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허무:
PT&Critic Reunion <환상적인 부수물>전 리뷰
미세먼지에 황사까지 겹쳐 오매불망 기다려 온 꽃피는 3월은 봄의 초록이 아닌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었다. 환절기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일까, 병원에는 환자들로 가득하다. 물리적 환경이 주는 불편함과 갑갑함을 굳히기라도 하려는 듯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미투 운동, 전 대통령의 구속과 같은 우울한 뉴스들이 연일 업데이트되며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폐허의 상태에서 느끼는 멜랑콜리의 정서, 덧없음, 공허감은 어쩌면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삶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버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저축하여도 거주할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표류한다. 끊임없이 나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무한경쟁의 굴레에 스스로를 내던진 우리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탈출을 꿈꾸면서도 그 울타리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먹고사니즘’의 고민 속에서 우리의 부모 세대가 말하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 이런 사회 속에서 변상환, 한황수 두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미술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관객으로서 내가 이들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머러스한 성향이고, 또 하나는 허무함의 정서이다. 변상환의 <오감도>는 색맹과 색약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색신표의 형태를 차용한 작품이다. 주택 옥상을 방수처리 하기 위해 사용한 녹색 방수페인트를 물감으로 사용했는데,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네 개의 업체에서 만든 방수페인트를 활용해 그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비미므무기> 역시 시력 검사를 위해 만들어진 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래픽 리소스를 가져다가 일부를 확대 혹은 잘라내어 스텐실 기법으로 캔버스 천위에 옮긴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에 사용된 ‘물감’ 역시 방수페인트다. 유채 혹은 아크릴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평면 위에 옮긴 이미지마저 미술 바깥, 일상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그래픽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변상환 <오감도> 4사 방수우레탄 240x140cm 2018 / <Live Rust> 방청페인트, 종이 50x70cm 2018
플로랄 폼으로 만든 커다란 오브제 위에 방수페인트칠을 했던 변상환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활동 영역을 2차원의 표면으로 옮겨오면서, 재료가 가진 특성을 평면 위에서 펼쳐 보인다. 변상환은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대중적인 것과 고급스러운 것과 같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재료의 물질적 속성에 집중하여 유희적 충동을 적극적으로 실현한다. 이후 이어서 선보일 예정인 시리즈의 프리뷰 격인 작품 <Live rust>에서는 재료의 특성 이외의 다른 요소를 완전히 삭제해 나가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변상환은 자주빛의 방청페인트를 사용하여 종이 위에 기하학적 문양을 새기는데, 심지어 이 이미지는 건축 재료로 철근 콘크리트 대신 사용되는 H빔을 도장(stamp)처럼 이용해 일정한 간격으로 찍은 것이다. H빔과 방청페인트라는 조합은 실소를 자아내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허탈감을 준다. 관객으로서 내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제작방식과 사용한 재료에 대해 알고 난 이후에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황수 <나는 내게 배턴을 넘겼다> 디지털 프린트 2018 / <I mean> 애니메이션 2분 30초 2018
이번 전시에서 유머러스한 요소가 극대화된 작품은 한황수 작가의 <I mean>이다. 2분 30초의 상영 시간을 가지는 이 영상 작품은 각종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제작한 영상이다.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해보는 거야 … 갇히더라도 괜찮았다. 같이 있는 한. 내겐 큰 가치였으니”와 같이 오글거리는(!) 텍스트가 이미지와 함께 플레이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직접 라임을 맞춰 쓴 가사로 작가가 직접 음성 녹음하여 영상에 입힌 것이다. 화면은 매 장면 뚝뚝 끊어지며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 영상은 어찌보면 한황수가 가지고 있는 진지한 포부를 유머러스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황수는 나르시시스트적 면모를 드러내며 우울한 현실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낙관적 태도를 보여준다. 한황수 작가의 또 다른 출품작 <나는 내게 배턴을 넘겼다>는 각기 다른 세 영화에서 가져온 스틸 이미지들을 색과 형태에 맞추어 재배열해서 한 벽 가득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장면을 만든 설치작업이다. ‘탈출’이라는 큰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각기 다른 세 편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 <언더 워터> <덩케르크>의 스틸 컷 이미지를 모아 가상의 공간을 평면 위에 직조해낸다. 명확한 목적의식이나 비판적 태도를 가졌다기 보다는, 유희적인 태도로 포화 상태의 세계에서 주관적으로 추출해낸 이미지들을 재조합한다.
미술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작품을 마주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은 종종 실패로 귀결된다. 명확하게 독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변상환 한황수 두 작가는 끊임없이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해체하며 명확하다고 여겼던 특성을 흩트린다. 허공에 헛 발길질을 하는 듯한 헛헛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그런 태도, 그 유머러스한 감각에 전시를 관람하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잠시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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