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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경계를 흩트리는 몇 가지 방법: 황귀영 개인전 <협상 불가능한 관계들: 공덕동의 미확인 표식들>(2018.4.6~26)

by ㅊㅈㅇ 2018. 5. 4.

경계를 흩트리는 몇 가지 방법

: 황귀영 개인전 <협상 불가능한 관계들: 공덕동의 미확인 표식들> 리뷰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 안과 밖, 좋음과 싫음, 나의 편과 남의 편. 언어의 의미는 이항 대립을 통해 구조적으로 생성된다. 각각의 의미는 다른 용어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데, 일례로 영웅악당선과 악’, ‘사랑과 혐오등의 부수적 대립 쌍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언어를 통해 구조화해 놓은 개념적 구분은 우리가 실제로 사고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특정한 틀을 구조화하는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영웅은 항상 선만을 추구하는가? 악당은 항상 혐오의 대상이기만 한 것일까? 요즘은 히어로 이야기를 다루는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조차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사고방식의 편견을 깨는 플롯을 선보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혹은 현실을 반영한 픽션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황귀영 < 83을 소유하는가지 방법- 기록>, 설치, 5m x 4m, 2007-2010 /<비흔적을 표시하기2>, 장소특정적 설치각각 3m x 2m, 2012


황귀영 작가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매 프로젝트별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현장에 개입한다. 더 나아가 실천적 방식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83을 소유하는 세 가지 방법>(2007-2010)은 무단으로 농작물을 심어 먹는 주민과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 사이의 갈등 관계에 직접 개입하는 프로젝트이다. 주민과 정부의 관계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작가는 산83에 관상용의 꽃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주민들이 키우는 농작물도 아니고, 정부에서 조성하고자 하는 공원을 위한 나무도 아닌 3의 대안이다. 누군가와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꽃을 심었다는 점에서 공공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개인의 사적인 동기에 의해 심은 것이라는 점에서 주민의 입장과도 맞닿아 있다.

<비흔적을 표시하기2>(2012)는 건물 외벽에 무단으로 그려져 있던 그래피티를 관리인이 지운 흔적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황귀영은 이 흔적을 따라 벽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이것을 그래피티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동시에 이것이 그래피티를 연상시키는 기호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몰래 그려두었을 그래피티와, 그것을 원래 벽의 색깔도 덮는 행위 그 사이에서 작가는 지운 흔적을 반복하며 그것이 그래피티인지 아닌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정부와 주민, 그래피티 아티스트와 건물관리인과 같은 상반된 입장을 가진 두 주체 사이의 갈등 관계 속에서 황귀영은 견고하게 나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것을 흩트리는 실험을 지속한다.

황귀영 <공덕동의 낙서들_1. 네트워크를 바라보는 시선들>, 영상, 2017

이전 작업에서는 경계에 맞닿아 있는 양쪽의 입장이 비교적 명료하고 확고했다면, 이번 전시 <협상 불가능한 관계들: 공덕동의 미확인 표식들>(2018)에서 다룬 재건축 이슈에서는 관계망이 더욱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때문일까, ‘마인드맵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복잡한 관계망을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영상 <공덕동 뉴스+네트워크를 그리기>는 칠판 위에 분필로 작가가 해당 이슈와 관계있는 여러 주체의 이름을 쓰는 과정을 담는다. 작가는 집주인, 부동산, 재건축 조합, 구청, 건설사, 언론사와 같은 객관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개인/집단을 흰색 분필로 적었다. 흥미로운 것은 노란 분필로 적은 주변적 요소들인데, 이것은 매우 사적으로 진행한 인터뷰나 진행 과정에서 알게 된 사람이나 사건, 장소와 관련한 것으로, 일례로 이사할 곳을 찾지 못해 지리산 쪽으로 이사 간 경우에서 지리산을 적었다.

