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삶, 외로움과 아름다움에 관하여
허겸은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경우 상대의 의도나 맥락을 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겸의 경우, 그는 대학도 졸업했고, 회사생활도 잘 하고 있으며, 스스로는 관계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거나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종종 혼자 여행 또는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편인데,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다고 말하며 그는 자신이 장애와 비장애 그 경계에 있는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생각하는 바를 잘 표현하기 어려운 글이나 말과는 달리, 머릿속에 있는 것을 꾸밈없이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19~2021년까지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혼밥>(2019)은 각기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다섯 사람을 파노라마처럼 한데 놓은 작품이다. 누군가는 먹기 전에 인증샷을 찍고 있고, 누군가는 열심히 음식을 입에 넣고 있으며, 누군가는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같은 테이블 색깔과 배경색을 칠해 한 공간에 이어져 앉아있는 듯하다. <지하철>(2021)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이는 여섯 사람의 상반신을 병렬식으로 위치시킨 작품이다. 밀짚 모자를 쓰고 양복을 차려 입은 어르신부터 전화를 하고 있는 젊은 여자, 환하게 웃는 청년까지 각기 다른 나이대와 성별의 인물들이 한데 모여 있다. <It(그것)>(2021)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각기 핸드폰을 보며 숨죽이고 있는 인간 군상을 담았다. 어두운 배경에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듯 각자의 생각에 몰두해있는 인물들의 힘 없어 보이는 눈동자가 눈에 띈다. 허겸의 인물화는 여러 명의 인물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감정적 교류를 하고 있지 않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각자 바쁘게 이동하거나 먹고, 일을 한다. 그의 작품은 물리적으로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여전히 멀고도 낯선 존재인, 바쁜 도시인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인물화들 중 눈에 띄는 작품은 <춤추는 사람>(2021)인데, 허겸은 이 작품을 두고 “번화한 쇼핑몰에서 갑자기 멈춰서 음악도 없이 춤을 추는 남자가 행복해 보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냉담히 지나쳤다”고 언급했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인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듯 각자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외롭게 살아간다. 이러한 ‘홀로됨’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모습에서도 발견되지만,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공간에서도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튀는’ 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시선에서도 드러난다.
2023년부터는 도시의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소재의 변경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변화라고 느낄 수 있지만, 도시에서의 삶과 홀로됨의 표현이라는 주제적 측면에서는 이전의 인물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을 그린 이전 작품에서는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인을 통해 홀로됨을 표현하였다면, 도시의 풍경을 담은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이 혼자 도시 곳곳을 다니는 행위와 그로 인해 마주하게 된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로 자연스레 이어져 있는 건물들의 윤곽선을 통해 혼자있는 시간의 외로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허겸은 남산타워, 북서울 꿈의 숲, 롯데월드 타워, 낙산공원 등 비교적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울의 풍경을 바라본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마치 일상에서 벗어난 듯한 이국적인 느낌을 받게 되고, 자세한 디테일을 볼 수 없어 흐릿한 실루엣에 집중하게 된다. 사진을 찍고, 크롭하여, 실제 눈으로 보았을 때와 비슷한 해상도로 이미지를 편집한 뒤에,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옮긴다. 이전에 인물을 그렸을 때와 다른 점은,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채색한다는 점인데, 허겸은 “아무래도 원경은 사진을 참조해서 그리기 때문에 밑그림의 필요없다”고 말한다. 사진을 사실적으로 옮기는 하이퍼리얼리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허겸의 경우는 하이퍼리얼리즘 보다는, 배경을 제거하고 곧 벽면이 배경이 된 전면균질회화, 올오버 페인팅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허겸의 도시풍경은, 도시를 이루는 개별 건물의 형태 그 자체보다는, 여러 개의 건물들이 이루는 덩어리의 집합체, 혹은 그것으로 만들어진 선의 리듬, 여러 건물이 만들어 내는 색채의 하모니에 더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서울>시리즈인 그의 도시풍경 작품들은 해당 장소가 어딘지 전혀 식별 할 수 없게 그려졌다. 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장소의 개별적 특성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면서 느낀 허겸의 멜랑꼴리한 정서다. <서울> 시리즈의 작품을 통해 관객은 밝은 아침 햇살이 느끼기도 하고, 쨍한 대낮의 무더움을 전달받기도 한다. 도시에서 매일을 바쁘게 살고있는 동시대인들에게 어쩌면 풍경을 멍하니 관찰하고 지내는 일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외롭지만 또 당당하게, 오늘도 허겸은 도시 이곳저곳을 거닐며 서울의 풍경을 캔버스에 채워 나간다.
2024.8.7
최정윤
* 서울문화재단 x 예술의 전당 협업전시 / <기울기 기울이기 Art of Tilting> 2024.9.26~10.15 (기획: 문유진)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14기 입주작가 비평 워크숍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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