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1. 작가론

[작가론] 디자인과 미술, 그 경계에서: 맹성규(Maeng Seong Gyu)의 작업에 나타난 관습 해체의 방식

by ㅊㅈㅇ 2018. 7. 16.

디자인과 미술, 그 경계에서

: 맹성규의 작업에 나타난 관습 해체의 방식

 

최정윤

 

1. 현대미술가와 시각디자이너의 공생관계

2014년부터 현재까지 4년여의 기간 동안 신생공간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들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또 문을 닫았다. ‘신생공간1990년대 후반에 생겨난 대안공간과 비슷하게 주류라고 여겨지는 미술관이나 제도권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은 젊은 작가의 실험적 미술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일부 맥을 같이 한다. ‘신생공간들은 서촌, 영등포, 합정, 홍대, 공릉, 종로 등 다양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일반적으로 전시 공간, 갤러리가 밀집해있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기존 전시공간이 잡지사 광고나 오프라인 홍보를 했던 것과는 달리, ‘신생공간들은 저예산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홈페이지나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지 등 온라인과 SNS를 통해서 홍보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온라인 홍보를 위한 전시 포스터는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비단 신생공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미술관 전시나 비엔날레처럼 대규모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체 전시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의 역할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아트선재센터나 서울시립미술관도 홈페이지 리뉴얼을 하면서 전체적인 디자인 컨셉트를 바꾸기도 하였다. 이제 기획자/작가와 디자이너는 의뢰인과 전문가의 관계를 넘어서서, 전시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협업자 중 한명이 되었다. 또한 전시 포스터는 기존의 형식이나 구성에서 벗어나 디자이너가 자유롭게 자신의 색깔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전시 포스터는 더 이상 홍보를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2. 디자이너의 그리고 현대미술 전시

현대미술을 다루는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해 온, 디자이너면서 동시에 순수미술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누구나 쉽게 김영나, 진달래 & 박우혁, 슬기와 민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는 디자이너가 자신이 디자인 작업에서 주요하게 생각하는 시각적 특성이나 특유의 감각을 전시장이라는 3차원의 공간에 확대하여 펼쳐 보이는 작업을 선보이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특정한 주제의식이나 개념을 디자인에서 활용하는 방식으로 시각화해내는 경우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경우, 즉 내용을 전달하는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내용과 형식 모두 온전히 자율적 특성을 지향하는 경우를 살펴보려고 한다. 2010년 디자인그룹FF(민성훈, 장우석, 조성도, 최보연 등) <해치맨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들은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디자인 정책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FF 트위터, 미투데이, 그들이 만든 홈페이지 등을 이용해 시민들이 서울에 관해 생각하는 내용을 담은 창의적 문구를 받은 다음, 지하철, 버스정거장 등에 부착되어 있는 서울시 홍보포스터 위에 스티커로 만들어 부착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강남만 좋아요”, “한강에 나무 좀 그만 뽑으세요. 그늘이 하나도 없어요”, “souless seoul”, “서울은 추억을 허락하지 않아요”, “()색 성장등 재치있고 동시에 솔직한 문구들을 적어 보내왔다. FF가 가진 문제의식과 비판적 목소리는 시민참여의 방식과 디자인의 방식이 결합돼 효과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2012년 디자인그룹 제로랩(장태훈, 김동훈)<디자인은 잘못되지 않았다: 못된 디자인>전을 이태원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열었다. 이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왜 디자인은 항상 착해야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말 그대로 못된 디자인혹은 타락한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그들의 작품은 범죄를 돕거나, 개인의 사적 이득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버스 카드단말기에 카드를 댈 때 나오는 비프음과 동일한 소리가 나는 회로를 내장한 버스카드 지갑, 타인의 디자인에 기생하는 디자인, 고무밴드를 이용해 사람을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 등은 위악적 형태로 디자인의 의미를 곱씹어보도록 한다. 제로랩이 사용한 방법론은 디자인이 내용이나 기존의 쓰임에 항상 순응하거나 복종하는 착한특성을 갖는다는 기존 통념에서 벗어나, 오히려 디자인이 그것과 정 반대되는, ‘못된그래서 더 자율적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유도한다

2017년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슬기와 민의 개인전 <Perigee 060421-170523>에서 작가는 관객이 전시에서 기대하는 모든 요소를 기만하는 전시를 꾸린다. 다시 말해, 전시는 아무런 내용도 없고,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그들이 이전에 작업한 디자인 결과물들을 원작 크기 그대로 흐릿하게 변형시켜 아무것도 읽을 수 없도록 만든 작품을 설치하고, 작품의 제목을 늘어놓은 목록을 이미지를 대신해 전시하는 등의 일을 벌였다. 보통 전시에 있어서 디자인이라고 하면 전시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효과적으로 정보를 잘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있음을 감안한다면, 슬기와 민의 아무 발언도 하지 않는 포스터는 필경사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들이 놓여있는 시스템의 질서에 저항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FF가 선보인 사회의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더 나아가 변화를 촉구하는 행동주의적 프로젝트부터, 제로랩이 착한 디자인의 반대 개념으로 선보인 위악적 디자인, 슬기와 민의 기만하는 전시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디자이너가 선보인 일련의 작업을 살펴보았다.