 

황귀영 <경계 표시하기>, 사진, 가변크기, 2018

<경계 표시하기>는 재건축이 이뤄지게 될 공덕동의 한 지역을 지도 위에 표시하고, 해당 경계 지역에 작가가 실질적으로 방문해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경계선 안과 밖의 모습은 현재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슷하지만, 재건축 사업이 진행되고 난 이후에는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자기 삶의 흔적 일부로 일상적인 물건을 하나를 선택하고,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위에 올려둘 것을 요청했다. 참여를 원하지 않을 때는 플라스틱 의자를 뒤집어 둔 채로 촬영했고, 어느 한쪽이라도 참여를 수락한 경우 파란 의자 위에 오브제를 얹어두고 사진을 남겼다. 물건을 선택하고 촬영하는 등 작가라는 외부인이 인위적으로 마련한 기회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될 이웃과 일시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미확인 표식들 1><미확인 표식들 2>는 작가가 지역 주민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한 경우이다. 작가는 재건축이 실제로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세입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 속에 놓여 있는 사람만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세입자는 분명히 재건축 이슈에서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직접적인 이득을 얻을 가능성 역시 전혀 없지만, 큰 틀에서는 삶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작가는 <미확인 표식들 1>을 통해서 찬성과 반대의 명확한 견해가 있지 않은 누군가의 생각을 공적으로 가시화한다. “누구의 공간인가”, “나는 보증금을 원하는 날짜에 무사히 받을 수 있을까?”, “하자고 할 때 대세를 따라야 피해가 최소라는 부동산 아저씨의 논리는 이상하다”, “이웃 간의 정이 무엇인지는 어려운 문제다등의 문구들을 현수막의 형태로 출력해서 작가가 거주하는 집 베란다 앞에 걸었다. 일반적인 현수막에서 볼 수 있는 눈에 잘 띄기 위한 색이나 형태를 취하지 않는 대신, 무채색의 배경에 흰색으로 문자를 출력했다. 이것은 명확한 청자에게 강하게 내지르는 목소리라기보다는 조용하게 읊조리는 혼잣말처럼 부유한다.

<미확인 표식들 2>는 좀 더 직접적으로 작가와 지역 주민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작가는 화환의 형태로 꽃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각기 다른 문구들을 출력해서 선택한 재건축 지역의 건물 앞에 배달했다. 해당 화환 안에는 편지가 첨부되어 있고 원치 않는 경우 5일 뒤 같은 장소에 꺼내두면 다시 가지고 가겠다는 문구를 적어두었다. 화환에는 일반적으로 건설사가 보낼 때나 쓰여있을 법한 꿈과 희망을 함께 이루어내겠습니다” “사업시행인가를 축하드립니다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는데, 실제로 재건축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수신자의 입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작가가 선택한 이 일방적인 소통의 시도는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불편할, 어쩌면 기분 좋을 깜짝 이벤트가 된다. 황귀영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찬성도 반대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자신이 놓인 솔직한 위치를 노출시키거나, 고착화된 권력구조나 경계를 흩트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귀영 <미확인 표식들1>, <미확인 표식들2>, 사진, 가변크기, 2018

누군가는 단순히 경계를 흩트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행동주의적인 작업처럼 사회에 직접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질적 효용의 측면에서 누군가는 아무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고 작가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듯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귀영의 이러한 시도는 사실상 행동의 윤리적 태도나 특정 이슈에 관해 가져야 하는 입장에 대해 교조적으로 전달하는 것과는 정반대에 있다. 의미는 항상 변화하고, 불안정하며, 항상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어진 구조에 갇혀서 보지 못하는 쉽게 잊히거나 가려진 영역에 빛을 비추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작은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둘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된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면 어쩌면 이분법적인 상황을 얼른 받아들이고 이쪽인지 저쪽인지 노선을 확고히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서 황귀영이 하고자 하는 일은 자유롭게 사고하는 일. 숨어있던 목소리를 찾는 일,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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