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지원금(2100만원)을 받아 노해나 독립큐레이터가 기획한 <스테이트 포인트>라는 전시가 올해 11월에 열린다고 한다. 전시 사전연구 단계로, 참여 작가와 기획자가 함께하는 소규모 비공개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그중에서 나는 단행본 <레트로마니아>를 중심으로 무시간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 발표했던 글 2장 어딘가에 인용을 했던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도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서 급하게 다시 읽어봤다. 음악 이야기이지만, 어려운 이론적 이야기보다는 실질적인 경험과 삶에서 우러난 통찰에 관한 얘기들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음악을 미술로만 바꾸면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 분야에서도 분명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최성민님의 번역과 디자인이 또한 모두 훌륭해서 소장용으로도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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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
사이먼 레이놀즈. 1963년 런던 출생. 맨체스터에서 유년기를 보냄. 1970-80년대 대중음악에 정통한 평론가로 유명세를 얻었다. 펑크, 포스트 펑크, 레이브 파티문화, 힙합까지 다뤘다.
프롤로그-뒤돌아보지마
문화가 노스탤지어에 매달려서 앞으로 나갈 힘을 잃은 걸까, 아니면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결정적이고 역동적이던 시대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걸까? 상업성이 입증된 과거 히트작을 재가공, 20-30년전 영화를 블록버스터로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 대중의 애착에 호소한다. 패션 산업에서는 이제 옷장을 뒤적이는 일이 언제나 불가결했지만, 지난 10년 사이에는 흘러간 아이디어를 재활용하는 주기가 매우 짧아졌다.
2000년대 주류 팝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향 중에는 재활용에 의존한 예가 많았다. 한때는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적 음악을 생산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지금은 가장 과거에 깊이 중독된 집단이다. 그 역할은 이제 선구자나 혁신가가 아니라 큐레이터나 아카이브 관리자가 됐다. 전위가 아니라 후위가 된 셈. 이제 음악 뒤에 쌓인 과거의 질량이 중력처럼 작용한다. 이제는 굳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방대한 과거로 돌아가기만 해도 어딘가로 이동하고 움직이는 느낌을 얻는다. 탐험 정신은 여전하지만, 그 모습은 고고학을 닮았다.
2000년대 음악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미세 경향과 하위 장르와 재조합 스타일로 여러 면에서 미친 듯 북적였다. 방대한 문화 자료를 저장, 정리, 취득, 공유하는 능력이 향상되면서 우리 자신이 그 능력에 희생당한 꼴이다.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했던 사회가 없었던 것처럼, 가까운 과거를 이토록 쉽고 풍성하게 접할 수 있는 사회도 전에는 없었다.
‘오늘’
1. 팝은 반복된다
아카이브 열병은 오늘날 광정으로 벌어지는 기록열을 포착한다. 그 열벙은 관련 기관이나 사학자를 넘어 웹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아카이브 창작 열풍으로까지 확대됐다. 마치 어떠한 총체적 셧다운이 일어나 만인의 뇌가 타버리기 전에 정보, 이미지, 수집물 등 만물을 올려놓으려고 미친 듯이 돌진하는 모양새다. 특히 인터넷에서 아카이브는 아나카이브(anarchive)가 되어간다. 아카이브가 온전하려면 여과와 배제를 통해 잃어버리는 기억이 있어야한다. 역사에는 쓰레기통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 자체가 쓰레기통이 된다.
2. 토탈 리콜
유투브에서 끝없이 자라나는 집단 회상 미로는 디지털 기술이 촉발한 기록 과잉의 위기를 무엇보다 잘 보여준다. 문화 자료가 비물질화 하면서, 그것을 저장하고 분류하고 사용하는 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텍스트, 이미지, 소리 압축 기술 덕분에 이제는 저장공간이나 비용 걱정없이 가치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까지 보존할 수 있다. 사용자 편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 노래, 믹스 테이프, 텔레비전 녹화 영상, 빈티지 잡지, 도서 삽화와 표지 등의 자료를 빠르고 편리하게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뭐든지 한 번 웹에 올라가면 대부분 그곳에 영원히 머문다.