 

3. 관습을 해체하기 : 맹성규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관계를 고려해볼 때, 흥미로운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가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서양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맹성규는 그의 작업 전반을 통해 기존의 상징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분리시켜 기존의 관념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인선 큐레이터의 기획전 <우로보로스 딴전에 빠지다>(2017, 우석갤러리)에서 맹성규는 <민방위 공>(2016)<민방위 색칠하기>(2017)를 출품했다. 민방위 깃발은 서울 내의 대로변을 따라 상당히 많은 수가 게양돼 있다. 그 자리에 항상 그렇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다. 민방위는 영어로는 Civil Defense, 전쟁뿐 아니라 자연재해에도 대처하는 광범위한 민간 방위 활동을 의미한다. 국가 보안과 관련된 이러한 사안에 관해 사람들은 얼마나 깊게 고민을 할까? 어쩌면 일상에서 민방위 깃발을 대하는 태도 정도로 이 사안에 관해 무심할는지도 모른다

민방위를 상징하는 로고는 세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색, 청색, 황색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삼각형이 겹쳐져 있다. 녹색은 해제 경보신호, 청색은 공습 경보신호, 황색은 경계 경보신호의 뜻을 가지며, 백색 바탕은 백의민족의 평화애호정신을 상징한다. 모든 상징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자의성을 갖는다. 맹성규는 이처럼 기호화된 이러한 상징을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인위적으로 부과된 의미들을 제거하고 색의 특성 그 자체만을 유희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세 가지 색의 삼각형은 하나의 패턴처럼 해체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 및 재조합된다. 맹성규는 이러한 패턴을 사용해 쿠션, 방석, 에코백, 우산 등을 제작하여 판매하고 관객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여러 사람의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용품으로 민방위 로고는 패턴화되고 인위적으로 부여된 권위, 혹은 의미를 자연스레 상실하게 된다. 사람들이 어떠한 상징을 보고 받아들이게 되는 문맥상의 의미와, 그것이 가진 물리적 특성을 분리시켜 그 의미와 실제가 사실상 별개의 것임을 관객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민방위 공> <민방위 색칠하기> 2017 / <봉봉황황> 2018


형식만 남기고 내용을 모두 소거하여 버리는 작업은 이전에도 진행한 바 있다. 2012년 제작한 <How to make 대자보, 화환, 셔틀줄 연설문, 현수막>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20128월 서울대 법인화 이후 노동조합의 반대 시위가 있었고, 석 달 뒤인 11월에는 그것이 모두 철거되었다. 맹성규는 시위가 종료 된 이후 그러한 시위가 있었던 동일한 위치에 내용이 모두 삭제된 현수막을 설치하는 작업, <how to make 현수막> 시리즈를 진행하였다. 현수막의 문구는 지나가는 차량 안에서도 읽을 수 있는 가시성 확보” “최소 13자에서 최대 22자로 통일” “문장이 길어질 경우 장평을 70%까지 줄이도록 합니다와 같이 디자인적으로 지켜야할 원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미론적으로 접근한다면 관객은 맹성규의 현수막을 보고 얼마 전까지 보이던 철거된 시위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며, 삭제되어 있는 내용 부분에 자신의 주장을 대입해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입장표명, 고발, 탄원 등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대자보, 현수막, 연설문의 구성의 관습적 요소, 전달 방식 그 자체가 가진 특성에 관해 고민해보게 하는 작업이다.

그의 첫 개인전 <상징: 두 개의 세모와 두 개의 동그라미>(2018, 우석갤러리)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관심사가 더욱 확장되어 표현됐다. 전시에는 총 네 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까치상징아카이브>(2017), <봉봉황황>(2018), <세계로 어댑터>(2018), <Red Materials>(2018).

<봉봉황황>은 작가가 대통령 표장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대통령의 표장은 봉황 두 마리가 마주 선 가운데 무궁화가 그려져 있는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봉황은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암수가 한 쌍으로 만나면 금실이 매우 좋아 성군의 출현이나 태평성대한 시대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때부터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수컷인 봉()과 암컷인 황()으로 구분되는 전통적 봉황의 모양과 달리, 대통령 표장에 새겨진 봉황은 봉의 꽁지에 꽃 장식을 더해 황처럼 화려하게 표현해 두 마리가 암수 구분 없이 동일하게 묘사되어 있다. , 좌우 대칭이 균형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상실한 형태이다. 실제 봉황의 모양에는 음양의 조화 상생의 의미가 있는 반면, 대통령의 표장은 그렇지 않아 봉황이 아닌 봉봉(鳳鳳) 혹은 황황(凰凰)이 되었다.[각주:1]

