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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 메모

<no curator> 답변을 준비하며..

by ㅊㅈㅇ 2017. 12. 12.

1. 가끔씩 무엇을 위해서 왜 전시 기획을 하는 지 고민할 때가 있다. 왜 할까? 예산과 공간 확보를 위해서 온 힘을 다 쏟고, 작가 한명씩 설득하고 이야기 듣고,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고 조율해야하는 데. 나에게는 보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다. 즐겁기 때문에 했고, 함께 했던 누군가가 그 이후에 또 다른 좋은 기회를 만나면 기쁘고, 그런 정도의 만족감이 있다. 전시 기획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자 일 할때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지금의 시점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뒷북인가? 아무도 관심이 없을까? 혹은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전시는 공적인 자리에서 뭔가를 펼쳐 내어 보이는 일이기 때문에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내 관심이 이렇다를 보여주는 것 말고도 외부적인 요인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2. 전시를 만들다보면 어떤 때에는 작가와 친밀하게 지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멀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주 가까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이 맡은 일에 전문성, 책임감을 갖고 각자의 역할을 해야하고 그것을 존중해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시간과 거리는 꼭 필요하다. 기획 역시 하나의 큰 작품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작품을 디스플레이하거나, 동선을 만들거나, 전시 디자인적 요소를 부여하게 될 때에는 큐레이터의 입장이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의 개별 작품 제작에 관여하는 것은 내 영역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작한 여러 작품 중에 특정한 기획에 맞는/출품해주었으면 하는 작품을 요청할 수는 있다. 신작 커미션의 경우에는 제작단계부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3. 전시를 하면 아티스트 토크, 관련 주제 세미나, 잘 만들어진 도록 등이 꼭 함께 따라오는 세트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전시를 여러 사람에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적 목적, 혹은 일회적으로 벌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속적인 기록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나 작은 규모의, 실험적인 움직임에서 저런 모든 것을 다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 미술관 규모의 큰 예산을 가진 전시의 경우에는 저런 부대행사들이 함께 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또 중요하겠지만, 모든 전시가 다 그래야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위켄드라는 영등포에 작은 공간을 1년여간 공동 설립하고 운영했다. 작은 공간이었고, 8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개인전의 형태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협소한 공간적 제약, 적은 예산 등 여러 이유로 출판물은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아카이빙과 SNS를 통한 홍보가 전부였으며, 글 역시 작가가 직접 쓴 작가노트와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공유했다. 

7. 전시가 이론적으로 중요한 어떤 요소를 정리해서 제시하는 장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학술 논문이 해야할 일이다. 나는 전시에서 감각적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며, 이론적 맥락, 틀거리를 단단하게 다 만들어두고 그 예시를 찾듯 작품을 찾아 끼워넣는 식의 기획은 재미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매 기획에 맞추어 작가 리서치를 충분히 하고, 그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가진 관심사를 종합적으로 듣고, 역으로 기획의 방향에 수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시의 주제에 맞게 작가 리서치를 하는 과정은 항상 매우 흥미롭다. 내용적으로 이해도가 높은 친밀한 작가와 전시를 계속 같이하게 되는 경우도 이해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편견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 동안 예상하지 못한 갈등과 괴로운 상황들도 많이 발생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다. 작가의 작품을 이론적 맥락과 연결지어 읽어내는 일까지 전시 기획자가 모두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일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9. 독립 큐레이터로 사는 일은 정말 녹록치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규모가 너무 커지면 감당할 수 없어지는 지점이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돈도 더 받고, 더 큰 규모의 일을 하는 거고, 작은 구멍가게에서 일하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대신, 의사 결정 속도도 빨라지고 그래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친 짓도 쉽게 할 수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수입원, 전시를 할 수 있는 예산과 공간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제도/기관에 소속될 수 있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도 긍정적이라고 본다. 대신 얻는 것과 함께 일부 포기해야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 9월부터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협력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글, 번역 업무 위주로 하고 있다. 내년에는 지난 6년 여의 시간동안 이 공간에서 진행해 온 작가, 전시를 촘촘하게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묶어낼 수 있는 주제로 기획전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다. 공간적 거점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0. 주목을 받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면, 그것에 영향을 받는 작가들도 있을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트렌드나 유행에 맞추어 작업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적 요소에 맞춰 나를 내려놓는 결정을 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개별적으로 가진 관심사를, 느리더라도, 천천히 자신의 속도에 맞게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도 마찬가지로 시의적으로 중요한 주제 못지 않게, 자신의 개별 관심사를 꾸준하게 발전시켜나가는 것 역시 필요할 것이다. 