유투브-위키백과-아이튠스-래피드셰어-스포티파이 시대에 우리와 시공간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거리와 지연은 거의 무에 가까워졌다. 유투브는 해당 업계를 대표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하루 접속자수는 20억 명에 이르고,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방문자가 많은 웹사이트가 됐다. 한 개인이 유투브에 실린 동영상을 모두 보려먼 1천 7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음악적 관점에서 유투브를 관찰하면, 1) 유투브가 한때는 골수팬 사이에서 보물처럼 거래되던 희귀 텔레비전 방영물이나 해적판 공연 영상을 위한 저장소가 됐다. 2) 팬들이 동영상 아카이브의 상당부분을 순수 오디오 자료로 변형했다. 마치 공공 음악 도서관을 닮은 형태가 된 것이다.
엄청나게 향상된 접근성, 질보다 양을 우선하는 방대한 온라인 아카이브가 있다. 보는 사람은 스크롤바를 조작하여 더 좋은 부분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참을성과 집중력을 암암리에 갉아먹는다. 인터넷 전체가 그런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시간 감각 역시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워 진다. 유투브의 사이드 바는 이런 표류를 더욱 부추긴다. 현재 영상과 관계있는 영상목록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브라우징과 채널 서핑 중간의 지점에서 건성으로 무심하게 시청한다. 이런 표류는 아티스트에서 아티스트로, 장르에서 장르로 옮아가는 표류뿐만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는 여행도 포함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영상이 난잡하게 뒤섞여 그물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시간 자체를 곤죽이나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MP3을 발명한 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악을 집중해 듣지 않고, 이상적 환경에서 듣지도 않는다는 점을 계산했다. MP3은 대량 유통, 가벼운 감상, 대량 축적을 위해 디자인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음악의 패스트푸드에 해당하는 MP3은 순식간에 변하는 미세 경향과 무료 팟캐스트, DJ믹스의 시대, 즉 최신 음악이 점점 더 따라잡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상적인 포맷이다.
디지털 시대의 시간 경험 방식에서, 사용자의 편의를 높이는 성과가 나타날 때마다 예술이 우리 관심을 지배하고 미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힘은 약해졌다. 다시 말해, 그 성과는 손실이기도 하다. 접속된 생활의 불안정한 시간성은 우리의 집중력과 주의력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방해하고 경험의 흐름을 교란한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도 마찬가지로 ‘지금’ 못지않게 ‘여기’도 완전성을 잃고 파열된다. 텔레비전을 보려고 거실에 모인 가족도 이제는 온전히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 저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다른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루함은 과포화 상태, 주의 분산, 쉴 새 없음과 연관된다. 나도 종종 지루함을 느끼지만, 그 이유는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수천 개의 텔레비전 채널, 풍성한 넷플릭스, 인터넷 라디오 방송들, 아직 듣지 않은 앨범과, DVD, 읽지 않은 책, 유투브 아나카이브의 미로는 끝이 없다. 오늘날의 지루함은 결핍에 대한 반응, 지루함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과 시간을 요구하는 과잉에 대한 반응, 문화적 식욕 상실에 가깝다.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은 무한정이라는 조건에서 과연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유투브는 흡사 5년 전에 갑자기 데이터 바다에서 솟아오른 신대륙 같다. 이 신세계는 점점 더 많은 문화 산물로 채워지면서 갈수록 거대해진다. 유튜브와 인터넷으로 가능해진 시간 여행에서 결정적인 것은, 사람들이 전혀 뒤로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공간 아카이브 평면에서 수평적으로, 옆으로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의 유투브 동영상들은 참다운 뜻에서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인터넷은 먼 과거와 이국적 현재를 나란히 놓는다. 멀지만 가까운 낡은 ‘지금’이 된다.
