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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박미라 개인전 <막간극>(보안여관, 2022.8.27~9.18) 전시리뷰

by ㅊㅈㅇ 2022. 9. 26.

 

<한 여름 밤의 꿈>, 캔버스에 아크릴, 193.9X260.6cm, 2022

 

어른을 위한 동화: 박미라 개인전 <막간극> 전시 리뷰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을 올라오다가 문득 바쁜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며 목적지를 향해 모두가 발 빠르게 움직인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튀는 색 없이 회색, 남색, 검정, 베이지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조용한 것은 덤이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평범할 것을 강요받으며 산다. 범주화되어 순응하며 튀지 않고 사는 것 말이다. 생존을 위해 바쁘게 살다보면 우울이나 권태에 빠질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는 것은 어쩌면 번아웃(burnout), 지치는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에 먹을 것, 입을 것을 고민하며 돈을 번다.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동화 같은 상상력, 억압에서 자유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면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억누르며 산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아는 의식에 담아두기 힘든 부정적인 기억을 모두 무의식에 담는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익숙한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불안함과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공포감은 불쾌의 감정을 만들어내며,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복귀하면서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를 유발한다. 이것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기이한 경험으로, 심리적인 공포, 불안, 고통을 야기한다.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이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해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아 20세기 초반 무의식의 표현을 지향했던 하나의 사조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성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 심미적, 도덕적 관심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박미라의 작품도 무의식의 세계,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된 장면을 담았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박미라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밧줄로 묶인 신체 혹은 절단된 신체, 가위, 신체의 변형, 구멍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먼저 변형, 절단된 신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 쾌를 느끼도록 한다. 흑백으로 단단하게 그려진 형태에서 우리는 일종의 공포, 잔인함과 함께 파괴에 대한 본능을 떠올릴 수 있다. 박미라는 현실에서 가져온 모티프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연극 무대와 같이 비현실적 공간을 화폭에 담는다. 시인 로트레아몽의 장편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1869)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문구처럼, 순수한 정신의 세계를 받아쓰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했고, 우연히 어우러진 대상들의 이질성을 담는 것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믿었다. 박미라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는 여러 장면들이 한 화면에 오밀조밀 담겨 있다. <한 여름 밤의 꿈>(2022)을 살펴보자. 오리의 얼굴을 한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한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회화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절단된 손과 발을 공중에 부유하듯 떠있고, 종이배를 타고 있는 아이,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 천으로 덮인 유령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이미지들이 커다란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그가 그린 대상들은 한 화면 내에서 재봉틀, 박쥐, 우산과 같이 우연히 만나,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박미라의 캔버스 작업의 특성 중 하나는,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검정과 흰색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색이 모두 제거된 그의 화면은 그의 작품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 대신 화면의 질감을 통해 또 다른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멘트의 미디엄을 발라 벽화의 질감을 낸 것인데, 표면의 거친 특성은 세밀한 표현방식과 대조되어 날 것의 감정을 부각시킨다.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검은 바탕에 흰 색으로 그려진 <마음 방향 전환>과 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기괴하고 우울한 상상력을 더욱 강조하며, 동화와 현실 사이의 몽환적 세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박미라의 매체 실험은 배경색의 변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앞에 세라믹으로 빚어 만든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다. 앞서 말한 낯설은 두려움의 쉬운 예를 든다면, 죽어 있다고 생각했던 인형이 살아있는 듯 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같은 감각은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지만, <잘려진 감각>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더욱 증폭된다. 절단된 신체나, 그림 안에서 자주 반복되는 대상들은 입체로 구현되어 모래 위에 놓였다. 캔버스 안에 이미지로 멈추어 있던 모티프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임을 더했으며, 세라믹이라는 재료로 재구현 되어 실제 형상을 갖추고 관객에게 제시되었다.

공포 영화, 좀비물을 보거나, 놀이동산에 들러 유령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흔하게 느낄 수 없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려왔던 욕망은 이 같은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표출되고, 또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암울하고 우울한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조금은 대담하고, 조금은 금기시되는 것을 상상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 말이다. 박미라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동화이며,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시작점이 된다.

<잘려진 감각>, 세라믹, 모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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