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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5. 인터뷰

[인터뷰] '관계미학' 이후, 리암 길릭 인터뷰

by ㅊㅈㅇ 2015. 12. 15.


Liam Gillick, Three Perspectives and a Short Scenario* Work 1988 - 2008 Mirrored Image: A ‘Volvo’ bar 27. September bis 16. November 2008


'관계미학' 이후, 리암 길릭 인터뷰

갤러리인, 2013년 4월 17일 


리암 길릭(Liam Gillick: b.1964)은 영국 일즈버리 출생으로, 1987년 골드스미스대를 졸업,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한다.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안젤라 블로흐 그리고 헨리 본드 등과 함께 1990년대 초기 yBa의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리크리트 티라와니트 등과 함께 ‘관계미학’의 컨텍스트 속에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이미 만들어진’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을 비평하는 예술적 방법을 실험해오고 있다. 2009년에는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선정됐으며, 취리히 쿤스트할레(2008), 시카고 현대미술관(2009)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파울카시러미술상(1998)을 수상했고 터너프라이즈(2002)에 노미네이트 됐다. 현재 뉴욕에 거주 중이며 콜럼비아 대학(1997~) 및 바드 컬리지 큐레이터학 센터(2008~)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갤러리인에서 열린 리암 길릭 개인전 <다섯 개의 구조와 뱃노래(Five Structures and a Shanty)>을 위해 방한한 리암 길릭과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아트인컬처』 2013년 5월호에 요약본이 최초 실렸으며, 증보해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에 게재했다.


2004년 『옥토버(October)』에서 클레어 비숍과 논쟁이 있었다. 비숍은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라는 글에서 관계미학이 관객 참여의 구체적인 질을 논하지 않는 선에서 봉합되었다는 것처럼 비판했고 당신은 여기에 대해 답했다.

나는 클레어 비숍을 좋아한다. 그는 아주 학문적인 틀에 갇힌 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무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어 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큐레이팅의 새로운 모델에 대해서 고민하며 한 시기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전시가 무엇인지, 관객(audience)과 대중(public)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다. 대중은 하나의 무엇으로 묶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다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관객은 상대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어떤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예술을 이야기할 때 관객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어 왔다. 우리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관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관계미학이 한창 관심을 받던 시기에, 쟁점이 된 것은 대중에 대한 것이었다. 관계 미학은 대중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관객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가다가 여기 있기 때문에 들어와 보는 관객도 컨템포러리 아트를 보러 들어오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의 행동에 코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사람들과 예술의 관계를 조금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관계미학이 대중과 예술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들이 컨템포러리 아트를 접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간단하게 갤러리를 24시간 연다면 사람들이 더욱 쉽게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예술을 접하는 순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을 만나는 순간(art moment)’을 인지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예술이 대체 어디 있는지, 무엇에 내가 개입하게 되는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관계미학을 다루는 예술작품에 있어서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클레어는 작품의 성공 혹은 실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 혹은 내가 집중했던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클레어는 소외된 대중이 있다는 아이디어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모더니스트의, 막시스트를 사칭하는(pseudo-marxist)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할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순간이 개입의 순간(moment of engagement)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말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을 때 매우 유동적(mobile)이 된다. 물론 나는 추상화와 구조 자체에 관해 관심을 가져 왔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역할 같은 것에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대중에 대한 질문들에 오히려 회의적인 입장이다.   


디스커션 플랫폼을 만들 때,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만들 때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에 대해서 어떻게 토론할 것을 기대했는가?

너는 지금 클레어 비숍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술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작업을 그렇지 않다. 나는 특정 공간을 만들어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도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거나, 무엇인가가 명확히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 플랫폼은 하나의 지정된 공간(designated space)일 뿐이다. 이것은 누군가를 가르치려는(didactic)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작품은 19세기 미국에서 쓰인 유토피아에 대한 글에 기원을 둔다.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라는 저자인데, 그는 새로운 도시를 구상한다. 그 도시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덮는 덮개(canopy)가 있다. 이 보호막은 그들을 지켜주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특정 공간에 대해서 경계를 표시하고(demarcate), 지정해(designate)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로 여기게끔 한다.

 나는 한국에 왔을 때 DMZ에 가고 싶은 욕망이 매우 컸다. 그곳은 경계근처에 위치해 있고 하나의 파시스트 경계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내 작품에 아주 적합한 공간이지만, 위험하다고 여겨서 그곳에 설치하지는 않았다. 내가 계획한 것은 누군가가 꼭 무엇을 해야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나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하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 작품은 관객의 변화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미 감지했듯이, 점점 읽을거리가 늘어나게 되었고, 전시와 더불어서 평행한(parallel) 것이 많이 생겼다. 1997년 도쿠멘타에서 나는 거대한 플랫폼을 선보였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 순간에 발생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perform)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부터 발생됐다. 관람객의 변화하는 상태에 대한 기술 말이다. 관객이 작품에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나는 인터넷 시대의 출범과 큐레이터가 급부상하는 시대에 적합한(appropriate) 버전을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은 어떤 측면에서 계속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불쌍한(pathetic) 시도인 셈이다.


