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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1. 작가론

[작가론] 포스트프로덕션의 개념으로 본 황민규(Hwang Min Kyu)의 작품세계

by ㅊㅈㅇ 2018. 2. 27.

황민규 <2015:virtual odyssey>, HD video, 00:03:00, 2015: 스틸컷 / https://youtu.be/WJPXhBDWj4g


포스트프로덕션의 개념으로 본 황민규의 작품세계

최정윤

 

<2015: virtual odyssey>(2015)3분짜리 짧은 영상 작품이다. 내용도 구성도 어찌 보면 단순하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을 소재로 한 프라 모델을 열풍기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인다. 이 과정을 거꾸로 상영하는 영상에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메인 테마곡을 덧입혔다. 검은 배경에 놓인 건담,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강한 조명,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웅장한 선율까지 합쳐져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영상은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죽었던 건담이 부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후 작업들의 전주(intr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후에 제작한 일련의 작품에서 활용하고 있는 샘플링(sampling)과 리믹싱(remixing) 기법, 만화,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subculture)에 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문화를 순차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만화, 잡지 등 분야를 비롯해 공연,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확장됐다.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 출생의 젊은 세대 중 일부는 일본 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회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거주 지역, 성별, 소득 수준 등 여러 다른 요소로 취향은 세분화될 수 있다. 필자 역시 같은 세대임에도 일본 문화를 자주 접하거나 즐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의 독특한 특성이 동 세대의 시각예술 작가의 작품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례를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각주:1]

오타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 그 밖에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각주:2] 일본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아즈마 히로키는 그의 책에서 오타쿠 문화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면서 두 가지 특징을 주요하게 꼽는다. 하나는 동인지, 동인 게임, 피규어 등 원작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다시 읽어 제작하는 ‘2차 창작이다. 오타쿠들은 원작과 패러디를 같은 가치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현실과 관계없는 허구 중시의 태도다. 그들이 취미 공동체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규범이 기능하지 않아 다른 규범을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본다.

오타쿠의 정의와 특성을 살펴 본 이유는 황민규가 이후 제작한 <나를 지켜줘>(2017)가 일현 트래블 그랜트로 다녀 온 덕후문화 탐방기라는 테마의 여행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살펴보면 오타쿠적 특성보다는 포스트프로덕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니꼴라 부리요에 따르면, “포스트프로덕션은 서비스 산업 및 재활용과 연관된 일련의 행위로, 원재료를 생산하는 산업 영역이나 농업 영역과는 대조적인 제3차 산업에 속한다.”[각주:3] 다시 말해, 기존 작업을 바탕으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재사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예술가들은 이제 나무나 돌, 물감 같은 날 것의 재료를 활용하지 않는 대신, 이미 유통되는 오브제나 작품을 작업의 원재료로 삼는다. 황민규의 작품의 소재는 분명 오타쿠가 선망했던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각종 문화적 산물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마치 DJ가 기존의 음악을 리믹싱하는 것과 비슷하며, 이를 통해 던진 질문은 현실세계와 가상현실 사이의 경계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황민규 <나는 너를 지킨다>, HD video, 00:04:52, 2015: 스틸컷 / https://youtu.be/zgdfYXvZfoE 


<나를 지켜줘>(2017)<나는 너를 지킨다>(2015)와 대조되는 특성을 가진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두 작품에 흐르는 느슨한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작품명에서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레퍼런스는 다름 아닌 세카이계. 세카이(セカイ)는 일본어로 직역하면, 세계를 뜻한다. 이는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 일본 오타쿠계 매체의 각 분야를 아우르는 스토리 유형 중 하나로, 나와 너의 관계와 같은 작은 연결고리가 구체적인 설명이나 과정 없이 세계의 운명이나 세상의 종말과 같은 추상적이면서도 거대한 문제와 직결되는 작품 유형을 가리킨다.”[각주:4]나를 지켜줘나는 너를 지킨다는 마치 작품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말하는 대사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제목은 세카이계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의 전형적 특성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너를 지킨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기동전사 건담(1980), 마징가 Z(1972), 아키라(1988) 17편의 기존 작품에서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편집해서 새로운 문맥으로 직조해낸 작품이다. 황민규는 이 작품을 통해 저자라는 개념에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기존의 콘텐츠를 사용하되 자신만의 문법으로 새로운 발화를 이어나간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애니메이션의 장면들과 함께 각기 다른 사건 사고의 이미지를 깜박이며 중간 중간 노출시킨다. 각 문장과 장면들은 각기 다른 원작에서 가져온 파편들이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순서를 이루며 재편집되면서 452초짜리 영상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곳곳에 삽입된 현실의 영상 역시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가상세계와 큰 플롯 안에서 어색하지 않게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너를 지킨다>는 영상 작품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장면씩만을 만나게 되고, 관객에게도 파편적으로 전달된다. 관객은 영상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오랫동안 응어리가 지는 요소를 개별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모두가 적이라 부르는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 모두가 하라는 대로 이기지 않으면 안 돼.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 우리가 상대하는 놈은 흉악범이 아니야.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는 강인한 의지력을 가진 놈들이다. 양심의 가책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거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진정한 평화를 지켜나가는 일. 너와 함께라면 난 언제까지고 싸울 수 있다. 난 너를 지킨다.”[각주:5] 너무 큰 이야기이고 추상적이라 오히려 가볍고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누군가는 개똥철학이라며 코웃음 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의 개념이 유동적이었던 것처럼, 관객 역시도 수동적인 수용자의 역할을 넘어서게 되는 지점이다.