3. 임의 재생에 빠지다
음악적 경향이 이제 연주자가 아니라 전달 시스템으로 규정될지도 모른다는 빌 플래너건의 예측은 애플 사에서 나온 아이팟으로 실현됐다. 아이팟은 전통적 의미에서 음반 수집을 사라지게 했지만, 수집의 사고방식, 즉 자료를 끝없이 추적하고 누적하며 정리하려는 충동은 궁극으로 확장시켰다. 아이팟은 분명 추억을 담는 상자일지는 몰라도, 추억을 만드는 도구는 아니었다. 아이팟이 외부세계를 차단하거나 원하지 않는 사교를 피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아이팟에 있는 임의 재생 기능은 선택을 미루는 효과를 준다. 임의 재생의 단점은 금새 드러났다. 메커니즘 자체에 매료된 나머지 늘 다음 곡을 궁금히 여기게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노래가 나와도 다음 곡이 더 좋을 가능성이 있었고, 머지않아 나는 모든 곡의 첫 15초만 듣게 되었다. 그건 선택의 엑스터시였고, 소비에서 지루한 부분, 소비행위나 상품자체가 사라져버린 형태였다. 아이팟은 뉴밀레니엄의 Me 세대에 잘 들어맞았기에 출현할 수 있었다. 제품 이름이 아이 I 로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음악이 아니라 내 음악이다. 한때 음악 감상의 일부였던 깊은 정서적 헌신은 사라졌다. 디지털 음악은 음악 경험을 탈신성화, 탈사회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LP와 같은 아날로그 포맷은 지속적 감상, 사색적이고 정중한 감상을 강제한다. 음악이 간직하고 싶은 포장에 씌워 유통되고 녹음 매체 자체가 무게를 가졌던 시절은 음악은 생활에서 손에 잡히는 존재감을 발휘해다. 음악이 물체일 때에는 그것에 애착을 갖기도 쉬웠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돈은 판매한 노동시간에 상응한다. 어렵게 번 돈을 문화 상품에 썼다면, 공 들여 가치를 뽑아내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하는 현실을 살았다. 이 음반을 사면, 저것은 살 수 없었고, 따라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것에다 저것에다(plus/and)’의 시대를 산다. 둘 다 선택 가능하므로 애초에 선택할 필요가 없다. 다운로드의 시대는 ‘이것에다 저것에다’의 시대다. 비용도 저장문제도 없다면 이것에다 저것에다의 유혹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지만 한 장르에만 충성하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고, 깊이가 아니라 너비를 중시하는 태도다.
다행이도? 불행히도? 인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지배를 받는다. 인생 자체가 희소 경제다. 사람이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돼 있다. 너무 많은 선택, 정보, 오락 같은 이것에다 저것에다 원리가 문화를 지배하면 할수록 음악은 쇠약해진다. 그것은 결국 무관심을 낳기 때문이다.
4. 좋은 인용
아마도 큐레이터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유망직종일 것이다. 그 업무는 자료를 재평가하고, 걸래내고, 소화하고, 연결하는 일이다. 새로운 가공물과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연결을 전문으로 하는 작업, 큐레이터는 새로운 이야기꾼, 메타 저자가 된다. 브라이언 이노는 현대적 예술가를 창작자보다 연결자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했다. 현대 예술가는 방대하게 수용된 문화적 양식적 가정을 영속화하고,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몇몇 아이디어를 재평가, 재도입하며, 또한 혁신하기도 한다는 주장이었다.
5. 일본 닮아가기: 레트로 제국과 힙스터 인터내셔널
일본 소비경제 절정기에 떠오른 시부야계 밴드들은 독창적 창작보다는 노래 카탈로그로 사적 취향을 표상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말 그대로 수집 과정에서 만들어낸 음악으로, 창의적 내용은 거의 큐레이션에 해당됐다. 자신들의 좋아하는 노래의 제작 상 특징은 그대로 둔 채 곡조만 조금 바꿔 재생한 음악이었다. 천진하고 모조품 성격이 뚜렷한 원천을 죄다 합성한 음악은, 일본 고유 요소라고는 없는 범세계적 혼성체였다.
창조성은 깊은 내면에서 우러난다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음악인이 취향과 의식적 영향선별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티스트가 아이디어 시장에서 정체성을 쇼핑하는 소비자가 아니라면, 달리 뭐란 말인가?
우리는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술에서 갖은 혜택을 누리지만, 그 기술은 또한 웰메이드 음악이 범람하는 위기를 낳았다. 박식한 제작 기술자로서 프로듀서는 시대의 감성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영감을 준 음악이 당대에 기능했던 것처럼 의미있는 음악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모방에 따르는 수치심도 점차 사라졌다. 비교적 혁신적 아티스트도 패스티시나 오마주로 우회하기를 꺼리지 않을 정도다.
설치미술가 마크 디온은 1980년대를 회고하면서, 전위가 마침내 죽었다는 근본적 감상이 일어났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누가 먼저 했느냐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것이 없다고 언급했다.
