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께인가, 제니 조 작가의 연락을 받고 영등포에 위치한 예전 커먼센터로 운영됐던 공간에 다시 방문했다. 그때 당시 미술계 내 성폭력 등으로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데모가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룰즈>와 <사물들: 조각적 시도> 두 전시 오픈을 앞둔 상황에서 당장 공간을 오픈한다는 것은 부담이었지만, 불평 불만만 하지말고 재밌는 일들을 직접 만들어나가보자는 취지에 공감했기에 한 배를 타게 되었다. 2014년 전시 이후 영등포에 다시는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내가 그곳에 다시 찾아간 이유 중 하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것, 다시 직면하기 두려운 어떤 것에 맞서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2층과 4층도 비어있기는 했지만, 아무런 예산 없이 당장 무언가를 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던전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1층의 창고방 만을 정리하여 윈도우 갤러리 같은 형태로 활용하기로 했다. 구글 다큐먼트로 생각들을 공유하고, 공간 명칭을 함께 지었으며, 최종적으로 5주씩 총 8번의 작가 개인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로 하였고, 내가 6번, 제니 조 작가가 2번 전시할 작가를 초청했다. 내가 초대한 작가는 이환희, 이희준, 이사라, 함혜경, 전현선, 박아람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 넷과 영상 작업을 하는 작가 둘이었다. 나이대, 관심사, 작업 성향 등 모두 다양했다. <룰즈> 전시에 참여했던 이환희 작가 이외에는 모두 위켄드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일을 같이 해보게되는 작가들이었다. 지난 5-6여 년 간 기획 전시를 위해 리서치를 하고, 여기저기 전시를 보면서 눈여겨 보았던 작가들이었고, 연말에 작가들을 모두 직접 만나고 초대했다. 기획자의 관점으로 작가를 선택하고 초청한 형태였기 때문에, 예산없는 비영리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납득할만한 수준의 지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시 지원금은 50만원으로 책정하였고 이것은 나의 자비로 부담했다. 정부나 시의 지원을 받았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사비로 진행하였다. 8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었고, 개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개 그 50만원은 왕복 운송료, 전시장 조성비용(페인트, 조명, 의자, 카페트 등), 오프닝 다과, 사진 촬영 비용 등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썼다. 섭외 이후 작가들은 새로운 전시를 구상하거나, 이미 작업 중이었던 작품을 소개하기로 하였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으며, 나와 나정씨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작가의 계획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들여 전시를 함께 만들어나갔다. 작은 공간이었기에 대부분의 노동 역시 전부 직접했다. 운송, 설치, 페인트칠, 청소, 벽 다듬는 일, 카페트 깔기 등.. 진행에 있어서 모든 진행 과정, 기록 사진, 예산 내역 등은 드랍박스를 통해 모두 투명하게 공유했고, 연락은 공동 이메일로 했다. 판매 문의가 있을 때에는 작가와 직접 연결해서 직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제도권 내의 기관들의 경우는 예산은 넉넉치만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기회도 한정된 작가에게만 주어진다. 반대로 이런 자발적인 공간에서는 참여가능한 작가의 범주도 넓고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지만 제반 환경이나 예산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가능한 한도내에서 서포트하여 작가가 즐겁게 뭔가를 벌일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일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명을 꼽으라면 이나정씨를 말할 수밖에 없다. 뉴욕에서 긴 공부를 마치고 갓 귀국한 친구로, 처음에는 전시장 지킴이, 어시스턴트 정도로 생각하고 일을 같이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그의 역할과 비중이 커지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시급의 형태로 페이를 했으나, 사정이 마땅찮아 변변한 월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친구는 흔쾌히 자신도 제 3의 운영자로 참여하고 싶고, 월급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너무나도 고마웠고, 그래서 나는 내가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운 것들, 작게 나마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들, 노하우들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 외에도 우리는 2주에 한번 정도는 꾸준히 만나 함께 전시를 보러 다녔으며, 내가 아는 작가나 큐레이터 등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위켄드라는 이름에 맞게 주말 이틀만 오픈했는데, 오픈 시간은 1~6시였다. 이때 매번 전시장을 열고 닫고 지키는 것은 나정씨가 도맡아 해주었고, 한달에 한두번 정도 내가 나가 있었다. 우리는 작가 스튜디오 방문도 함께하고, 인터뷰 질문지 준비, 정리, 설치 등을 모두 함께 했다. 뉴스레터를 만들고 영문 번역 역시 나정씨가 해주었다. 처음 작가를 초청한 나만큼이나 나정씨에게도 동등한 양의 정보를 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지난 5~6여 년의 시간동안 크고 작은 조직에서 일하면서 실질적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정보만큼이나 현재 놓인 상황, 갈등의 양태, 비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등을 긴밀하게 공유하는 것이 함께 일하는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믿고 맡겼다. 일은 대부분 내가 직접하되, 맡긴 부분에 있어서는 그 친구를 믿고 잘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칭찬하려고 노력했다. 나정씨는 하나를 알려주면 두세가지를 해내는 귀인이었고, 지금도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있다. 연말에는 2, 4층의 공간에서 나정씨와 그의 동료 박혜린씨가 함께 기획한 <A Matter of Awareness>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나는 작가 추천을 해주기도 하고, 진행 과정에서 필요한 자료 샘플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쓴 글을 직접 첨삭하는 일도 했지만, 어느 순간 이 친구는 내 조언을 듣지 않을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일하면서 가장 싫었던 것은, 가르쳐주지도 않고 나중에 결과물이 나온 다음에야 평가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먼저 샘플을 주고, 진행 방식을 알려주고, 물어보는 것들을 충실히 가르쳐주되, 결과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지도록 믿고 내버려뒀다.
6명의 참여 작가들은 위켄드에서의 개인 프로젝트 전시 기회를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했다. 초청한 나만큼이나 그들도 많은 것을 투자하며 전시를 준비했고, 그래서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위켄드를 관심있게 보는 누군가가 생겼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들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일을 벌이다보면,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은 '빚'이다. 그것은 비단 금전적인 부분에서의 빚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도움을 다방면으로 준 여러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고 앞으로 계속 살아가면서, 이 일을 해나가면서 차근차근 갚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그 사람에게 직접 갚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 나처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한테, 내가 받았던 도움을 나눠주면서 살아갈 거다.
예산을 확보하고, 공간을 섭외해서, 기획한 전시를 선보이는 형태와는 달리, 한 공간에 정주해 있으면서 누군가를 초대하고,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전시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나에게는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시스템을 만들어서, 안정적이고 모두가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운영을 하는일은 꽤나 즐거웠다. 함께 일하지 않으면 새로운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보니까 이런 놀이터가 주어진 것이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운영진 사이의 지향하는 방향의 차이, 소통 방식에 있어서의 문제, 지속가능한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의 현실적 문제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한 6번의 전시를 모두 마치고, 운영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내년 1층 위켄드 공간은 박혜린, 김연우 큐레이터가 운영할 예정이라고 하고, 2, 4층의 공간은 다양한 작가, 기획자들의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색깔의 변화가 있을 것 같고, 그게 묘미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형태의 흥미로운 플랫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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