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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더글라스 크림프, 「픽쳐스」, 1979

by ㅊㅈㅇ 2016. 4. 28.

더글라스 크림프, “픽쳐스”, October, Vol 8. Spring, 1979, pp.75-88.


<픽쳐스>더글라스 크림프가 기획하고, 트로이 브론턱, 잭 골드스타인, 셰리 레빈, 로버트 롱고, 필립 스미스가 참여한, 1977년 가을, 아티스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이다. 이 전시에서 픽쳐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식별 가능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일군의 작품들은 특정 매체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진, 영상, 퍼포먼스, 회화, 드로잉, 조각 등을 총 망라한다. ‘픽쳐라는 단어는 구어체적으로 보통 어떤 이미지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동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상상하다, 묘사하다등의 의미를 가지며, 단순 미적 오브제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 같은 정신적인 과정도 포함한다.

1967년 미술평론가 마이클 프리드는 미니멀 조각에 관한 반박의 글에서 모더니스트 추상 회화와 조각 이후 예술의 종말을 예견했다. 그는 연극적 특성에 다가갈수록 예술은 점차 퇴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지난 십년간 우리는 모더니스트의 전통에서 급진적인 단절이 있음을 직접 목도했다. 이에 더해, 예술의 개념은 의미 있지만, 그 의미는 개개인의 예술에서만 의미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미적 행위들은 대체 무엇일까?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은 영상,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특정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장르간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제는 특정 매체의 특성을 가지고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프리드가 미니멀리즘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연극성인데, 회화와 조각 사이에 놓인 애매모호한 위치뿐만 아니라, 경험의 지속성, 시간과 연관된 특성이었다. 작품들은 하나의 상황을 만들었고, 특정 시간동안 관객과 작가가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프리드가 예술 작품에게 요구했던 것은 현존성(presentness)”으로, 이는 매 순간마다 온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특성이었다.

잭 골드스타인의 퍼포먼스는 예술가가 퍼포밍하는 것보다도, 하나의 이벤트의 재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재현임을 이해하는 듯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2년 전에 골드스타인은 제네바에서 <Two Fencers>를 선보였다. 붉은 빛 홀로그램으로 제작된 펜싱선수의 모습이 헐리우드의 액션 어드벤처 영화의 사운트랙과 함께 등장한다. 한명이 다른 한명을 무찌르고 난 다음에는 암흑만이 남아있는데, 같은 노래가 다시 나오면서 관객들은 이전에 봤던 이미지를 기억을 되살려 떠올리게 된다. 이미지는 사라졌지만, 상상 속에서 대체되는 것이다. 골드스타인의 연기자들은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평상시에 프로페셔널하게 하던 행위를 할 뿐이다. <A German Shepherd>에서 개는 계속해서 짖고, <A Ballet Shoes>에서 발레리나는 발끝으로 서고, <Metro-Goldwyn-Mayer>에서 사자는 끝없이 포효한다. 영상은 매우 심플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영상은 계속 루프로 반복된다. <The Jump>는 다이빙 선수의 모습을 특수효과를 갖춘 렌즈로 촬영해 붉은 실루엣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역시도 루프되어, 영원히 반복된다. 관객은 반복될 것을 기다리게 되며, 그의 영상, 퍼포먼스, 사진 등은 심리적인 일시성을 제공한다.

