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켄드 설치 전경 Photo by Jungsu Kim
함혜경 개인전 <보이스 오프> (2017. 6. 10~7. 9) 리뷰
철공소로 가득한 영등포 대로변에 캘리포니아 바다의 석양을 담은 사진이 붙어있다. 노래방 배경화면 같기도 한 이 ‘바다와 석양’ 사진은 아마도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흔한 이미지다. 그런데 영등포에서는 이 흔한 이미지가 생경하게 다가온다. 어렵사리 유리문을 당겨 안쪽으로 들어가려니 블라인드가 쳐져있어 진입이 쉽지 않다. 5평 남짓되는 작은 방에는 두 대의 텔레비전에서 재생되는 비디오 작품 두 점이 재생된다. 한쪽은 파란 줄무늬의 침대, 맥주가 가득 들어있는 냉장고, 회색 러그에, 공기청정식물이 노란 조명과 함께 놓여있어 마치 침실 같고, 흰 샤워 커튼 너머로는 세면대와 거울이 있어 화장실 같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마치 누군가의 방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관객은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걸터앉아 혹은 누워 영상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한다. 사적이고 편안한 공간에서 관객과 작품은 일대 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함혜경의 작품을 보고 있다보면,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하거나 혹은 진지하게 인생 상담을 털어놓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나를 위한, 너를 위한 이야기
이런 친근함은 함혜경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법한 일상적인 것이라는 데서 온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의 주제 의식이 여러 작품을 통해 꾸준히 발견되는데, 어느 때에는 직설적으로, 어느 때에는 은유적으로 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어떻게 살아갈지”와 같은 커다란 질문은 작은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의 개념은 종종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과 함께 쌍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시작과 끝, 가능성과 절망, 과거와 미래, 기쁨과 슬픔, 자유와 구속 등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하는 이야기는 묵직한 무게감 혹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함혜경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 이면에 흐르는 삶에 대한 생각들을 익숙한 이야기들로 쉽게 풀어내기 때문에 20~40대 젊은 층의 관객에게 큰 공감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고민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의 누군가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우리도 모두 겪었을 법한 일, 혹은 질문들 때문에 관객은 누구나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반추하며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여타 작업들의 경우, 일반 관객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함혜경의 경우에는 진입 장벽이 크게 높지 않다는 장점을 갖는다. 작가는 교조적이지 않은 발화 방식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자기 의심, 회의, 반성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일례로,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 성공할 수 있을까?” 와 함께 성공이란 무엇일까? 성공을 꼭 해야만하는가?와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흑백논리의 정반대에 위치한 그의 회색빛의 목소리는, 느릿한 전개 방식을 가진 프랑스 영화 같은 면모를 띤다.
작품 제작 방식 역시 그가 다루려는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영화, 음악, 소설, 예능,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들을 접한다. 그 중 작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인상 깊게 기억된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하나에서 작품이 시작된다. 그 파편들은 함혜경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되며 세포처럼 분열, 증식을 거듭하며 하나의 완결된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평면적인 서사 라인을 하나의 뼈대 삼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온라인 상에 공유된 무료 음악, 번역과 녹음, 자막 작업을 거쳐 그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작품이 종료되고 뒤 이어 흘러나오는 크레딧을 보면 대부분의 작품이 ‘1인 프로덕션’의 방식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촬영이나 편집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데에는 분명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러한 아날로그적 시스템을 고수하기 때문에 지속되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있다. 완성된 텍스트를 번역해서 외국어로 녹음하고 자막처리하는 것은, 아마도 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자란 특유의 감각, 보면서 동시에 읽어야하는 상황과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특히 목소리로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국어로 해당 언어를 쓰는 사람이 아닌, 제 2외국어로 그것을 추후에 습득한, 발음에 특유의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이러한 선택들이 모두 자신이 익숙한 감각, 혹은 취향을 집결시키기 위한 시도는 아닐가 추측해 본다.
함혜경 <나의 첫사랑> 싱글채널비디오, 사운드, 10:00, 2017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1인칭 시점의 목소리
이번 전시의 제목은 <보이스 오프(Voice off)>다. 시나리오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보이스 온(on-screen voice, 내화면 목소리)’은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이고, ‘보이스 오프(off-screen voice)’는 단순히 카메라 프레임 밖의 목소리이다. 카메라를 움직이면 화자가 포착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말하는 사람이 화면 안에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는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 안에 있기는 하지만 프레임 밖에 있는 것이다. ‘보이스 오버(Voice over)’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등장인물의 생각을 엿듣는 것 혹은 쓴 사람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편지 글, 나레이터의 서술 등을 의미한다. ‘보이스 오프’는 화자가 영상에만 직접 등장하지 않을 뿐이지, 그곳에 함께 있는 일인칭 시점이라는 점에서 ‘보이스 오버’와는 명백히 다르다. 화자가 읽는 텍스트가 전지적 시점의 나레이션이 아닌 1인칭의 독백 혹은 대화라는 점은 함혜경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나의 첫사랑>(2017)은 카페에 앉아 상념에 잠긴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1인칭 시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은 특정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화자가 자신의 경험에 관해 말한다. 그가 나지막히 이야기하는 ‘첫사랑’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게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을 다룬 이야기는 영상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나의 첫사랑>에서 카메라는 수평선, 푸른 하늘, 파란 벽, 바닷가 모래사장, 물이 빠져 텅 빈 수영장 바닥 등을 마치 스틸컷 이미지 처럼 뚝뚝 끊어가며 보여준다. 비슷한듯 상이한 각양각색의 쪽빛은 시원하면서도 외로운 분위기를 잘 표현한다. 영상은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부연 혹은 재연하는 방식으로 삽입되지 않는 대신, 화자가 혼자 길을 걸으며 우연하게 마주쳤을 법한 풍경 혹은 그것에서 전달받은 분위기를 담는다. 뒷부분으로 갈 수록 아웃포커싱(out of focus)되어 흐릿하게 보이는 영상을 사용하는데, 이는 풍경 자체보다 바닷물이 찰랑일 때 반사되는 빛의 움직임,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뭍으로 걸어나오는 뿌연 모습 등 보이는 대상을 그 자체로서가 아닌, 하나의 은유로 인지하고 숙고하게 한다. <나의 첫사랑>의 경우 텍스트, 영상, 음악, 목소리는 잘 어우러지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충돌한다. 관객은 작품을 관람하고 나서 명확한 줄거리를 이해하거나 특정 메시지를 전달받기 보다는, 노스탤직한 심상을 어렴풋하게 마음에 품게 된다.
샤워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는 전시장 안쪽에서는 <어둠이 사라지고>(2016)가 재생되고 있다. <어둠이 사라지고>는 영상이 없는, 텍스트와 목소리만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나의 첫사랑>에서 화자가 남성이었던 데 반해, <어둠이 사라지고>의 화자는 여성이기 때문에 마치 <나의 첫사랑>의 대상인 여자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사이에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쳐져 있는 샤워커튼은 매우 얆지만 불투명해서 커튼 너머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는 장치로 기능하며, 관계에서의 장애물 혹은 궁극적으로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어둠이 사라지고>에서는 영상이 없어서 마치 화자가 눈을 감고 생각하는 내용 같기도 한데, 이같은 영상의 부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도로 읽힌다.
함혜경의 작업은 작가가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논픽션(nonfiction)을 픽션(fiction)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하고, 또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다른 상황을 생생하게 접함으로써 공감 능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삶의 다양한 면모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연약한 나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담담하게 감당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 함혜경이 그의 작품을 통해 (자신 스스로를 포함한) 관객이 느끼기 바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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