11. 큐레이팅 피가 생겼으면 좋겠다. 작가들 역시 아티스트 피를 요구하고 쟁취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큐레이팅 피에 대한 인식이나 공감대는 매우 미미한 상태다. 공적 자금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경우, 돈을 주는 입장에서는 너가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할 수 있게끔 예산을 주는데, 너한테까지 돈을 줘야하냐? 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지원금을 받는다고 해도, 개인의 돈이 추가로 더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에 맞게 들어가는 시간과 노동력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합당한 금전적 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빠른 시일 내에 바뀔리는 없어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노동? 정신적인 노동?에 대한 보상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창의적 교육을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방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배명지 큐레이터 기획의 <역사를 몸으로 쓰다>는 교육적으로도, 전시 자체로도 아름다운 전시라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나올법한 중요한 작품부터 최근에 제작한 따끈따끈한 국내 작가의 작품까지 모두 담고 있는데, 동선의 구성이나 섹션 구분, 원형 전시장이라는 어려운 공간을 멋지게 잘 쓴 전시였다. 조선령 큐레이터 기획의 <무용수들>도 잘 짜여진 전시였다고 기억한다. 해당 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낸 좋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소현 큐레이터 기획의 <정글의 소금>은 한국-베트남 수교 기념전시라는 제약 안에서 작가 작품 사이의 흥미로운 연결고리들을 잘 엮어낸 좋은 기획전이라고 생각한다. 김현진 큐레이터 기획의 <gridded currents>도 기억에 남는다. 문유진 큐레이터 기획의 <의문형의 희망> 역시 모든 예술/미술 관련 종사자들이라면 고민하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가장 최근에 본 전시로는 신양희 큐레이터 기획의 <옥토버>가 있다. 오래동안 이어온 관심 주제가 전시의 맥락에서 흥미롭게 발현됐다. 

좋은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는 항상 즐겁다. 비난하는 방식으로 위계를 만드는 일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장점에 관해 말하는 자리는 더 더 늘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뭔지 모르겠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든 작업으로 이뤄진 전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주제의식이 명확하거나, 혹은 디스플레이 구현 방식/작품이 각자 발화하는 내용이 감각적으로/맥락적으로 잘 어우러지는 전시를 좋아한다. 

14. 큐레이터/평론가/작가의 구분이 이전만큼 명확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잘 해낸 사례가 많이 있다. 박찬경 작가/예술감독의 <귀신, 간첩, 할머니>는 멋진 기획전/비엔날레였다고 기억한다. 평론/글이 강점인 큐레이터도 있을 것이고, 작가이지만 기획력이 뛰어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기획자도 역시 이론적 기반이 든든한 writer 여야하고, 작가만큼이나 감각적으로 공간 구현, 작품 선정에 필요한 안목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6. 동시대미술을 역사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모두가 현재진행형으로 변화하며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당에 그것을 역사화..를 누가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미술사를 공부했다 하더라도, 공부한 내용을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활용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작가들과 주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현장과 이론을 연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내는 일은 정말 어렵다. 

18. "가장 중요한 큐레이터"가 누구인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왜 중요한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하는데, 그 기준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 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전시 기획자들 모두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모두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관심사를 전시로 만든다. 다양성의 존중이야말로 행복한 일이며, 더 건강한 생태계, 더 흥미로운 지형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똑같은 작가로 전시를 꾸린다고 해도, 기획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전시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동선의 구획, 디스플레이, 섹션 네이밍, 전시 타이틀, 글, 가장 단순하게는 각종 전기선을 정리한 모양새나 전시장의 청결도 까지도 디테일하게 차이가 난다. 전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완결도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지의 차이, 그것을 홍보하고 관객을 끌어들이는 능력, 예산을 확보하고 납득가능한 선에서 현명하고 윤리적으로 지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기획자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관이나 조직이 어그러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옳지않은 방향성을 가진 한 사람이 한 기관을 망치는 일은 매우 쉽다. 그 반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사람이 합심하고 노력할 때에만 가능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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