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그려내는 방법
최정윤
2016년 1월,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최수인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다. 전시장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삼면화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하늘색, 베이지색, 레몬색까지 한톤 다운된 색채로 구성된 그림이었다. 세 폭의 그림에서 일부 선은 이어져 있었지만, 일부는 단절돼 있어 각각의 캔버스가 독립된 영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비슷한 색을 통일감있게 사용해 세 폭이 마치 한 폭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문드문 어떤 형상을 읽어낼 수 있을 듯 싶어서 들여다 보았다. 총을 쏘자 푸드덕 도망쳐 날아가는 비둘기의 날개 같기도 하고, 막 도망가는 닭을 잡아 털을 뽑는 것 같기도 했으며, 깃털처럼 힘을 전혀 받지 못하는 노로 힘겹게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무기력한 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최수인의 화면은 형상처럼 보이는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것은 직접적인 도해나 설명에 봉사하지 않는 듯 계속 손에 잡히지 않고 미끄러지는 이미지들이었다. 명쾌한 해석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형상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그림은 하나의 해석을 제안하면 금세 흐트러져버리고, 동시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듯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목을 더듬었다. <파티1>(2015), <구름 아래 우주선>(2015), <배신당한 나무>(2015). 명확한 서사나 형상을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서 였는지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이 선과 색, 형과 같은 기본 요소를 활용해 어떤 감각의 극점을 표현하려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제목에서 붙잡은 단서는 ‘배신’이었다.
<연인> oil on canvas 112×145cm 2009 / <말>(2009) / <Happy island oil on canvas> oil on canvas 130x89cm 2010
흔들리는 선에 담긴 굉음
최수인의 현재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전 작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을 죽 늘어놓고 살펴보면, 사용하는 색채, 구성의 방식, 필법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표면에서 드러나는 양식의 변화와 더불어 이 같은 차이에서 그가 다루는 내용 역시 어떤 방식으로 달라져 왔는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연인>(2009), <관련>(2009), <Happy Island>(2009), <말>(2009)과 같은 초기 작업에서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인물과 같은 형상이 등장한다. <연인>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 중앙의 두 형체는 사랑하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한 쌍 같다. 인간인지 동물인지 식별불가능한 이 둘은 미지의 세계에서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삼는 듯 보인다. 전체적으로 나무, 흙, 수풀을 느낄 수 있는 단순화된 배경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분명한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면 내에서 식별가능한 공간감이 느껴지며, 인물로 추정되는 형상이 걸어가게 될 길이 흰 색으로 화면 바깥까지 이어져 있다. 관계에서 생성되는 주관적인 감정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해낸 듯 보인다.
<말>에서도 비슷하게 작품 중앙에 말을 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작품의 정면을 응시하며 배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도 연극적인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처럼 보인다. 이 인물이 서 있는 장소는 실제 존재하는 그 어느 공간도 아니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방문을 열 때마다 끝없이 새로운 세계로 접속하게 되는 것과 같다. <Happy Island>에서도 일정 부분 유사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붉은 색 배경의 공간 안에 몇 개의 의자가 놓여있고, 코끼리인지, 고양이인지 정확히 분간하기 힘든 형체가 모여 앉아있는 듯하다. 이 시기의 작품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특성은 선적인 요소의 부재에 있다. 형체를 구획하는 선은 흔들리는 점들의 연속처럼 이루어져 있어 형태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6하원칙에 따라서 요소를 살펴본다면, ‘누가’ 그리고 ‘어디에서’ 만 불투명한 상태로 설명되고 있다.
<단잠>(2011)에서부터는 ‘누가’의 요소가 사라지고 어떤 ‘장면’만 남았다.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단잠>을 보면 두 산봉우리 사이로 천이 흐르고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동양화에서 말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느껴지는 듯하다. 기운생동이란 작가가 작품을 구성할 때 지녀야 할 주관정신을 뜻하며, 화폭에 담은 대상을 얼만큼 생동감있게 표현했는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 대상의 개성 혹은 기질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최수인의 회화는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에너지는 그 질량이 너무도 커서 화면 안에 다 담길 수 없을 정도이며, 캔버스 안에서는 폭발적인 굉음을 내고 있다.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캔버스에 유채물감이지만, 드로잉 작업 역시 그 수가 많은 편이다. 2013년 작 <추락>과 <따로 누웠다>의 경우, 연필의 재료적 속성을 한껏 활용하여 선들로 형상, 혹은 어떤 움직임을 구성해내고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흔들리듯 표현된 형체를 구획하는 선이 건성재료를 만나 시너지를 생성한다. <추락>에서는 마치 한마리의 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고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듯 보이는 강한 운동 에너지가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작가는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색의 밀도와 선의 굵기를 조정하며 화면을 메운다.
