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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전시서문] <Painting Network>(신한갤러리 역삼, 2019.11.20~12.24)

by ㅊㅈㅇ 2019. 11. 26.

 

What is Contemporary Painting?

 

최정윤(독립 큐레이터)

 

미술과 사랑에 빠진 계기는 그림이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모네의 수련 그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림을 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동시대미술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미술은 끊임없이 전통을 벗어나는 데 주력했고, 퍼포먼스 영상 설치미술 등 장르적으로도 확장되어 나갔다. 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대안공간이 20주년을 맞고 있는 지금, 이 같은 확장성과 함께 오히려 미술 안에서만 다룰 수 있는 재료, 표현을 전제로 작업적 고민을 이어가는 작가들도 늘어나는 것 같다. 이미지로 가득한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적인 것, 전통적 재료로의 회귀에 흥미를 느끼는 작가들도 있다. 예중, 예고, 예대의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익숙하게, 또 오랫동안 다뤄 온 재료이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것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직도 인사동에 가면, 잘 그린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 조금은 예스럽게 느껴지는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의 발명 이후 뛰어난 기술만을 선보이는 그림은 예전만큼은 희소성을 갖지는 못하는 듯하다. 회화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는 곳은 아트페어였는데,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관객의 취향을 거스르지 않을 법한 안정적인 작품 위주로 선보여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개별 작가의 맥락을 보여주기에는 작고 천편일률적인 박스형 공간이기 때문일까.

회화가 비평적 가치를 잃었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회화 작품이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유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원칙이 작동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러한 원리를 받아들여서 비평적 맥락을 만들어 낸 선례 역시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스템 안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그것에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테다.

 

추상화된 세계의 현실을 담은 미술

최근 몇 년 사이 현장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소위 추상미술이라고 불리는 경향의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네오 지오(Neo-Geo)와는 또 다른 특성을 갖춘 새로운 추상미술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1991년에 작성된 피터 핼리(Peter Halley)의 글 추상과 문화(Abstraction and Culture)”이 도움을 주었다. 그는 추상미술이 추상화된 세계의 현실을 담고 있는 미술이라고 적었다. 다시 말해,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추상적인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을 담은 미술이 추상미술이라는 것이다.

말은 자동차로, 촛불은 전깃불로 교체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공공장소에 발견할 수 있는 사인(sign)들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일반화된 형태를 갖춘 추상적 언어를 활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서는 대부분이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기 어렵고, 비슷비슷하게 추상화된 구조로 이루어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추상은 직접적 묘사를 담보하지 않기에, 현실에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시대의 삶 전반에서 우리는 추상적 모델을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느끼기도 한다. 경제학이나 사회학과 같은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의 행동이나 상황에서 일반화된 패턴을 추출해내기 위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추상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차원을 만드는 것이다. 각기 다르고 연관이 없는 것을 여러 가지 가능한 관계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추상화하는 것은 본질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의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다. 무한한 관계성에서 관계를 끌어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순히 보이는 관계를 시각화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의 관계를 현실화한다.

 

동시대적인 회화?

동시대적이라는 단어만큼 모호한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동시대적인 회화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 앤 링 피터슨(Anne Ring Petersen)의 글 공간을 그리기(Painting Spaces, 2010)”에서 저자는 회화의 확장가능성에 관해 말한다. 오늘날의 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장르나 카테고리의 구분이 무색해지면서 다양한 매체의 혼종이 이뤄지고 있으며 더욱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내용, 주제가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90년대 이후 페인팅은 이제 개념적으로, 또한 물리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으며, 이제 많은 경우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캔버스는 그 자체로 닫힌 공간이 아니라 전시 공간 안에 이리저리 배치되는 방식을 통해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회화를 단순히 보게하는 것이 아닌, ‘경험하게 하기 위한 시도이다.

회화는 설치 작업과 이어지며 주변 환경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관객은 자유롭게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공간의 확장은 페인팅과 관객, 전시장, 기관, 시장 등 예술작품이 놓인 다른 맥락 사이의 관계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한 허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개별 작업의 의미보다 하나의 시리즈로서 작업을 구상하는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 화면 안에서 작품이 끝나지 않는 것하고도 연결된다. 작품이 하나로 완성되는 것보다는 하나의 전시 안에서 여러 작품 간의 조화를, 더 나아가서는 전시와 전시 사이의 연계성을 고민한다. 그 때문에 시리즈로 구상한 작품은 한 점만 따로 떼어서 어딘가에 걸어두었을 때에는 그 의미를 충분히 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회화는 저자성(authorship)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장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저자성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방식이 협업이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다른 분야나 장르의 작가와의 협업은 매체적, 기법적 한계를 뛰어넘도록 돕는다. 개념적 요소가 표현의 테크닉보다 더 강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의 피부색을 같은 크기의 캔버스 400개에 옮긴 바이런 김(Byron Kim)<제유법>(1993)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종적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명백히 테크닉보다는 개념적 주제의식이 더 앞서 있다. 또한 비미술적, 비관습적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도 있다. 새로운 이미지나 도상을 만드는 것으로는 동시대적 양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어렵기 때문일까, 새로운 재료를 활용한 작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캔버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변화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확장된 장에서의 변화가 회화를 고루하고 오래된 매체가 아닌, 동시대적 맥락 안에서 읽힐 수 있도록 하는 것 같다.

