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3. 리뷰

일민미술관 <히스테리아> 전시리뷰

by ㅊㅈㅇ 2023. 7. 7.

월간미술23-5_히스테리아.pdf
0.18MB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Hysteria: Contemporary Realism Painting

2023.4.14.~2023.6.25.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전시로, 회화라는 장르에 국한한 기획을 실행하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회화 장르 전은 재료나 매체에 있어서 확실한 기준이 있어 출품작의 범위가 명료하지만, 혹자가 왜 꼭 회화로만 제한하느냐고 묻는다면 적절한 답을 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회화 작품을 감상하는 일을 즐거이 여기는 관객은 여전히 많으며, 회화라는 제약 조건 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실험을 지속하는 작가들도 많다는 점에서 여전히 회화 장르 전은 흥미롭다.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는 회화, 그중에서도 하나의 경향이나 키워드로 묶어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동시대 회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시도 자체로 주목할 만하며, 그중에서도 리얼리즘 회화히스테리아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내세워 동시대 회화를 읽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리얼리즘(realism)’은 동시대 생활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진실하게 기록하는 사조를 일컫는데, 대상을 미화하지 않는 대신 비판적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내는 경향이 있다. 전시 제목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에서 구상적인(figurative)이나 형상적(figural)과 같은 단어 대신 리얼리즘 회화라고 기술한 점에서, 작가들이 표현한 동시대적 삶에 관한 관심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게 되며, 기획자가 구상이나 추상같은 이분법적인 구분방식을 따르지 않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1970~80년대 한국 현대미술사를 말할 때 주요한 두 축으로 미술 현장에서 다루어진 것은 한국의 추상 회화인 단색화,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 함께 태동한 사회 변혁을 위한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이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는 선택과 집중으로 작성된 기록이기 때문에, 실제로 작업을 이어 온 수많은 작가의 작업은 그 두 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최근의 회화적 추세로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의 피로감을 느낀 젊은 작가들이 형식주의적인 실험에 매진하는 모습으로 미술시장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인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 책임기획을 맡은 윤율리는 리얼리즘 미술을 말할 때 항상 민중미술 계통의 작업이 주로 언급됐는데, 그러한 시각이 조금은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제3의 방법론을 갖춘 작가들의 작품을 주목하여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 기획을 다듬어 나가면서 도출된 히스테리아라는 키워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회화론을 전개할 때 사용한 단어다. 베이컨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시각 요소로 재조합해 감각을 표현한다. 회화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러한 감각, 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이라는 의미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을 통해 재현/비재현의 이분법을 넘어서 감각을 전달하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말한다. ‘히스테리는 자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한 단어로, 정신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증을 의미한다. 일상에서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에게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정신적 질병인 히스테리에 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 차원을 되돌려주고 있다. 전시에서는 정신의학용어로서 히스테리와 들뢰즈가 사용한 히스테리의 맥락이 포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전시는 이렇듯 리얼리즘 회화를 다루고 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작가 개인의 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 차원을 강조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하는 힘이 담긴 작업을 선별한 것 같다. 진부한 재현이나 추상의 늪에 빠지지 않고 제3의 길을 펼쳐 보이고자 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그것이 잘 이루어졌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야심 찬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은 자신만의 예민한 감각으로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 장면들을 재구성하기도 하고(최진욱, 임노식, 노충현), 반복을 통해 차이에서 드러나는 힘을 드러내며(손현선), 흘러내리는 선을 이용해 인물 혹은 사물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함성주, 정수정). 또한, 여러 재료를 쌓아 올려 촉각적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들기도 하고(김혜원), 초현실주의 작품에서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대상들이 우발적으로 얽혀있는 상태를 보여주었으며(이재석, 이수경, 정수진), 애니메이션,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이미지를 3D 프로그램 혹은 그림 인공지능 등 새로운 툴을 이용해 기존에 몸의 감각을 벗어나는 시도들을 이어나간다(김민희, 조효리, 노상호).

이번 전시의 맥락에 맞으면서도 자신만의 위치를 잘 선점한 것처럼 보이는 작업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정은 고전과 동시대의 이미지를 한 데 뒤섞어 이종교배한 혼성체(hybrid)를 강렬한 색채감을 이용해 표현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인물화 장르 트로니를 이용해 허구의 인물이 가진 개성과 감정을 기묘하거나 괴기스럽게 묘사하여 대상의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김혜원은 평범한 풍경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채화, 과슈 등을 사용해 촉각적인 질감, 두꺼운 물성을 강조한다. 멀리서 보면 세밀하게 묘사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점묘법을 통이용해 해체된 형상이 관객의 눈에서 합쳐져 실제와 닮은 모습으로 인식되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보다도 어떤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인지에 집중하게 만든다손현선은 회전하는 천장 선풍기(ceiling fan)를 반복해서 그린 <도는 사이>를 출품했다. 반복은 같은 것의 재생산이 아닌 차이를 만들어내는 행위로, 개별 개체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즐거운 과정이다. 반복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지각의 새로운 지점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젊은 세대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게임, TV, 애니메이션, 영화, SNS, 일상 사진, 삽화,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종류의 레퍼런스가 그들이 사는 현실로서 주요하게 등장한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인간으로 국한되지 않고, 3D 프로그램(조효리), 혹은 그림 인공지능과 같은 툴(노상호)을 이용해 인간의 몸/지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측 불허의 실험도 시도된다. 새로운 제작방식을 통해 작가가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작가의 위상이나 입지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읽어낼 수 있다.

작품 디스플레이를 위한 부수적 장치가 최소화되어있다는 점과 작가별 소개 텍스트가 전시의 맥락에 맞게 상세하게 기술되어 작품과 함께 벽면에 월 텍스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흰 벽에 흰 조명, 그리고 회화 작품을 벽에 건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방식은 공간감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되거나 연극적인 장치를 최소화하여 새로운 맥락으로 리얼리즘 회화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기획자의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듯 보인다. 작품과 함께 읽기 좋은 크기로 벽에 쓰인 소개 글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위치를 바라보는 기획자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 맥락의 입체적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정말로 출품작과 참여작가들을 하나의 계보로서 읽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동시대 작가들과 전시를 통해 발언하는 큐레이터에게 전시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지, 정답을 제시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2023.5.20. 최정윤(독립 큐레이터)

 

월간미술 2023년 6월호 수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