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물질문화1_2016.3.10
최범, “디자인 개념의 인식론적 층위들: 추상, 보편, 역사”, 『디자인과 지식』, 월간 디자인네트, 1999, pp.13-27
1. 디자인의 개념
‘디자인’은 개념, 행위, 산물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단어다. 여타 기호와 마찬가지로 디자인이라는 단어 역시 개념의 차원과 지시대상의 차원을 모두 갖고 있는데, 다른 개념과의 차이점은 디자인이 자연물이 아닌 인공물과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에 개념의 차원이 지시대상에 항상 선행한다는 점이다.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복잡다단한 의미망의 안팎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디자인의 개념이 동일한 평면상의 차이뿐 아니라 상이한 인식론적 층위에서의 차이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넓은 디자인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세 가지 인식론적 층위 설정-추상적, 보편적, 역사적-이 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분류는 언뜻 추상적 차원에서 구체적 차원까지 수직적으로 계열화한 듯 보이지만 이는 인식론적 층위를 나눈 것일 뿐 역사적 발전모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2. 추상적 개념: 비가시적 디자인
첫 번째로, 가장 추상적인 차원의 디자인이란 비가시적 물질성을 지칭한다. 디자인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릇의 쓸모는 비어있음에 있다”는 노자의 말은 모든 보이는 것이 실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생겨남을 환기시킨다. 이는 비가시적 디자인 사유의 기원 중 하나다. 두 번째로, 디자인의 비가시적 개념을 노동과정에 내재해있는 속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계획, 실행, 결과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계획 단계가 추상적 의미에서의 디자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실행 이전에 계획한다(디자인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빅터 파파넥은 의미 있는 질서를 부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모두 디자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디자인의 지평을 삶의 전 차원으로 확장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현대디자인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
3. 보편적 개념: 도구론과 인류학적 지평
구체적 인간 활동의 한 유형으로서 디자인은, 전통적 장인의 노동으로 이뤄지는 제작 차원을 제외한 조형적 계획, 즉 구상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는 ‘공작인’으로, 자연물을 변형시켰고 문명을 이끈 주역이다. 인간의 능력은 가시적 차원의 ‘도구’에 비가시적 차원의 ‘상징’을 연결시키면서 극대화되며, 창조물로서의 도구를 만드는 데 있다. 도구(가시적)와 상징(비가시적)이 합쳐지는 것의 고대적 원형을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불을 다스리는(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기술과 미의 행복한 결합을 나타낸다.
디자인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인류학적 기원을 쫓는데 집중했다. 서양건축사에서 그 연원을 살필 수 있는데, 로마의 비트루비우스는 자연을 모방하여 규칙적 비례, 고전적 형식미를 주장했고, 18세기 로지에는 기둥, 바닥, 보, 지붕 등 근원적 구조로만 이루어진 숭고한 원시주의를 지향했다. 20세기의 존 섬머슨 역시 고전주의의 본질과 문법을 탐닉하며 기원의 신화가 인류학적 지식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건축물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전통 인류학이 원시사회를 연구대상으로 삼지만 오히려 인류학적 사유의 지평은 우주론적 시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마셜 맥루헌의 주저인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인간의 확장인 것을 염두에 두어 볼 때, 맥루헌은 ‘미디어’를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 좁은 의미에서의 통신 미디어뿐만 아니라, 의복, 필기구 등 일반 도구를 모두 포괄하며, 이것들을 피부, 손, 목소리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대상을 변형시키며, 그 가운데 상징, 도구, 의례 등의 작용으로 문화질서를 만들어나간다는 측면에서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
4. 역사적 개념: 계보학과 역사의 불균등성
디자인은 오늘날 조형적 활동과 관련한 의미를 획득하게 됐다. 앞서 언급한 두 차원에서의 개념이 형이상학적 관념 혹은 보편성으로 존재하는 디자인을 의미했다면, 역사적 개념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는 것을 포착하는 관점이다.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 속에서 객관적으로 가시화된 개념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현실을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식’과 ‘기술’이 필요하다. 해석과 구성의 과정을 거쳐 역사화된 사실들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근대디자인을 기원으로 하는 디자인사는 니콜라우스 펩스너의 『근대디자인의 선구자들』에 의해 성립됐다. 그는 윌리엄 모리스에서 시작되어 그로피우스에서 정점에 도달하는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내 근대디자인 계보를 확립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첫째, 근대 디자인의 선구자를 기계를 부정하고 중세를 동경한 윌리엄 모리스로 삼은 것이 모순이라는 점, 둘째, 디자인을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의 역사적 개념의 핵심은 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한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실천은 결코 단일한 기원을 갖지 않으며 서로 단절된 패러다임의 교체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목적론적 체계에 따라 매끈하게 연결된 듯 서술된 선형적 역사를 다시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디자인의 어원은 르네상스 시기의 ‘디세뇨’로, 인문주의 운동 과정에서 인문학으로 상승된 미술, 건축, 조각, 회화의 공통 조형원리이자, 서구 최초의 통합된 조형예술 개념이었다.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어원적 기원이지만, 근대 디자인이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차별적 위계질서를 없애는 대신 독자적 조형언어와 문화적 의미를 담지하며 탄생한 것이기에 개념적으로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근대디자인은 1900-30년대에 걸친 서구 문화의 아방가르드 시기에 가능했던 디자인 존재 방식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갖는다. 귀족주의적 전통, 기계시대의 활력, 사회혁명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1930년대에 이르면 근대 디자인은 소멸하고 새로운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현대디자인은 1920년대 말 불황 타개의 수단으로 미국에서 탄생하여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스타일링을 조형 문법으로 삼았다. 근대디자인이 하나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합리적인 세계를 조형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현대 디자인은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의 순환적 실천 방식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모리스와 바우하우스를 기원으로 간주하는 디자인사 책들은 디자인 실천의 연속성이라는 미명하에 일종의 기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계보학은 이전에는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발생의 순간을 주목하여 다양한 힘이 뒤얽히는 상황을 분석한다. 역사의 투명함보다는 불투명함을, 하나의 역사보다는 다수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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