마천루가 뒤에 있고, 1950년대 스타일로 옷을 차려입은 커리어 우먼이 있다. 이 사진에서 우리는 뭔가 미심쩍은 느낌을 받는다. 이 장면은 허구일까? 일견 영화적 장치가 개입된 인공적 장면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의상이나 메이크업에서 변장한 것은 아닐지 의심해보게 된다. 이것은 신디 셔먼의 사진 작품이다. 이 사진을 보고 관객은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허구적 내러티브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을 옮기는 것 혹은, 시간과 공간 모두 뛰어넘는 속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신디 셔먼의 작품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셔먼의 사진은 일반적인 스냅샷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파편처럼 기능하지만, 자연적인 실제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셔먼의 사진은 마치 영화의 스틸 사진과 같이 존재하는데, “그 존재는 절대 그 파편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네러티브 시간을 포기하는 것은 그 픽쳐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지, 파편으로서의 일시적 모드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세 파트로 나누어진 퍼포먼스 작품, 로버트 롱고<Sound Distance of a Good Man>는 영상인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영상이다. 영화 상영 시에 깜빡거리는 효과 말고는 아무 움직임이 없다. 한 남자의 토르소 윗부분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뒤에는 사자상이 아무 움직임 없이 배치돼 있다.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하면 관객은 스틸 이미지만을 보게 되며, 전체 영상은 멈춰진 프레임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롱고의 카메라는 사진, 혹은 기존의 여러 사진들을 조합해 만드는 포토몽타주에 더 적합하게 숙달되어있다. 이 전시에는 롱고의 영상에 등장한 남성의 이미지가 알루미늄 부조로 제작되어 벽에 설치됐는데, 이는 파스빈더의 영화 <The American Soldier>의 스틸 샷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관객들은 <Sound Distance of a Good Man>을 보면서 어떤 내용적인 것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스틸 이미지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미지를 정교하게 조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여 그것을 숭배하는 것에 가깝다. 픽쳐는 욕망의 산물이고, 어떤 의미에 대한 욕망은 실제로 부재한다. 앨버트 스피어의 자서전에 수록된 이미지에는 <Hitler Asleep in his Mercedes 1934>라는 캡션이 달려있다. 트로이 브론턱은 이 이미지를 재생산하여 세 파트의 사진 프린트 시리즈의 중앙 작품으로 활용했다. 브론턱은 크기, 색깔, 프레이밍, 파트와 파트와 관계 등 세심한 부분의 디테일에 신경을 써서 작품을 설치했다. 위에 언급한 사진은 가로 50cm로 확대되어 출력했다. 세로로 놓인 패널은 사진을 확대 출력한 것으로, 크기가 너무 키워져 있어 실제 이미지를 읽기는 어렵다. 이 사진은 뉘렌베르크 전당대회의 사진이지만, 실제 사진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만 확인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사진들은 여러 책에서 책으로 반복해서 재생산되면서, 발췌되고, 확대되고, 잘려나가면서 원래의 이미지는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셰리 레빈이 다루는 주제는 브론턱의 그것보다는 덜 강박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일하다. 레빈은 워싱턴, 링컨, 케네디 대통령의 상징적인 실루엣을 오렸다. 그 다음 패션 잡지에서 사진을 오려내 두 개를 겹쳐놓았다. 각 이미지를 서로를 통해서만 읽혀질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레빈은 각각의 이미지가 원래 놓여있는 문화적 맥락에서 그것을 떨어뜨림으로써 그것이 가진 신화를 전복시킨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정확한 작품의 재료가 무엇인지, 또 원본의 예술품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이 에세이의 도입 부분에 나는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예술적 매체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깨달았다고 기술한 바 있다. 여기서 모더니즘은 보다 정확하게 마이클 프리드식의 모더니즘을 지칭한다. 만약 이 같은 작품이 모더니즘과의 연속성이 없다고 해서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이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체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적 작품들이 그것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형학적으로 잘 정리된 지도 위에서 위치했다면, 이제는 층위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 됐다. 우리는 이제 소스의 원천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의미의 구조를 탐색하며, 각각의 픽쳐에는 항상 또 다른 픽쳐가 존재함을 받아드린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형식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배신하게 될 것이다. 휘트니미술관에서는 <New Image Painting>이라는 전시를 개최하여 퀄리티, 의도, 의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업을 선보였는데, 실제로는 가장 덜 중요한 특성인 식별가능한 이미지가 전면에 내세워졌다. 전시의 가장 본질적인 의도는 회화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잔 로젠버그의 페인팅이 포함되게 된 것이다. 로젠버그의 말(horse)은 다른 추상회화 작가들의 그리드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 이 전시에서 가장 성공적인 페인팅은 로버트 모스코위츠<The Swimmer>인데, 그 이유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면이 물감이 칠해진 색면으로, 그리고 수영하는 사람이 있는 물로서 기능하여 두 가지 방식으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New Image Painting>은 미술관 전시의 전형을 보여주며, 모더니스트적 미학적 카테고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드러낸다. 모더니즘 시기는 미술관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미술관 바깥인, 소위 대안공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어떤 미학적 행위들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이 픽쳐스가 포스트모더니스트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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