황민규 <나를 지켜줘>, HD video, 00:25:00, 2017, 스틸컷


<나를 지켜줘>(2017)2422초의, 황민규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긴 영상 작업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다름 아닌 작가의 아내이다. <나를 지켜줘>는 도쿄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찍은 수십여 개의 홈비디오 중에서 일부를 편집하여 모은 작품이다. 주인공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작가의 후편집을 통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나를 지켜줘>에서 역시 <나는 너를 지킨다>와 마찬가지로 짜깁기를 통해 만든 내러티브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녹음해서 영상에 덧입히는 기법을 활용했다. 아무런 감정 처리 없이 담담하게 읊조리는 대사는 작가의 편집 과정을 거쳐 애니메이션에 실제 등장하는 성우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하게 처리됐다. 대사의 80퍼센트 이상은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왔다. <나를 지켜줘>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직접 촬영한 영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대사와 영상이 물과 기름처럼 연결되지 않고 부유하는 경우도 많다.

<나를 지켜줘>는 작가가 도쿄를 여행하며 촬영한 영상 클립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20177, 도쿄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담고 있다. 황민규는 이 작업을 통해 허구(fiction)와 사실(fact)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다루면서, 이 둘의 경계에 관해 질문한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일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우에마츠 사토시라는 극우파 시민이 순결주의를 강조하며 장애인시설에서 환자들을 살인한 사건, 도쿄 도지사에 출마한 일본 우익 단체의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의 선거 유세, 1817년 고가쿠 일왕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일왕의 퇴위, ‘후쿠시마 프라이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지하철에서 후쿠시마의 과일을 광고하는 표지판, 지진 경보 발령, ‘포켓몬 고라는 증강현실(AR) 게임의 출시 등 황민규가 포착한 일본의 현실은 그야말로 혼돈 상태(chaotic) 그 자체다.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관객은 자막을 따라가며 작품을 본다. 기존의 영화와는 달리 텍스트와 영상이 유지하는 거리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돕는다. ‘세카이계의 장르적 코드를 가져왔기 때문에 더 풍부한 상상이 가능해 진다. 그러나 웅장한 배경음악이 사라지고 여자 주인공이 현실에서의 대화를 하는 오디오를 듣노라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계의 모습임을 다시금 깨우치게 된다. 리얼리티와 대안적 현실은 교묘하게 줄타기를 거듭하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리고는 어쩌면, 애니메이션에서처럼 누군가가 세상을 구원해주기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 속에서 황민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황민규는 기존의 작품을 재료로 삼아 현실의 새로운 층위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함께 고민해볼 것을 요청한다.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1. 돈선필(1984년 출생)의 개인전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시청각, 2016.7.14.-8.14)에서는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를 기반으로 새로운 조형물을 리-캐스트 하려는 시도를 선보였다. 김희천(1989년 출생)의 개인전 <홈>(두산갤러리, 2017.11.29.-12.23)에서 선보인 영상 작품 <홈>에는 <호-무>라는 제목의 가상의 애니메이션이 교차 편집되어 있으며, <호-무>의 팬이 ‘성지순례’를 하는 듯 보이는 구성을 가진다. 장지우(1987년 출생)는 <지우맨의 탄생>(커먼센터, 2015.8.7.~9.20)에서 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영상 작품은 특수촬영물이라 불리는 장르의 기법을 활용하여 제작됐으며, 작가 스스로가 슈퍼히어로 ‘지우맨’으로 분했다. [본문으로]
  2.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역,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p.17 [본문으로]
  3.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에서 사용되는 시청각 어휘에서 나온 기술적 용어다. 그것은 녹음 작업에 적용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몽타주, 다른 시청각 자료의 삽입, 자막 편집, 보이스오버, 특수효과 등이 있다. : 니꼴라 부리요, 정연심, 손부경 역, 『포스트프로덕션』, 그레파이트온핑크, 2016, p.17 [본문으로]
  4. http://namu.wiki/w/세카이계 : “세카이계 작품의 공통된 설정은 1. 멸망해가는 세계 2.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쌍의 커플 혹은 두 사람으로 구성된 주연 3. 오로지 그 주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이 세 요소가 꼭 들어가야 세카이계라 할 수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이 계열의 효시라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본문으로]
  5. <난 너를 지킨다>(2015) 중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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