 

페인팅 네트워크(Painting Network)

우리는 모두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네트워크는 여러 개체가 그물(net)과 같은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컴퓨터나 통신수단, 사람이나 기업체에 이르기까지, 네트워크의 관계망은 우리 모두에게 방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전 세계인은 물리적 제약에서 자유로우며 글로벌한 역학관계 속에서 혼종적 문화를 동시다발적으로 생성해낸다. 오늘날은 가상의 이미지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여러 정보, 광고, 개인의 의견이 뒤섞여 진실을 구분해내기 어려운 시대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작가이자 큐레이터로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전시 제목 페인팅 네트워크(Painting Network)’는 직역하면 네트워크를 그린다로 해석 가능한데, 이 제목은 단순히 네트워크를 시각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예술 작품이 본질적으로 다양한 네트워크의 맥락 안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붙였다. 출품된 작품은 모두 네트워크 안에 위치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의 바깥에서 네트워크를 메타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회화는 종종 전통적이고 고루한 장르로 쉽게 치부되며, 수차례 종말론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를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도약을 가능케 한다. 동시대 회화 작품을 이해할 때에는 도상학적 방법론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페인팅은 더 이상 화면 안에 갇힌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유동한다.

페인팅은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관계망 속에 있다. 가장 쉽게는 미술의 역사라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 속에 놓인다. 미술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사 혹은 시간을 주제로 삼은 작업도 떠올려볼 수 있다. ‘좀비라는 단어를 붙여 예전의 것이 되살아나 떠돌고 있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어떤 경향이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작업은 찾기 어렵다. 그 대신, 그것을 현대적으로 변용하거나 작가별로 새로운 맥락에서 예전의 형식을 차용하는 경우, 혹은 역사성 그 자체를 개념적으로 주제로 활용하는 경우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여러 작품 사이의 물리적 네트워크가 있다. 많은 회화 작가들은 회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관계 맺고 있는 공간과 관람하는 관객에 대해 탐구한다. 페인팅은 개념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페인팅이 퍼포먼스나 설치 작업과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이며 일종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며, 공간에서 이루어질 관객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겨,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객은 허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페인팅은 유통의 네트워크상에 놓여 있다. 여타 장르의 예술 작품과 달리 페인팅은 장식적 기능을 가진 오브제로서 판매, 수집이 대상이 되어왔기에 상품으로서의 가치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판매가능성은 순수성의 장애물이면서도 지속가능성을 제시하는 양날의 검과 같다. 질 낮은 장식물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유통, 순환의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지적인 집적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술 작품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송되고 복제, 전유, 저장된다. 이미지의 유명세는 노출빈도나 검색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사람들은 전시를 보고나서도 사진을 찍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이러한 이미지 순환의 네트워크 안에서 페인팅은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 대신, 이러한 관계망을 메타적으로 관망/비평하거나, 혹은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을 일종의 저항적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전현선, 신현정, 이희준의 경우

이번 전시 <페인팅 네트워크>에는 신현정, 전현선, 이희준 세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기획자와 세 명의 참여 작가는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관계망과 시스템 안에서 페인터로써 탐구할 수 있는 방향과 가능성에 대해 정기적 모임에서 토론/스터디를 진행했고, 그것을 토대로 각자 얻은 것을 새로운 작업에 반영하였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전현선의 작품이다. 전현선은 기존에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그의 그림은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 않는 대신, 특정 상황의 분위기, 에너지를 담는다. 작가는 배경(ground)과 형태(figure)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어서 생각하기 힘든 평등하고 평평한 화면을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소셜네트워크셔비스(SNS)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신작을 출품했다. 사람들은 인터넷 세상 안에 오랜 시간 머무르고, 또 영향을 받는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타임라인의 형식으로 수많은 글과 이미지들이 이어져 나간다. 각자의 삶과 관심사는 타임라인 상에서 공존하게 되는데, <Timeline>(2019)이나 <Layout>(2019) 같은 작품에서는 특정 사건이나 댓글들로 이어져나가는 사고의 흐름을 형태화했다. 사람들의 개별적인 관심사는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상관적인(relational) 관계에 놓이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한 화면 내의 여러 개의 창들은 중첩되며, 다중시점으로 그려졌다.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끊임없이 확산되는 양태를 표현했다. 이것은 선형적 진보나 계산 가능한 미래를 암시하지 않는 대신, 관찰자의 개별성을 강화한다.