작업에 전혀 어떤 교화적인 목적이나 윤리적인 지향점 같은 것은 없다는 뜻인가.

없지 않다. 오히려 매우 뚜렷하다. 내가 만든 것은 ‘토론을 위한 지정된 장소(designated zone for discussion)’이다. 대화의, 담화의 순간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환상(vision)이나 교화적 목적(didacticism)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 이것을 해라 명령하거나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 반대이다.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관객에게 예술을 통해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목적이고, 이는 매우 명확한 목적이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아는 것은 항상 쉽지 않다. 그러나 질문은 너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지, 이렇게 행동하면 안되니까 저들은 특정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만들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권위적인 예술가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정말 싫어한다. 예술가가 갑자기 개입해서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 내가 지양하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관객은 디스커션 플랫폼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좋은 질문. 내 생각에 그들은 종종 “그럼 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술은 지난 15년 동안 많이 변했다. 요즘 관객들은 전시를 대할 때 15년 전과는 다른 종류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기관, 혹은 제도가 가지는 권력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public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있지도, 그들과 관계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내가 만들어 둔 디스커션 플랫폼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잘 알지 못한다.

색깔과 형태를 이용해서 만드는 나의 작품은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미끼(lure fish)같은 것이다. 물리적인 작업 자체는 하나의 미끼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보고 이것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더 깊은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스미드슨이나 댄 그래험도 이같은 작업을 한다. 그는 매우 시각적인, 건축적인 형태를 이용한다. 그리고 몇몇은 그들이 쓴 글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예술의 문제에 관해 더욱 깊게 관여하게 된다. 예술이 자율적인(autonomous) 기능을 가질 수 있느냐와 같은 문제 말이다.

 

근접학: 선별된 에세이들(Proxemics: selected essays)이라는 책을 낸 걸로 알고 있다. 근접학이라는 단어에서도 관계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맞다. 분명히 이 근접학이라는 단어가 관계에 대한 개념이기는 하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관계 같은 것도 포함하는 단어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또한 가까움(proximity)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구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나는 내 작업과 그것이 놓이는 공간을 조정(control)하는 것이 내 작업의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응용미술(applied art)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나는 고급예술에 대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질문들(예술의 순수성이나 진실성과 같은)에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다. 나는 부차적인(secondary) 것에 관심이 많다. 공간을 새롭게(renovate)하는 개념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도록 한다. 모든 것은 항상 관계 속에서 읽힌다. 관계 미학은 종종 인간관계에 대한 측면만이 지나치게 부각된다. 그러나 사실상 초창기에 이야기했던 ‘관계’는 예술작품과 일상 사물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예술작품이 무엇에 근접해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내 작품은 문자 그대로 옆에 놓인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컵과 선글라스처럼 말이다. 둘 사이에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더라도, 이 둘이 통합되는 경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며 새로운 근접성을 만들어낸다.  

 

글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쓰기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혹은 작업에 있어서 필수적인가?

아니다. 초기에는 로버트 스미드슨, 도날드 저드처럼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드는 일반적인 전시리뷰도 썼다.) 나는 그저 그들이 글을 많이 쓴다는 점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 알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글쓰기가 좋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절대 다른 작가와 경쟁을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에 발생하는 부드러운 비평(soft criticism)이 좋다. 하지만 최근에는 더 이론적인(theoretical) 글을 많이 쓴다. 이제 내 위치가 많이 변해서 누군가의 작업에 대해서 글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25세의 젊은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크리틱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웃긴 일이 될 것이다.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bully)이나 아주 나쁜 선생처럼 말이다. 그것은 아주 잔혹한(cruel) 일이다.

내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은 글쓰기가 아니다. (사실 로버트 스미드슨이나 도날드 저드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글이 작품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매우 이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작업에 영감을 주는 것은 미술 외적인 영역의 것들이다. 나는 예술에 대해서 그다지 많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저 버스에는 왜 저런 색깔을 칠했을까 저 건물은 왜 저런 색깔일까 생각한다. 왜 경찰관은 자기 옆에 소화기를 놓았을까 이런 일상적으로 지나치기 쉬운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정치, 경제, 건축, 철학 등 미술 외적인 영역의 책들을 주로 읽는다. 예술에 대해서는 읽지 않는다. 여기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체류하는 기간이 짧기도 하지만, 더 오래 머무른다 해도 나는 미술관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차라리 길거리를 더 걸어 다니고 다른 활동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게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로맨틱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여한 바 있다. 유투브에서 인터뷰를 봤는데, 오래된 교회와 같은 공간에서 나무로 만든 단순한 부엌을 제작한 것을 보았다. 그 작품도 언급했듯이, 공간과 작품의 관계 자체에 주목한 것인가?

