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3. 리뷰

[전시리뷰] 정현두 개인전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8.13~9.22)

by ㅊㅈㅇ 2019. 10. 17.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전시 전경 (사진:한황수)

생동하며 춤추는 이야기

하얗게 정돈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내 몸을 360도로 가득 감싸고 있는 정현두의 작품을 차례차례 감상하고 있노라면, 이국적인 숲을 경험하는 것 같은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 분명히 9점의 작품은 각기 다른 장면을, 순간의 흔적을 담고 있음에도 커다란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진다. 작품이 구체적인 장소나 시간대를 지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일종의 공간감을 경험한다. 9점의 작품들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각자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모두 모였을 때에는 웅장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여러 종류의 붓 터치, , 구성 등을 분석하는 이성적인 방식보다는, 좀 더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방식, 직관적으로 그림을 느낄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전시 제목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은 해보지 않았던 상상을 해보게끔 한다. 내 얼굴을 누군가에게 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 캔버스를 한 명의 사람의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문장에서 주어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사람의 얼굴을 옆의 그림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담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하나의 사람/문장 속에 있는 얼굴/주어가 그 옆의 그림으로 이어져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작품은 캔버스 안에서 완성 혹은 종료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옆의 작품으로 이어져 나간다.

개별 작업의 의미보다 하나의 시리즈로서 작업을 구상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제 더 이상 회화 작품은 한 화면 안에 갇혀 완성된 혹은 박제된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 대신, 하나의 전시 안에서 여러 작품 사이의 조화를 이루며 생동한다. 더 나아가서는 전시와 전시도 이어져 나가며 하나의 연계성을 직접 드러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시리즈로 구상한 작업은 한 점만 따로 떼어서 걸었을 때에 그 본래 의미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서있는 작가가 자유롭듯, 그의 작품도 자유롭게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전혀 사람 혹은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에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정현두의 작업이 완성된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고, 특정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도 아닌, 몸의 행위와 시간을 집적한 결과물로서의 회화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캔버스의 크기 역시 작가가 캔버스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충분히 활용해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아주 작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인체와 비슷한 크기 말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집적물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그림을 사람처럼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그렸다고 말하는 작가이지만, 투박한 단색, 검정, 거친 붓놀림은 아름다운 어떤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의 붓터치는 잭슨 폴록의 흩뿌려진 물감처럼 기계적이고 몰개성적인 흔적이 아니라, 작가가 캔버스 앞에서 오래 고심한 주관적 결정들의 집합체이다. 붓은 뻣뻣한 상태의 굵기만 다를 뿐인 확장된 손(extended hand)”같다는 작가의 말을 상기시켜볼 때, 그의 작품은 곧 손의 흔적임을 알게 된다. 작가의 손의 흔적들로 가득 채워진 자유분방한 화면은 이제 그의 손을 떠나 모든 제약에서 자유로운 듯 춤추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