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플라토미술관 부관장인 안소연 선생님의 수업 <전시 기획과 미술관 연구> 수업을 이번 학기 듣고 있다. 기획 방법론을 배우고 싶다기 보다는, (어차피 일정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이 궁금해서 들었다. 오랜 실무 경험을 통해서 우러난 이야기들을 정말 상세하게 들려주셔서 공감도 많이 되고, 정리도 되고 즐겁다. 40명이나 듣는 석사 수업이라 기말 페이퍼는 별도의 발표 없이 제출만 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매 수업 두세 명의 학생이 최근 본 좋았던 전시에 관해 말하는 짧은 발표가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몇 명 안되는 박사들이 먼저 발표 스타트를 끊었다. 또 나는 1번.
어떤 전시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기획을 하려는 동료 혹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지 몇 일정도 고민했다. 이것은 앞으로 내가 전시를 어떻게 기획하는 것이 좋을까 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기획한, 혹은 공동기획한 전시는 대부분 미술 안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었고, 작가의 원래 작업 맥락을 대부분 그대로 반영하는 식의 전시였다. 서베이쇼 혹은 장르쇼.
하지만 전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큐레이터의 작품 같이 느껴지는 전시의 종류는 모름지기 주제전이다. 큐레이터가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셀렉 혹은 새롭게 커미션한다. 주제는 미술 안의 주제가 아닌 경우도 많다. 미술사나 문화 이론은 기본이고, 그에 더해 뉴미디어, 건축, 디자인, 과학, 음악, 무용, 사회, 정치, 경제, 법학 등 다양한 삶의 경험과 연관된 다른 주제와 투 트랙으로 함께 가는 경우다. 나는 이런 주제전을 기획해본 적은 없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미술 이외의 주제 중에 내 삶을 바쳐 몰두하고 싶은 주제를 확정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있다해도 얄팍하고 가볍게 이용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발표에서는 잘 만들어진 주제 기획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선정작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독립 큐레이터들이 기획안을 만들고 피티를 해서 7:1 이상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전시들이기에 꼭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열린 5개의 전시 중에는 세 전시를 보았는데, 그것들은 <개성공단>, <베틀, 배틀>, 그리고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선정작
18.7.6~9.2 박계리 <개성공단> 문화역서울284
18.7.6~29 김영호 <한국 근대조각 100년: 한국 근현대조각의 미의식> 김세중미술관
18.8.9~9.9 조주리 <베틀, 배틀> 토탈미술관
18.8.15~24 김장연호 <대항 기억과 몸짓의 재구성> 공간41
18.9.13~26 권주연, 류정화, 송가현, 안현숙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 돈의문박물관 마을
18.10.5~26 권혁규 <이브> 동대문구 왕산로 9길 94
18.10.17~11/11 장혜정 <세 번 접었다 펼친 모양> 브레가 아티스트 스페이스
18.11.15~12.20 김장언 <장르 알레고리: 조각적> 토탈미술관
18.12.19~19.2.3 이성휘 <옵세션> 아르코미술관
18.12.19~19.2.3 이단지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 아르코미술관
<개성공단>은 잘 만들어진 전시였으나 오픈 직후에 봐서 기억이 좀 가물가물..했고,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은 소장품 전시 같은 형태라 주제기획전으로 소개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전시장에 들렀을 때 우연히 조주리 큐레이터를 만나기도 했고, 전시도 좋았던 터라 자료를 요청해서 발표를 준비했다.
전시 제목 <베틀, 배틀>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의복과 직물을 다루고 있다. 영문 제목은 Looms & Battles.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통 길쌈과 식민지 방직노동에서 동시대 글로벌 패스트 패션까지, ‘베틀’(Loom)로 상징되는 직조와 의류 생산의 낡은 사슬과 폐허의 풍경들을 비추어 보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연구자와 창작자, 제작자들의 삼각 연대 속에서 탄생한 일종의 집합 브랜드인 <베틀, 배틀>을 플랫폼으로 하여, 각 팀은 저마다의 시급한 사회적 쟁점과 예술적 제작론을 결합시켜, 새로운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를 전개해 나가는 일종의 옷 만들기 ‘배틀’을 벌이게 된다."
참여작가는 이네스 도우약 (Ines Doujak, 오스트리아 기반), Studio SOL(네덜란드 기반), 이완, 언메이크 랩, 전소정, 조은지, 흑표범, 홍진훤, 신제현, 자유연구모임:외부입력(Ex/In). 총 예산은 6500만원. 조주리 큐레이터는 아르코미술관 <2의 공화국>(2013), 탈영역 우정국 <리서치, 리: 리서치>(2016)을 비롯하여 동경국제도서전의 주빈국 주제전(2013), 국립해양조사원 해저지명특별전(2013), 부산 아세안문화원 개원전(2017) 등을 기획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투명한 비닐 가방에 연구 책자와 전시 부클릿 등이 들어있었는데, 마치 쇼핑몰에 들어가듯이 비닐백을 하나씩 들고 전시를 관람하도록 했다. 수많은 책자와 종이들로부터 관객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전시 관람 이후에는 반납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작품은 최종적으로 옷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디스플레이 되었다. 옷을 직접 만들 수 없는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는 디자이너나 다른 협업자와 함께 작업을 한 듯 보였다. 작품들은 대부분 이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처럼 보였다. 옷과 관련되어서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페미니즘과 치안의 문제, 대통령의 의복, 옷을 통해 구별되는 계급의 문제, 패스트패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 브랜드의 역사 등. 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화하고 있었다.