어제
6. 이상한 변화
지난 수십 년간 레트로와 함께 패션에서 크게 일어난 유행이 바로 빈티지이다. 둘은 서로 연관됐지만, 똑같지는 않다. 빈티지는 낡은 디자인을 재해석한 신상품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에 만들어진 옷을 의미한다. 빈티지라는 말 자체도 헌 옷이나 중고를 대체하는 데 성공한 리브랜딩 작품이다. 빈티지는 숙성 기간으로 품질을 평가하는 포도주 업계에서 쓰이다가 악기나, 자동차 등 나이가 품질을 보증해주는 영역으로 흘러든 용어다.
레트로와 빈티지는 당연히 연관된다. 그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 즉 끊임없는 변화를 쉴 새 없이 추구하는 패션의 두 얼굴이다. 신속한 순환은 철 지난 제품을 산더미처럼 만들어내고, 그런 제품은 제거되거나 파기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돈다.
7. 시간을 되돌려
언뜻 보기에, 새로운 옛 음악은 터무니없는 발상 같다. 구식 록을 복제하면서 60년대의 녹음 장비만 쓰는 것처럼, 음색과 분위기를 제대로 재현하려면 현대 댄스 뮤직 프로듀서가 쓰는 우수한 기술을 일부러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옛 음악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그건 시간에 맞서는 투쟁의 다음 단계로서, 과거를 조금 더 지속시키려는 절박한 전략이다.
8. 미래는 없어
아방가르드와 레트로가르드는 실제로 닮은 면이 있다. 둘다 절대주의적이고 광신적이며, 질문을 많이 한다. 현재에 실망한 그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 즉 손에 닿을 듯하다 멀어져버리는 신기루를 좇아 더욱 먼 미래로, 더욱 먼 과거로 나간다. 아방가르드가 새로운 극단을 향해 진격해야 하듯, 레트로가르드는 더욱 먼 고대에 숨은 성배를 찾아 늘 헤매야 한다. 이처럼 다른 곳, 다른 시간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전위와 복고를 매우 쉽게 오갈 수 있고, 심지어 두 영역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다.
1950-60년대에는 좋은 음반을 만들기가 쉬웠는데, 그때만 해도 절제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료나 기술상 제약 자체가 충분한 절제를 강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간이나마 분별있는 삶을 살려면 인위적 제약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을 감수해야 하는데, 무한은 자유의 반대다. 그러므로 스스로 절대적 제약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이 최선이다. 빌리 차일디시는 제약은 곧 자유라고 말했다.
9. 록이여 영원하라
내일
10. 흘러간 미래의 유령
샘플링은 이상하다. 그러나 더 이상한 건 우리가 매우 빨리 그것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음반의 파편으로 만든 음반, 즉 원래 시간과 장소에서 연주 조각을 잘라내 만든 음반을 즐기는 게, 그리고 그것을 음악으로 인정하는 게 일상적 음악 감상의 일부가 되었다.
혼톨로지(hauntology)는 2000년대 내내 학계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주로 기억과 폐허에 관해 토론에 틀을 지우는 데 쓰였다. 2004년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레트로와 재활용을 주제로 한 <유령들: 패션이 뒤돌아볼 때(Spectres: When Fashion Turns Back)>를 뒷받침했다. 기획자 주디스 클라크는 “패션에서 기괴한 인식과 예기치 않은 접속”이 필수불가결해진 양상을 살펴보는 전시였다. 혼톨로지는 아카이브, 역사적 기억, 잃어버리거나 퇴락한 미래 등에 기초한 작품이 상당 기간 유행한 미술계에서도 유행어가 되었다. 2010년 여름에는 버클리 미술관에서 <혼톨로지(hauntology)>,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홀린(haunted)> 이라는 전시가 개최되었다. “오늘날 많은 미술 작품은 복제로 되살아난 유령에 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미술은 낡은 양식, 주제, 기술을 이용함으로써 복구 불가능한 과거를 향한 염원을 구현한다.”
11. 잃어버린 공간
12. 낡음의 충격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우주로 발사된 로켓처럼 지난 단계를 던져버리며 가까운 과거와 난폭하게 단절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진보라는 단선적 모델은 이념적 허구이고, 과학 기술에서는 성립할지 모르나, 문화로는 애당초 오지 말아야 할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새로움의 충격에 대한 회의, 혁신 중독도 고질적 문제라는 의심으로 번질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습관인 ‘내일’을 끊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마치 항복처럼, 시시한 타협처럼 느껴질 테다.
