것을 떠올려보게 한다.
한상아는 재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먹은 다른 재료보다 물에 가장 신속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붓끝의 움직임에 따라 먹은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광목천 위를 표류한다. 먹은 나아가려는 힘과 멈추려는 힘으로 특유의 진동을 만들며 물과 함께 떠돌다 광목천에 정착한다.” 피부에 스며드는 기억과 같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던 먹은 바람이나 온도와 같은 환경적 요인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먹은 정복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작가는 그저 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재료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한상아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먹과 물, 천을 사용해 작품을 직조해낸다. 작가는 천 조각을 바탕천에 비교적 듬성듬성 꿰매서 바느질 자국이 도드라져 보이게 남겨주었는데, 이는 마치 윤곽선처럼 대상을 에워싸며 선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은 한상아의 작업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 풍덩 뛰어들게 된다. 관객은 이차원의 평면적 이미지를 멀리서 관조하는 수동적 입장이 아닌, 일종의 환경으로 조성된 공간에서 작품과 함께 공존하며 순간을 공유한다. 어두운 배경, 낯선 조합, 비례가 맞지 않는 풍경은 마치 꿈속의 장면과도 같은 고풍적 순수함을 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찾기 어려울 법한 이국적인 정글에서 우리는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큰 그림 맞은편에는, 한상아의 그림을 오리고 꼬매서 만든 인형 모빌 <낯선 파장>이 걸려있다. 마치 요람과 같이 꾸며진, 작가가 제시한 무대 속에서 관객은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된다. 그의 그림은 이제 공간으로 확장되고, 관객이라는 마지막 열쇠와 함께 여러 개의 시간 층을 쌓으며 일시적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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