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률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 2017, Oil on canvas, 140x150cm
자연스러움에 관하여
2018 난지비평워크숍_박경률
오늘날과 같이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요리사들은 좋은 재료를 구해 재료 본연의 맛을 찾는 데 열광한다. 숙련된 손길로 좋은 재료를 다듬어서 균형 잡힌 맛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깊이가 느껴지는 맛에 건강해지는 기운을 받는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화가 역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좋은 천, 나무, 못, 프라이밍 재료, 물감 등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자연과 가까운 재료를 찾아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붓과 물감, 천, 그리고 작가의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된다. 무더운 여름날 작업실에서 만난 박경률을 떠올리며, 그가 강조해서 말했던 ‘자연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 안에서 : 새로운 시간성의 창안
박경률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살펴보다보면 화면 구성방식, 채색 기법, 색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 반복하지 않는 대신,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람, 장소에 자신을 내맡겨 흐르는 물처럼 유동하기를 선택했다. 초기 작업이 비교적 배경과 대상의 구분이 분명하고, 꼼꼼한 스케치와 채색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완결된 닫힌 구조로 만들어졌다면, 현재의 작업은 정 반대에 가깝다. 그 예로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2017)를 살펴보면, 배경과 대상을 구분하기 어렵도록 다양한 층위의 레이어가 얼기설기 뒤얽혀 있다. 실질적으로 이 그림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애초에 기승전결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가 작품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하나의 긴 이야기보다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나간다. 옴니버스식의 구성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가 그리는 대상의 종류나 표현 기법 역시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화면 안에는 절단된 신체와 키보드 자판의 따옴표 표식과 같이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이미지들이 공존한다. 그가 그리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다양한 시대의 기법이 혼종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부분은 사실주의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그래픽 디자인과 같이 선으로만 처리하기도 한다.
위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는 시간과 닮아 있다. 모니터 위로 접하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손쉽게 넘나들며 순차적인 시간의 개념을 뛰어 넘도록 한다. 유투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왈츠를 듣고자 검색하면, 호치민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루마, 아마추어 연주가의 커버 연주까지 모두 한 화면에 펼쳐진다. 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수백 수천가지의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고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경률 역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여러 자산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사용하며, 작금의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간성을 작품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림 바깥에서 :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식 실험
하나의 작품이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는 특성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가능하게 했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인스톨레이션이 되면서, 하나의 회화 작품을 구성하는 것처럼 설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화이트큐브가 아닌 일상적 공간에서 그의 회화는 벽에 갇혀있지 않고 공간 구석구석으로 침투했다.
2017년 런던의 사이드룸(Side Room)에서 열린 개인전 <New Paintings>을 보면, 벽돌로 만들어진 오래된 벽과 자연광에 작품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벽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종이 작업이 알맞게 세워져있고, 프레임이 없는 천 작업은 테이프나 압정 등으로 벽면에 고정시켰다. 하나의 페인팅은 공간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인스톨레이션-회화가 된다. 사이드룸에서 공간과 평면 작업이 하나로 작동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면, 마담릴리갤러리(Madame Lillie Gallery)에서는 조각적 오브제로 공간 내에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시도를 했다. 세라믹으로 만든 물질-덩어리와 천, 나무, 흙 등 자연과 가까운 재료로 직접 제작한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다. 조각, 회화, 설치 등은 장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박경률에게는 더 이상 이와 같은 구분법이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각 매체가 가진 고유한 형식적 특성에 관한 관심은 2014년 커먼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 <2013GOHAP404>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오래된 텔레비전을 바닥에 눕힌 뒤, 불투명한 유리를 브라운관 앞에 씌웠다.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되었던 영상 이미지는 간유리를 통과하면서 희뿌연 색 덩어리로 변모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텔레비전의 역할을 흩트리는 제스쳐이다. 이때의 실험이 해당 매체의 본래 기능을 외부적 개입으로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2017년 이후에 나타나는 형식 실험은 끝없이 경계의 바깥으로 확장되어가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10여 년 이상 지속해온 ‘그리기’는 캔버스가 만드는 인위적 경계를 넘어 공간으로, 건축의 일부로 뻗어져나간다.
박경률 <New paintings>(2017)전 설치 전경 / <2013GOHAP404>(2014)전 설치 전경
다시 처음에 말했던 ‘자연스러움’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자연스럽다는 동사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 이상함이 없다’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는 뜻을 가진다. 자연이라는 명사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회화는 작가가 물리적으로 밀접한 접촉을 통해 만들게 되는 대상이다. 그러니 인간의 힘이 더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인간의 힘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때에는 무엇을 의미할까? 박경률의 작품을 보면, 사용하는 재료, 그리는 대상, 화면 구성 방식, 표현 기법, 그리고 조각과 인스톨레이션으로의 확장까지, 그가 내리는 매 순간의 결정은 상당히 일관된 기준을 따라 이루어져서 그 자체로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을 가진다.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그것들이 적절한 균형감각을 이루며 우리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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