맹성규가 그의 작품 <봉봉황황>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의 표장 그 자체가 가진 의미애 대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대통령의 표장을 변형하여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다양한 양태에 대한 고찰이다. 대통령의 표장은 생각보다 더 우리 생활 가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구, 상패, 인증서 등에서 장식적 요소로 대통령의 표장을 일부 변형하여 적용,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받았던 상장을 떠올려본다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가진 권위, 인정에 대한 열망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요소를 활용해 일상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맹성규는 대통령 표장을 변형한 다양한 형태의 상징을 원본 이미지와 비교하면서, 포토샵을 통해 변형본의 형태에 맞추어 원본을 왜곡시키고, 모니터 상의 변형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녹화하여 왜곡된 이미지의 실물사이즈 프린팅과 함께 보여준다. 민방위 로고의 경우는 작가가 직접 그것을 해체하여 유희적으로 활용했다면, <봉봉황황>의 경우 맹성규는 이미 여러 사람에 의해서 대통령 표장이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해, 특정 상징에 내포된 의미적 맥락이 시각적 요소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현황을 드러낸다.

맹성규는 민방위 로고나 대통령의 표장과 같이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내포한 상징 이외에도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상징에도 관심을 둔다. 종교적 상징에 관한 관심은 맹성규의 개인사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개척교회를 이끄는 목사로, 기독교를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일해 왔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문화, 교회를 구성하는 상징적 요소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던 작가는 자연히 그것의 의미에 관해서도 되새겨보게 되었. <Red materials>는 교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붉은 색에 관한 작업이다. 제목에서 지시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네온 사인, 보드레 공단, 방염 카페트라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붉은 색을 띄는 재료가 같은 크기로 재단되어 액자 안에 구성되었다. 네온 사인은 첨탑에 설치된 십자가, 보드레 공단은 헌금 바구니의 안감, 방염 카페트는 교회의 강단 바닥재로 주로 사용된다. 각기 다른 재료이지만, 같은 붉은 색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각 재료 아래에는 그것의 사전적 정보를 텍스트로 기재하여 함께 보여주었다

<Red materials>는 박이소 작가의 <쓰리 스타 쇼>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박이소는 종이 위에 세 가지 다른 재료로 동일한 모양의 별을 그렸다. 그것은 커피와 콜라, 그리고 간장이었다. 세 가지 재료는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액체-물질로, 외관상으로는 유사하지만 맛이나 기능에 있어서는 완전히 상이한 특성을 가진다. 또한 작가가 재료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이전에는 관객은 쉽사리 구별할 수 없어, 작가는 할 수 있지만 관객은 해내기 어려운 어떤 일이기도 하다. <쓰리 스타 쇼>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맹성규의 <Red materials>는 세 가지 다른 재료를 그것의 사전적 정의와 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해당 재료의 문맥을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말하지 않으면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쓰리 스타 쇼>와는 달리, <Red Materials>가 세 가지 재료와 함께 제시한 텍스트를 통해 관객은 비교적 명확하게 종교적 맥락에서 인위적으로 부여한 상징과 실제 재료의 쓰임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들이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더 나아가, 종교의 본질 이외의 것들, 즉 사람들이 만들어온 관습이나 관례들이 허상임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Red Materials> 50x40cm each. 2018 / <세계로 어댑터> 2018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맹성규는 기존에 활용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상징을 해체하거나, 인위적으로 부과된 내용적 맥락을 모두 제거하고 형태가 가진 기본적인 특성으로 환원시키고, 더 나아가 색과 선과 형으로 구성된 조형 요소를 재조합해 유희적 태도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러한 그의 관심사가 종합적으로 반영되고, 더 나아가 제품 디자인의 필수적 요소인 사용 가능성까지 더해진 작업이 있다. 바로 <세계로 어댑터>(2018)라는 작품으로, 작가의 매우 사적인 관계와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개척교회 목사인 그의 아버지가 지은 교회의 이름은 세계로 교회. 종교적 의미로 사용된 세계로라는 단어를 맹성규는 실용적 오브제, 세계를 여행할 때 현지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녀야 하는 제품의 이름으로써 전용(轉用)한다. 이에 작가는 실제 교회 건축물의 외관을 그대로 차용하여 어댑터 모양으로 제작했다. 실제로 해당 오브제가 어댑터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매뉴얼에 따라 그것을 해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는 그의 개념적 이동 과정-기존의 것이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기능을 얻게 되는-이 실제 어댑터의 형태로 된 외피를 입고 실재가 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공식적인 로고를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에 대해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개념을 하나의 이미지로 시각화하는 과정에는 논리적 이론적으로 단단한 당위가 필수적이며 충분한 고증과 고민을 필요로 한다. 기성의 상징을 해체하고 기본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맹성규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이 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고찰해보게 된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비단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 편견, 관습에 관한 것으로 확장해서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당연함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문제점들을 들춰내어 공론화하고 함께 생각해보는 경험이야말로 동시대미술에서 작품이, 그리고 작가가 해야 할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1. 이승호, “봉황 대통령 표장, 봉황이 아니었네”, 중앙일보, 2013.2.4. http://news.joins.com/article/10592903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