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연 <애드벌룬> 2017
주변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
: 양유연의 작품에 관한 단상
#1 두상과 손
잔뜩 겁에 질린 표정, 어딘가를 지긋이 응시하는 눈,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질끈 감은 눈…. 관객은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직업, 나이, 취향 등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단서는 모두 그림 바깥에 위치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클로즈업된 인물의 두상, 그 중에서도 눈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말을 할 때, 상대방의 눈을 응시한다. 눈을 바라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마음을, 감정을, 영혼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눈을 통해 상대방의 진심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누군가의 감정을 파악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는 행동에 주목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알려줄 때가 많다. 거짓말은 손쉽게 할 수 있지만,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은 제어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까. 양유연은 누군가의 손에 주목한다. 초조하게 바스락 거리는 손, 누군가를 부여잡고 울먹이는 손, 상대방의 얼굴에 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고 있는 손, 그리고 상처로 가득한 손, 각기 다른 손의 움직임에서 어떤 감정들이 전해진다. 두려움, 슬픔, 고독감, 외로움…. 우리는 까맣게 때가 낀 손톱 가장자리에서 고단함을 보고(<검은 물>, 2015), 빨갛게 변한 손끝에서 추위를 느끼며(<진심>, 2014), 군데군데 난 습진과 상처에서(<사소히 여길>, 2014) 에는 듯한 아픔을 전달받는다. 이렇게 양유연은 대상 자체의 물질적인 특성 이외에 그것에 담겨진 감정, 생각을 신체의 특정 부분을 통해 전달한다.
<무제1>(2017)에서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손이라는 소재를 표현하는 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손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챌 수 있도록 손 전체의 실루엣을 담았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상처 부위만을 더 확대하여 대상을 즉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했다. 습진에 바르는 흰 연고가 얼룩덜룩 묻어있고, 손바닥은 붉고, 노랗고, 푸르스레하여 색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들 같기도 하다. 그가 작품 안에 담은 대상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장치는 다른 작품에서도 더 발견할 수 있다.
양유연 <검은 물> 130.3x162.2cm 장지에 채색 2015 / 양유연 <진심> 41x53cm 장지에 채색 2014 / <무제1> 2017
#2 스포트라이트와 지우기
두상과 손은 대상에 지극히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 안에 담긴 감정적 요소를 화면 내에 담고자하는 시도였다면, 양유연이라는 렌즈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서 담은 풍경을 묘사할 때에는 조금 다른 장치가 작동된다. 하나는 특정한 부분에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비추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대상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뭉개는 방식으로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겨냥>(2015)은 <과녁>(2015)과 짝을 이룬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 관객이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정도에 명백한 차이가 생겨난다. 스포트라이트라는 이 연극적 장치는 미적, 심리적 효과를 높이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허수아비2>(2015)는 초기에 많이 제작한 마네킹 시리즈와 닿아있다. 마네킹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생명이 없는, 가판대에서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조장하기 위해 놓여있는 가짜 인간이다. 이들의 존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쳇바퀴 돌 듯, 영혼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상만 덩그러니 잘려 나뭇가지로 지탱되는 이 마네킹은 마치 꿈을 꾸는 듯 먼 곳을 바라본다. 이 작품에서 활용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 보다도 더 연극적으로 활용됐다. <결코, 이어지지 않는 길>(2016)에서의 스포트라이트는 실제로 어두운 이 건물을 통과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을 플래시라이트에 더 가깝다. 일상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불빛이 없어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그곳에 발을 내딛는 탐험가의 불빛 말이다. 이처럼 양유연은 작품 안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방식을 통해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거나, 무시되기 쉬운 주변의 시선을 부각시키거나,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양유연 <과녁> 64x99.5cm 장지에 아크릴 2015 / 양유연 <겨냥> 65.5x81.2cm 장지에 아크릴 2015
<서치라이트>(2015)에서는 여러 인물이 멱살을 붙잡고 실랑이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조연, 누군가는 못보고 지나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의 시선을 포착한다. 중심적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단순히 보도하는 형식의 사진과는 달리, 양유연은 무시되기 쉬운, 그의 존재 자체도 인식되지 못할 수 있는 누군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다수가 객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말하고 묻힐 수 있더라도, 양유연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이다. <빛나는 것>(2017) 역시 비슷한 맥락에 놓여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파편화되어있는 유리조각은 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다시 환히 반짝인다.
그가 작품 안에서 활용하는, 대상을 빠르게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방식은 ‘지우기’다. 양유연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 이외에도 온라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도사진을 레퍼런스로 삼은 작업도 했다. 각 작품의 원본이 된 이미지나 사건을 개별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관심을 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인천 동일방직 똥물 사건(1978), 윤일병 폭행사망 사건(2014), 세월호 참사(2014), 박근혜 하야 시위 광화문 집회(2016), 일본 다이지 마을 돌고래 학살 등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에 관한 것이다. 그 예로 <애드벌룬>(2017)과 <붉은 못>(2015)이 있다. 인물의 얼굴은 가려지거나 삭제되어 익명화되고, 공간이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단순화하거나 뭉뚱그려 느슨하게 분위기만을 전달한다.
양유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보도사진은 장지 혹은 순지 위에 먹과 아크릴 물감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한 층씩 쌓여 나간다. 그가 주목하는 대상, 그것을 화면 위에 구성하는 방식, 대상이 표현되는 방법 모두 한결같이 공통적인 성향을 띤다. 억압받거나 상처 입은 사람, 무시당하거나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의견에 차분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도 그다운 자연스러움을 띤다. 직접적으로 강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 즉각적으로 인지되기 보다는 조금은 천천히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상상하도록 한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이어지는데, 동양화를 전공한 양유연은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색을 더하면 종이가 일어나거나 찢어지기 십상이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렇게 여러 겹의 생각들이, 붓질이 층층이 쌓여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유연 <안개속> 2017
우리 모두는 바쁘게 살아간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숙고할 여유도 가지지 않은 채, SNS에 접속해 자신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떠들며 끊임없이 어딘가에 접속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목소리 큰 사람, 권력자, 다수로 묶여져 여럿에 의해 발언되는 말이 전부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공포, 외로움, 미궁에 빠진 듯 한 헛헛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경기창작센터의 잔디밭 풍경을 담은 <안개 속>(2017)은 어쩌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을,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할 사람은 오직 나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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