<구름을 탐하자> oil on canvas 73x63cm 2015 / <말리는 사람을 계속해서 의심할것> oil on paper 131x89cm 2015
이어붙인듯 평평한 조각들
2015년부터는 얇은 붓질로 구현된 흩날리는 선적 요소가 점진적으로 약화된다. 이전의 표현 방식이 화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존에 선적인 요소로 표현됐던 대상은 점차 구획된 하나의 덩어리로 평평하게 그려진다. 2015년 작품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색채의 변화인데, 초기 작업에서 청록색, 짙은 붉은색, 검정색, 짙은 푸른색 등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본색에 흰색을 혼색하여 극적인 요소가 이전보다는 조금 절제된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날>(2015)의 색채와 화면 구성은 언뜻 빈센트 반 고흐의 <생 레미의 풍경>(1889)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듯 보인다. <생 레미의 풍경>은 정신병원에 머무르면서 방 안에서 내다 본 바깥의 풍경을 날씨와 빛의 변화에 따라 포착하여 그린 그림이다. 고흐의 풍경은 하나의 모티프로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인상주의의 작품처럼 시시각 변화하는 대상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풍경을 자신의 심리 상태, 감정을 표출하는 소재로 삼았다는 데 있다. 최수인의 <아무도 없는 날>은 특정 장소를 염두에 두거나 보고 그린 것은 아닐테지만, 하늘과 나무와 땅 정도로 인지할 수 있을 법한 가상의 장소를 ‘아무도 없음’에서 비롯되는 외로움 또는 편안함을 드러내는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름을 탐하자>(2015)와 <말리는 사람을 계속해서 의심할 것>(2015)에서는 초기 작업에서 종종 등장했던 인물 혹은 동물의 형상이 화면 중앙에 등장한다. 최수인의 작업에서 인물은 항상 털이 달린, 혹은 부리가 있는, 인간인지 동물인지 명확히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등장하는데, <말리는 사람을 계속해서 의심할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마치 우화에서 사람 대신 특정 사람의 성격을 가진 동물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것과 같다. 그것이 실제로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보다 어떤 상황에 놓인 어떤 기질을 가진 대상인지만을 뭉뚱그려 나타낸다.
<만들어진 장소1, 2>(2015) 역시 마찬가지로 제목에서 이 두 폭의 그림이 어떤 ‘장소’를 형상화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전 작업과의 차이 중 하나는 색면의 면적이 넓어지고, 재료의 발림이 매끄럽도록 물감이 더 묽어졌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앞이나 뒤, 위나 아래, 구성요소간의 위계가 완벽하게 사라진 평평한 공간처럼 보인다. 파스텔톤의 색채감은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현실에는 없는 어떤 곳처럼 느껴지게 한다. 마치 이어붙인 조각들처럼 평평해진 화면은 특정 내용의 전달보다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덩어리에 좀 더 가까워진 듯 하다.
파토스로 가득한 연극적 공간
최수인의 작품은 일상적인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곳은 오직 파토스(pathos)만이 남아있는 연극적 공간이다. 배신, 폭발, 고독, 슬픔 등 시각적 실체가 없는 감정적인 개념을 화면 위에 구현해낸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의 작품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담고 있지만, 작가가 직접 체험한 실존하는 시공간의 기억에 기대고 있는 것 역시 느껴진다. 구름, 산, 수풀, 돌 등으로 보이는 형상들을 느슨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최수인은 특정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고 그리지 않는다고 강조해서 언급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에 따르면, “남이 이미 해놓은 것에 대한 거부이다. 현 시대에 보여지는 다양한 회화의 표현방법이 모두 싫기 때문에 스스로 느낀 그대로의 움직임만을 기록하는 것이고, 이미지로써 외부 어디에도 없는 마음속에만 있는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재현에 매진하게 되는 순간 그릴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최수인의 그리기는 오롯이 기억 그리고 망각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작가 내부에 있는 어떤 감각과 그것과 연결된 기억의 덩어리들을 자신의 손으로 변형하고 해체해 나가는 과정을 캔버스 위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에 있는 모든 이미지들에는 주어진 역할이 있고, 그것들은 마치 연극의 소품”과 같이 쓰이고 있어서, 굳이 그의 작품을 추상인지 구상인지 분류해 본다면, “엄청 못 그린 구상 회화”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그의 말이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된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하나의 발언이다. 창조는 곧 이념을 갖는 것과 직결되며, 창조의 행동은 그것을 수용하게 될 타자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창조를 하기로 결정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공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타인에 영향을 주게된다. 최수인의 작업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 기운, 에너지, 혹은 감정, 감각적인 것을 다룬다. 이같은 태도는 다른 사람들이 손쉽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며 넘어가는 감춰진 이야기들을 보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성이 곧 권력인 사회 속에서 최수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진리라고 여겨져 왔던 재현의 에피스테메(episteme)를 넘어서 감각의 극점에 있는 일종의 저항적 힘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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