보도자료에서 발췌한 작품 설명 문구이다. "조은지 x 쉐장 <대통령은 사랑을 위하여> : 작가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대통령을 함께 꿈꾸고 기다리며 그/그녀를 위한 사계절 두루 입을 수 있는 SSFW 만능 노동 정장을 제안한다. / 흑표범 x Jeune June <선영, 미영, 미영> _ 한국의 공포영화와 방화 속 여성 귀신의 소복치마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을 위한 현대적인 보호막으로 재탄생 시킨다. / 전소정 x 코이노니아 <황제의 새 옷>_ 실용과는 거리가 먼, 귀족의상의 장식적 디테일과 단순한 노동복의 형태를 상호 교차시킴으로써, 그 경계와 구분을 부러 흩뜨려 놓는다. / 이완 x 소피 안 <유니콘 프로젝트 1> _ 증권시장에서 주가 1일 상승제한 폭에 가장 가까운 % 수치인 '29.98'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브랜딩한 <29.98>은 브랜드 내의 각종 상품을 통해 자본주의 내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 홍진훤 x 물질과 비물질 x 정진욱 <알 x 스튜디오 에세이 (R X Studio Essai)>_ 실존하는 여성 사회운동가들을 어쩌면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업의 표면으로 호출해 낸 사례이다. 그러나 익숙하게 보아온 운동가들의 현장 사진 대신, 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일곱 모델의 대형 포트레이트가 관람객을 응시한다. / 이네스 도우약(Ines Doujak) <신중국 비단길> _ 현대 브랜드의 역사를 유럽의 가문 문장을 기점으로, 식민지 시기 유산계급으로 떠오른 척식 회사 출신의 부유층이 두른 가짜 문장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 스튜디오 솔 <스튜디오 50L> _ 기발한 방식으로 재 정의해 낸 점퍼, 모자, 앞치마 등의 개념적인 의상은 사람 사이의 관계, 신체와 옷, 사물과의 관계 등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며 그것을 조금씩 바꿀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전시가 좋았던 이유는 첫번째로 미술과 패션 이라는 투트랙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두 분야 모두에 대한 진지한 선행 연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전시를 위한 사전조사연구 기금을 2017년에 받고, 2018년에는 전시 지원금을 받아 이러한 탄탄한 기획이 진행되고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1) 백색 광시곡 (조주리), 2) 마르지엘라:레디-투-커버(정진욱), 3) 한복(이정은), 4) 반드시 차림새를 갖추시오(이야호), 5) 100억불 수출의 선봉, 한국 방직산업의 뒤안길(최호랑), 6) 수정과 진주(이수진), 7) 입혀진 말들에 관하여(남기웅) 총 7인의 연구자가 자유연구모임 외부 입력(Ex/In)이라는 이름으로 <베틀-북>이라는 출판물을 기획하고, 사전 콜로키움을 열기도 했다. 전시가 열리고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워크숍이나 토크가 아니라, 전시를 위해서 사전 연구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었다.
두번째로 디스플레이나 전시장 구성 등에 있어서 패션이라는 또 다른 주제적 요소를 잘 시각화했다는 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투명 비닐백도 그랬고, 선반에 올리거나 행어에 걸거나 마네킹에 입혀두거나 하는 등 백화점 옷가게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디스플레이 방식을 가져와서 여기가 정말 미술관이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더 나아가 각각의 작가들 역시 기획자가 제시한 주제의식에 공감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선보였는데, 그 역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마치 개별 옷 브랜드인것처럼 모든 팀이 브랜드 로고를 만들어서 전시장에 일부 삽입하였는데 그 역시도 잘 어우러졌다. 기획자와 작가 간의 소통이 얼마나 긴밀하게 오래동안 이루어졌는 지 가늠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의 잘 컨트롤 된, 기획자의 '작품'으로서의 전시였다.
그러나 단단한 주제전일수록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단점도 있다. 개별 작가를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몇몇 작가는 원래 하던 작업과 긴밀한 연장선 상에 있는 작가도 있지만 조금은 그 연결고리가 느슨해보이는, 일시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작가도 눈에 띈다. 그리고.. 각 작가들의 작품 결과물이 옷이라는 형태로 대부분 나오다보니까, 전시장 안에서 시각적 구성요소들이 일견 비슷비슷 해보여 자세히 설명을 읽거나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단조로워보일 수 있기는 했다. '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워낙 많은 돈과 인력과 시간 등등 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나 웹페이지로 기획물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로 만들어질 때에는 현장에서, 해당 공간과 만나면서 촉발되는, 뭐랄까 예상하지 못한 시너지 같은 것들을 기대하게 된다.
전시 이미지가 궁금한 사람은 이 글 상단에 첨부한 PDF 파일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조주리 /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이자 시각문화연구자다.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에서 심리학과 미술사(History of Art, MA)를, 런던시티대학에서 문화정책과 경영(Cultural Policy, Management, MA)을 공부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Design History and Cultural Studies) 전공과정에서 박사 연구를 수료하였다. (Ph.D Candidate) 학계와 현장을 오가며, 미술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일들과 개인적 관심사를 반영한 전시, 연구 프로젝트들을 함께 실천해오고 있다.
'Art > 3.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록]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강남아파트 18동, 2018. 4. 27~5. 8) (0) | 2018.09.28 |
---|---|
[전시리뷰]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8.4.7.~7.8) 리뷰 (0) | 2018.08.03 |
[전시리뷰] 치유의 시간: 박지훈 개인전 <뜨거운 공기 · 차가운 악기들>(2018.7.13~8.3) (0) | 2018.08.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