<얼굴들>(2019)은 전현선이 지금까지 그려왔던 수많은 그림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얼굴들을 한 화면에 콜라주해서 재조합한 것이다. 구글 포토나 아이폰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을 분류할 때, 특정 인물의 얼굴을 인식해서 자동적으로 카테고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기술이 주는 편리한, 혹은 새로운 배열 방식이다. 동시에 본인이 기존에 그렸던 작업을 레퍼런스로 삼아 기존 작품의 미니어처처럼 작은 규모로 축소해 한 화면에 모아둠으로써 작품과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한다.

신현정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시각, 촉각, 후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을 활용해 대상 혹은 상황을 인지하고 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해 왔다. 날씨에 반응하고 그에 따른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날씨 회화>(2013-6),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야외 설치된 천위에 배치해 자연의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Sun Drawing>(2016), 홍차, 녹차, 강황 등을 끓인 용액에 천을 물들이고 헹구고 또 다려서 만든 표면 <하드보일드 티>(2017-8) 등 일상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독산동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있으면서 제작한 신작을 선보인다. 입주 기간 동안 신현정은 근처에 위치한 방직공장에서 쓰고 남은 혹은 자투리로 남겨진 데님, 양복천 등의 자재를 구할 수 있었다. 양복천의 체크 패턴, 짙은 남색, 회색의 컬러감은 중성적인 도시의 색이다. 이 재료를 사용해 자르고, 오려붙이고, 또 생활에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흔적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러한 제작 과정은 작가가 끊임없이 예술과 삶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자문하며 그 안에서의 균형감각을 찾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석영을 위한 왈츠(Waltz for the quartz)>(2019)는 양복천, 데님, 실크 등 다양한 재료로 콜라주한 작업이다. 천위에 염색을 하거나 수채로 채색, 바느질을 하고 또 우발적인 흔적을 남겼다. 질감으로는 단단한 양복천과 연약한 실크를, 색채에서는 회색, 남색과 같은 중성적이고 인공적인 색과 염색을 통해 만들어 낸 은은하게 번져나가는 유기적(organinc) 색이 대조를 이룬다. 작품 제목에서 석영은 특정한 시간, 압력, 열과 같은 여러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만들어지는 광물이다. 이처럼 예술작품도 우연적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만들어지는 것임을 은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장 가장 안쪽 끝에는 이희준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희준은 현대 주거 양식과 도시 환경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 속에서 비례와 균형, 긴장감과 편안함에 관해 생각해 왔다. 일상적인 풍경은 작가를 통해 추상화된 회화 언어로 번역되며, 대상의 색과 형태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작가는 서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비에이, 제주 등 여행한 여러 도시의 장면을 수집하고, 각기 다른 문화, 날씨, 사회, 경제적인 요소가 해당 도시의 건축과 풍경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베트남,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발견한 테라조타일을 서포트로 활용한 신작<유영하는 바닥>(2019)을 선보인다. 테라조는 대리석 조각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타일로, 이탈리아의 가난한 석공이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의 테라스를 꾸미기 위해 처음 만들었으며, 미국과 일본을 거쳐 국내에도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이 재료를 도끼다시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러왔다. 기존 작업에서 각 지역의 건축이나 자연에서 볼 수 있는 형태, 색의 특수성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여러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에 주목했다. 기존의 회화 언어는 일부 유지하되, 테라조 타일이 가진 재료적 특성을 살려 일부분은 테라조 타일을 노출하고 또 어느 부분은 가려지도록 했다.

 

세 명의 참여 작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페인팅 네트워크라는 주제를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전현선은 SNS와 온라인 환경 그 자체를 화면 내에서 은유적으로 다루고자 했는데, 이전 작업에서 개인의 경험이나 특정 상황, 풍경 등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선보였던 것과는 달리 주제 자체의 범주가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표현 방식 역시 대상에 걸맞은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다. 신현정은 1년이라는 정해진 시간동안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있으면서, 그곳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수집해 회화적 실험을 감행했다. 작품은 외관상 1970년대 프랑스에서 결성된 단체인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 Surface)의 작업과 같이 중성적 오브제처럼 보이지만, 독산동이라는 물리적 환경의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희준 역시 기존 회화 작품에서 잘 활용되지 않았던 재료, 테라조 타일을 이용해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지만 그 유래나 기원은 명확치 않은 상황을 보여준다. 기존의 작품이 실제 풍경이나 건축물, 인테리어의 선과 형을 가져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반대로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인테리어 재료 위에 기하학적 선과 색을 임의로 얹어 유영하는 바닥을 만들어냈다. 신현정과 이희준의 작업은 전시장 공간을 가로지르고, 또 바닥에 설치되어 관객이 직접 걸어 다니며 작품을 경험하도록 했다.

관객은 이들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회화가 다양한 종류의 네트워크 위에 놓여있음을 재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실험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나갈 것이다.

 

*<Painting Network>(신한갤러리 역삼, 2019.11.20~12.24) 도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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