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특정적 회화
미술의 역사에서 추상미술(Abstract Art)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심적 주관성을 표시하는 미술로, 재현미술에 상대되는 의미로 구분되어 왔다. 20세기 초반의 추상미술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관한 유토피아적 열망을 반영하고 있지만, 전후 미국에서 이뤄진 추상 실험은 현실과 구분되는 순수한 미술, 형식주의 미학으로 수렵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한 추상미술은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으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전자가 기하학적이고, 이성과 합리,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며, 정형적 성격을 띤다면, 후자는 서정적이고, 감정과 정서를 중시하며, 비정형적인 특성을 가진다. 김서울의 첫 번째 개인전 <Uncolored>에서 선보이는 <After DeKooning> 시리즈는 서양 현대미술사에서 접해 온 추상미술의 스테레오타입들을 일견 연상케 하면서도, 2019년의 맥락에서 재발견해 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추상미술에 관해 고민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김서울의 작품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색이 화면 위에서 다채롭게 펼쳐져 있으며, 특정한 형상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즉흥적으로 구사한 감정적인 화면일지 고민하며 한 발짝 작품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색면과 색면 사이에 윤곽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1mm 이내의 좁은 틈이 비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우연한 효과를 받아들이며 자유롭게 그려진 것이 아닌, 절제와 계획적 움직임의 흔적이다. 마치 지도에서 개별 행정구역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같은 틈은 화면 내의 공간을 구획 지으며 분리시킨다. 브러시스트로크 역시 다양한데, 어떤 부분은 묽고 투명하게 채색되어 있고, 어떤 부분은 두껍고 매트하게 칠해졌으며, 어떤 부분은 색이 그러데이션 처리되거나, 여러 차례 겹쳐져 발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완성된 캔버스는 바니시 칠이 되지 않아 마지막으로 물감이 발린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중심도 주변도 없이 평평하게 이어지는 그의 화면이 나타내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작품은 작품을 보고 나에게 주는 느낌대로 감상하고 즐겨도 좋지만, 어떤 그림은 작가의 계획이나 의도를 듣고 나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김서울의 작품은 후자에 더 가깝다. 김서울의 작품은 소위 말하는 ‘뜨거운 추상’처럼 색채를 자유롭게 구사한 듯 보이지만 ‘틈’에서 볼 수 있었던 ‘이성’의 통제력은 색의 선택 과정에서부터 발현되었다. 네덜란드의 유화물감 제조사인 올드 홀랜드(Old Holland)에서는 총 168색의 물감을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는데, 김서울은 올드 홀랜드사의 모든 물감을 모두 이용하여 <After DeKooning>을 제작하였다. 모든 페인팅을 제작할 때 작가가 조건으로 삼은 것은 “168가지 색을 모두 ‘민주적으로’ 사용하며, 혼색하지 않고, 비슷한 양을 사용하며, 168조각으로 구성해 화면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는 학습된 방식대로 인위적인 조화나 어울림을 연출하지 않고 자신의 설정해 둔 조건들을 충족시키며 작품 제작을 위한 과정을 수행해나갔다. 172cm의 정방형의 캔버스를 사용한 이유가 “천의 로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사이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김서울은 어떤 낭만적인 이유나 그럴듯한 단어들로 그의 작품 혹은 자신의 태도를 포장하지 않는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개별 재료의 특성을 꼼꼼히 연구하는 요리사처럼, 김서울은 올드 홀랜드사에서 판매하는 모든 색의 물감을 구입하고 사용해보면서 물감의 성질을 파악하고, 분류하는 데 2년여의 시간을 들였다. 색상, 채도, 명도뿐만 아니라 직접 사용해봐야지만 알 수 있는 특성이 있었다. 작가는 “만약 각각의 물감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와 같은 엉뚱한 상상을 기반으로, 각 물감이 가진 정체성, 고유한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채색했다. 그 예로, 인공 안료를 이용한 물감은 비교적 투명도가 높아 의존적인 성격일 띤다고 생각하여 여러 겹으로 겹쳐서 칠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미묘한 색상의 차이는 비슷한 계열의 색이 인접하게 칠해졌을 때 두드러져 보인다고 생각하여, 화면 내에서 붉은 계열의 색들이 한쪽에 몰아서 채색하기도 했다.
색의 종류는 색을 섞는 비율에 따라 수백 수천가지도 만들어질 수 있겠지만, 168가지로 한정된 이유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물감 소비자들이 이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색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결정된 색의 스펙트럼이다. 다시 말해, 색의 종류나 개수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닌,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페인터들은 자신의 색에 대한 선호도나 관심사에 따라 특정 색을 편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서울은 그와 정 반대의 지점에서, 마치 조건 값에 따라 반응하고 수행하는 기계처럼 168가지 색을 평등하게 사용하고자 했다. 색의 선택에 있어서 김서울이라는 그리는 주체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택한 것이다. 제작방식에 걸맞게 작품의 제목도 ‘After DeKooning No.1’ 과 같이 시리즈명 뒤에 숫자를 더한 방식으로 붙였다.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 개별적 의미를 가진 다기 보다는, 시리즈로 묶여서 한데 모여 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극대화되는 특성을 갖는다.
김서울의 작품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틀 위에서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감정적이고 자유분방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기에 일종의 ‘반전 매력’을 가진다. 시각적 단서를 넘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함께 전시한 일련의 드로잉은 마치 수학적 원리에 기초한 듯 보일만큼 명료한 원칙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무수히 많은 이미지와 영상에 쉴 새 없이 노출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는 168가지라는 제한된 색상만을 이용해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직조해낸 화면을 제시한다. 그가 만든 조건을 충족하는 작품은 앞으로도 무한히 더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잭슨 폴록이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뿌리는 자신만의 독창적 기법으로 드리핑 회화를 제작했다면, 김창열이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여러 기법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그려왔다면, 김서울은 자신이 만든 제약조건들에 부합하는 작품을 하나의 시리즈로 끝없이 변주하며 만들어나간다. ‘기법’도, ‘소재’도 아닌 ‘조건’이 그의 작품에 있어 핵심적 요소가 된다.
그가 만든 조건은 모두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요소들의 특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미술 바깥의 영역과 연관된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미술을 위한 미술’을 지향했던 모더니스트 페인팅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매우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한 것으로,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요구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 궤를 달리 한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전통으로의 회귀보다는 미술 ‘오타쿠’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덕질’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김서울의 작업실에는 168개의 물감이 순서대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정리되어 있다. 그를 괴롭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정렬된 물감들의 순서를 흩뜨려놓는 것일 테다. 빈틈없이 메워진 화면, 모든 색의 사용, 계획을 위한 드로잉, 넘버링으로 이름 붙여진 작품들까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강박적인 행동들은, 그의 작은 습관 하나하나는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작품으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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