미래에 도착한 이래 10년을 돌이켜볼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평평함이다. 90년대는 인터넷, 정보기술, 테크노 레이브와 약물 덕분에 길고 지속적인 오르막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오르고 보니, 2000년대는 고원이었다. 물론 새로운 이름과 미세 트렌드의 재빠른 순환은 있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의 소리 풍경을 되돌아보면, 결정적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단지 새로운 운동이나 거대 장르가 떠오르지 못했다거나 기존 장르가 부진했다는 점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음악계에서 재활용과 되풀이가 구조적 특징으로 자리한 탓에, 반짝하는 신기함, 즉 바로 전 유행에서만 벗어나는 유행이 진정한 혁신을 대체했다는 점이다.
니콜라 부리요는 이제 과잉생산은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생태계이며, 재료는 많을수록 좋다고 지적하면서, 지나친 영향과 이미지가 젊은 예술가의 독창성을 질식시킨다는 우려에 그럴듯하게 응수한다. 프로덕션에서 포스트프로덕션으로 전환이 일어나는 현상은 서구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퓨전 음식은 새로운 요리를 창조하기보다 기존 요리, 조리법, 맛을 세계주의적으로 병치한다. 팝으로 옮겨보면, 포스트 프로덕션에는 과거 원천 생산 단계에 만들어진 재료를 재가공하는 음악 활동 전체가 포함된다.
프로덕션/혁신에서 포스트 프로덕션/ 재조합으로 음악 창작의 중심이 이동한 현상은 경제 전반에서 일어난 전환을 닮았다.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벌던 경제에서, 정보, 서비스, 스타일, 오락, 미디어, 디자인 등을 통해 실재에서 철저히 유리된 예로서 금융 부문에서 통화 가치를 조작해 부를 창출하는 경제로 전환이 일어난 현실을 말한다. 세계 경제는 파생상품과 불량 대출 때문에 무너졌다. 음악은 파생과 부채를 통해 의미를 잃었다. 서구 경제가 금융 투기와 부동산 투기에 기울에 균형을 잃었다는 건 곧 메타 화폐, 면직물 화폐나 강철 화폐가 아니라 화폐 화폐가 너무 많은 부를 창출했다는 뜻이다.
폴 몰리는 현대음악에 방향성 없는 방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에 적용 했을 때, 방향성은 앞으로 나가는 단선적 경로가 있다는 뜻을 품는다. 음악과 관련해 이런 사고방식을 고수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날 문화적 움직임은 아이팟의 스크롤 휠 작동과 닮은 구석이 많아졌다. 변화는 전진이 아니라 차이, 즉 선행한 유행과의 단절을 의미하게 되었다.
음악의 역사가 탈시간적 뷔페처럼 펼쳐지면서, 즉 모든 시대의 음악이 동등하게 현재의 음악으로 대접받으면서, 현재에서 과거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하게 커졌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공간화 되면 역사적 깊이도 사라지게 된다. 음악의 원래 맥락이나 의미는 무의미해지고, 되찾기도 어려워진다. 음악은 감상자나 아티스트가 마음대로 골라 쓸 수 있는 재료가 된다. 거리감이 없어진 과거는 신비와 마법도 대부분 잃게 된다.
디지털 문화의 총체적 접근 가능성 때문에 과거에서 상실감이 사라진 것처럼, 미래 역시 이제는 전과 같은 자극을 주지 못한다. 지금 여기,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강하지만, 그들이 출구를 찾는 곳은 환상 또는 디지털 기술이다. 지금 당장 사이버 공간에서 다른 지역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데 2087년의 세상을 궁금해 할 까닭이 있을까?
다른 이들이 ‘무시간성’이나 ‘포스트 프로덕션’같은 신조어로 지적한 조건을 묘사하기 위해, ‘하이퍼 스태시스 hyper-stasis’라는 개념을 개발해봤다. 이는 ‘극심한 정체’로 직역할 수 있으나, 접사 hyper에는 지나치게 활동적이라는 모순된 뜻도 있다. 수많은 영향과 원재료로 구성된 격자 공간에서 뛰어난 음악적 지성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광적으로 출로를 찾아 헤매는 상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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