나는 반파시스트적(anti-fascist)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다. 건물에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된 부엌을 만들고, 그 위에 말하는 고양이를 두었다. 이 작품은 모더니즘 시기의 부엌 디자인의 유산이다. 미니멀리즘은 부엌 디자인으로 귀결됐다. 나는 1920년대 활동한 오스트리아 여류 건축가인 마가렛 S.(Margarete Schutte-Lihotzky)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1928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모더니스트 건축에 관한 전시에 부엌을 디자인해 출품했다. 이는 이후에 프랑크푸르트 부엌이라고 하여 매우 유명해졌다. 그녀는 소위 말해 ‘좋은 독일인(Good Germna)’이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말이다. 물론 여성이 집안일을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여성들에게 더 자유 시간을 많이 주기 위해서 효율적인 부엌을 제작했다. 그는 일견 페미니스트의 원형(proto-feminist)과 같다. 그는 여성이 병원, 유치원이나 부엌에서 주로 일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러한 일이 부차적이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시 남성 건축가들이 비범하고 순수한 형태를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면, 그는 현대적 삶을 이해하는 데 ‘부엌’을 중요한 키워드로 여겼다. 이러한 개념이 내 작업의 단초가 됐다. 나는 이 건물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단순하고 거친, 소박한 재료를 사용했다. 또한 건축물 자체를 숨기거나 변형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독일인들은 매우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예술가란 이러해야한다는 식의 특정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내 작업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하다.

좋다는 사람과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으로 완전히 나뉘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작업을 이해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술의 최종 목표가 사람들의 이해를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20세기에 들어서 점점 더 회피하는(evasive) 성향을 띤다. 미술의 역사에서 진일보하는 경우를 보면, 누군가가 그룹에서 나서서 새로운 것을 주장하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종종 지금 만들어지는 예술 작품은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는 그것이 이해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내 이 작업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한 공명(resonance)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변하지 않는 명확함에 비롯된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완전히 추상적인 작업을 하는 예술가이다. 작품은 더 나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는다. 사진으로 작업을 다시 봐도 그냥 그대로이다. 마가렛 S.의 부엌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계속 지속된다. 그리고 모순으로 남는다.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고, 이 작품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예술 작품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한 가지 알고 있다. 우선 사람들을 조종해야(manipulate) 한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모두가 욕망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경험해보아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작품 세계 전반을 돌이켜보았을 때, 작업이 급변하게 된 시점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인지 궁금하다. 또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중요한 작업을 몇 가지 꼽는다면?

첫 번째로 중요한 작업은 1992년에 했던 <McNamara>. 나는 항상 작품을 제작할 때 이 작품 이면에 있는 개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곤 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매우 농축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을 작업에 도입했다. 여러 가지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리서치와 글쓰기를 지속했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영상물로 제작했다. 이 작업은 내가 기존에 고수하던 작업 방식을 바꾸게 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나는 더 이상 오브제 자체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리서치와 생각하는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변화하다 보니 물리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자체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작품을 통해서 무언가 다른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할 수(indicate) 있게 됐다.  

두 번째로는 내가 최초로 만든 디스커션 플랫폼을 꼽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주말에 자신의 집을 고치기 위해 일상적으로 가서 집안용품을 사는 가게에 가서 재료를 구입했다. 내가 이 작업을 만들던 당시에 가장 몰두해 있던 개념은 작품의 두 개의 몸체(bodies) 사이에서 발생하는 논쟁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근접미래가 어떻게 조종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막막했고, 나는 아까 얘기했던 가게에서 알루미늄, 플라스틱과 같은 일상적인 재료를 구입해 왔다. 그리고는 전시 공간 내부에 저 디스커션 플랫폼을 최초로 만들게 된 것이다. 저 장소는 누구라도 저 공간에서 다양한 질문들에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2008년 뮌헨(Munich)에서 선보인 <Volvo Bar>. 이 작품에서 최초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10년 전에는 이런 작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러한 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관계미학이 성행하던 시절에 우리는 이런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2008년에 들어서 나는 실제 미장센(Mis-en-scene)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작업을 통해서 나는 다른 종류의 관객을 대면하게 됐다. 새롭게 변화한 관객들은 더 많이 읽은 사람들이고, 더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 작업은 내가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집필하려고 했던 책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종의 자유로움의 시작(beginning of freedom)이었다. 나는 더욱 농축된, 핵심적 개념과 텍스트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완성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젊은 배우들과 함께 퍼포먼스 같은 연극을 준비했다. 연극의 내용은 내 작업 전반과 제작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을 고용한 것인가? 그들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맞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고용인들이 일하는 시간동안 일을 했다. 그들은 모여서 리허설을 했고, 내가 준 키워드를 가지고 하나의 연극을 발전시켰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첫 번째 작품은 내가 28-29살 때 제작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30대 초반에, 세 번째 것은 40대 중반에 제작한 것이다. 세 번째 작품을 제작할 때에 함께 일한 연기자들은 나보다 20세가량 어린 친구들이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산 다른 세대의 사람들인 것이다. 사물을 보고 인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고, 사고방식도 달랐다. 나는 더 이상 직관에 의존하여(intuitively)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책임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 하지만 매우 좋은 질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왜 여태껏 한 번도 묻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많은 공공미술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건물 파사드 작업이라든지,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처럼 말이다. 외부 공간에서 진행하는 작업과 내부공간에서의 작업이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는데, 차이가 있는가.

