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구 <Untitled> 40.9x53cm oil on canvas 2017
무엇을, 어떻게, 왜
: 전병구 개인전 <Afterimage>(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17.10.13~11.2) 리뷰
전병구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인 <Afterimage>를 보기 위해 전시장에 들어서면 약간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품의 크기가 작고, 작품 수도 아주 많은 편은 아니라 멀리서 한 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형태의 전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은 크기의 작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작품 앞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려 간다. 작품이 담고 있는 개별 이야기와,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할 때 활용하는, 캔버스 바닥이 살짝 느껴질 정도의 얇은 붓놀림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전시장을 몇 차례 돌고 나면, 작가가 붙인 전시의 제목처럼 그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회화 작품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을 그렸는지’일 것이다. 그런데 전시 출품작에서 하나의 회화적 주제를 발견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이, 그는 직접 찍은 사진, 영화의 스틸 컷, SNS에서 발견한 사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모으고, 그 중에서 작가에게 영감을 준 장면을 선택,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제작한다. 전병구가 회화에서 활용하는 소재는 매우 파편적이며, 실제 이야기와 거리를 둠으로써 팩트 자체를 전달하는 것보다도 전병구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재구성된 현실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둔다. 주차장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검은 승용차 한 대, 겹겹이 포개져있는 산등성이 사이로 살짝 보이는 굴뚝의 연기, 지하철 역내의 벽으로 보이는 곳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남자, 까마귀 한 마리 등 그가 그리는 소재는 작가를 둘러싼 일상 그 자체다. 동시대인이 이미지를 접할 수 있는 모든 방법-직접 경험, 사진, 인터넷, 영화-을 동원하며 도시 곳곳의 풍경, 인물, 동물이나 식물, 영화의 한 장면 등을 회화의 소재가 될 이미지를 선별한다. 일관된 주제의식이나 방향성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포착한 현시대의 이미지는 조용하거나 외롭고, 춥고, 느릿한 속도감을 전달한다.
‘무엇을 그렸는지’만큼이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렸는지’일 것이다. 이번 전시가 첫 번째 개인전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대학 졸업 이후 5년 여의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그렸다. 특히 <스펙테이터>(신한갤러리, 2017)에서는 <1996년> 시리즈를 비롯한 이전 작업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이 시리즈에서 전병구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면, 현재는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훨씬 자유로워진 듯 보인다. 작가는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착하지 않고, 면, 색, 질감 정도로 구분하여 빠른 속도로 화면을 채워나갔다. “기름이 마르기 전에 한 번에 그리기” “겹치지 않기” “하루 이틀 안에 한 작품 완성하기”와 같이 작가가 스스로 만든 규칙에 맞춰 표현 방식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방식은 변화된 주제 의식과도 잘 어울린다. 일상에서 마주한 다양한, 파편적인 장면의 인상을 전달하기에는 붓질에서 전달되는 빠른 속도감, 물감의 얇아진 두께감이 꼼꼼한 묘사 방식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전병구 회화의 특징적인 요소를 한 가지 더 꼽자면, 은은하게 누그러뜨려진 색감일 것이다. 강렬한 원색 대신 다운된 톤의 색채는 그의 회화를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게 하며 서정적 분위기를 더한다.
전병구 <Untitled> 53x72.7cm oil on canvas 2015
전병구 <비가 개다 The Rain Ceased> 53x72.7cm oil on canvas 2016
‘무엇을’과 ‘어떻게’를 잇는 다음 질문은 아마도 ‘왜’일테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장면들을 캔버스 위에 옮기는 것일까? 텔레비전, 인터넷, 영화, 광고…. 우리는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이미지를 마주하고 소비하며 산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접속하기만 해도 지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까지 모두 간접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여러 사람의 게시물로 이어지는 피드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며 새로운 사진과 글, 정보로 대체된다. 이 같은 삶 속에서 작가는 한 박자 쉬어가기를 시도한다. 자신에게 ‘잔상’처럼 남은 이미지를 전병구라는 프리즘에 투과해 다시 반사시키고, 그것을 캔버스 위에 옮긴다. 이후 전시장에 걸린 그의 작품은 관객을 만나 다시 한 번 굴절되고, 예상하지 못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잔상’으로 남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과 함께 느리게 걸어보기를,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한 떨기 진달래, 한 마리 까마귀를 바라보며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벅찬 순간들을 충분하게 누리기를 제안하는 것 같다.
작가는 여러 차례 회화 작품 내에서 ‘이야기’가 꼭 필요한가에 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원과 선으로 이뤄진 패턴을 그린 <Untitled>(2017)에서 그의 관심이 ‘이야기’를 담은 회화에서 근원적 요소들의 실험의 장으로서의 회화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이, 그것을 표현하는 서정적인 표현방식이, 회화의 기본적 요소를 다루는 추상적 회화 표면에서는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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