가장 큰 차이는 관객 자체가 산만하다는 점이다(distracted viewer). 그들은 실제로 예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작품을 접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일상의 행동들을 하는 것이고, 우연히 예술작품을 만나게 된다. 내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에는 나는 내 작품을 2가지 다른 목적과 결부시켜 만든다. 하나는 제작을 요청한 사람들과 명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든, 행정가든 말이다. 시스템 내부에 침투해 그들과 언쟁을 하는(argue) 과정을 통해 그들의 관점을 바꿀 수 있다. 다른 경우로는 평범한 케이스들이 있다. 무엇인가가 생산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 말이다. 분명히 어떤 규칙이라든지, 행동 양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러한 조각 작업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공공미술 작업은 관객과 매우 수동적인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면 내가 현재 진행하는 세 가지 프로젝트가 있다.

스웨덴 서쪽에 있는 시청에서 진행중인 작업에 대해 소개하겠다. 간단히 말해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단독으로 서 있는(free-standing) 선반과 벤치들이다. 시청은 건물과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벤치와 선반은 번갈아가면서 놓이는데, 마치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 냥, 건물 안과 밖으로 쭉 이어져서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안쪽에도 앉게 되고 바깥에도 앉는다. 공원에서 사람들이 점심을 먹을 때 보통 공원에는 선반이 있지 않다. 보통 벤치만이 놓인다. 그러나 이 공원에서 사람들은 선반에 그들이 싸온 샌드위치나, 롤러블레이드 등을 놓을 수 있고, 어린 아이들은 그 위에 올라가서 놀 수도 있다.

미국 텍사스에 휴스턴 대학에는 현재 사인 시스템(sign system)을 만들고 있다. 대학 곳곳에는 인문대학, 약학대학 이런식으로 표지판이 놓여 있다. 나는 대학 들어가는 입구 쪽에 거대한 막대(pole)를 세우고 많은 기호를 덧붙일 생각이다. 다양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 사인들은 내가 만들어 낸 새로운 분과(department)를 지시한다. 예를 들어, 수치심(shame) 분과, 상실(loss) 분과, 붕괴(collapse) 분과 처럼 말이다. 첫 번째 언급한 프로젝트는 건물 자체가 없다는 상상력을 전제로 만든 작품으로, 시청이라는 공간이 지역주민, 시민을 위한 것임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대학에서 새로운 축구 경기장을 만들면서 그 경기장을 홍보하고 꾸미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나는 두 프로젝트에 완전히 다른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  

세 번째 프로젝트도 텍사스 오스틴에서 진행 중이다. 도심에 미술관과 공원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 있는 지역이 있다. 요즘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결혼식 사진을 찍는 데 주로 쓴다. 그 곳에서 나는 거대한 추상 작품을 만들 예정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제안을 받아서 일을 할 때 나는 까다롭게 구는 편은 아니다.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그때 그때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다른 작품들과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여전히 유효한 질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단어는 없어질 것이다. 이 개념은 사실 특정 시기의 미술을 일컫는 단어다.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가 새로운 기치를 내걸 새로운 미술을 주창할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컨템포러리 아트는 이미 특정 사람을 위한 것이고, 특정 갤러리, 특정 태도, 어느 정도의 돈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그리고 이미 몇몇은 더 이상 컨템포러리 아트에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부산비엔날레 로저 브뤼겔처럼 말이다. 그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컨템포러리 아트이다. 나의 모친은 컨템포러리 아트가 하나의 럭셔리 상품과도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요즘 컨템포러리 아트를 설명하는 다른 키워드들이 다 너무 윤리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예술이 내가 좋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기제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멍청하거나 나쁜 특성을 가진 작품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컨템포러리 아트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행위들, 무책임한 행동, 펑크 같은 다양한 작업과 실수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만 컨템포러리 아트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2014년 6월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게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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