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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1. 작가론

[작가론] 이 완(Lee, Wan): 오브제를 통해 던지는 그의 질문들

by ㅊㅈㅇ 2015. 12. 15.


이완 <household items> grated beef material 2009


이 완(Lee, Wan): 오브제를 통해 던지는 그의 질문들


미술가 이완은 1979년 서울에서 음악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004년 동국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고, 이후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2005년 갤러리 쌈지에서 개최한 개인전 《라이딩 아트(Riding Art)》에서 각기 다른 오브제를 접합하여 제작한 놀이기구 작품을 선보인 이후, 그가 보고 느낀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일상의 오브제를 꾸준히 이용해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맞닥뜨린 사회가 마치 놀이동산같이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처음 그가 사회에 나와서 받은 인상은, 누군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시스템 안에서 우리 모두가 그들의 의도한 것에 부합하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다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놀이기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놀이기구에 유령의 이미지가 부과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세계인들의 웃는 모습이 덧입혀져 있으면 평화로움을 느끼는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 것이다.

2005년부터 2년 동안 제작된 작품의 특징은 관객의 경험이 작품의 중요한 조건으로 상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완은 이 시기에 지배적 감각으로서의 시각의 오류를 일깨우는 다른 감각(촉각, 무게 등)의 경험의 조건을 찾는데 주력한다. 이완은 사회를 시뮬라크라로 대변되는 환영적 이미지의 구조로 보았으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각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재적’ 경험을 통해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낯선 도구들은 결국 ‘감각의 교정 장치’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은 <미끄럼틀>(2005)이다. 가운데 계단을 두고 양쪽에 슬라이드가 연결되어 있는 이 작품은 실제로 그것을 타봐야만 작품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 알 수 있다. 관객이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게 되면, 관객의 앞쪽에 위치한 슬라이드 부분이 아래로 내려가, 관객은 미끄럼틀을 타지 못하고 다시 그가 올라갔던 계단을 그대로 걸어 내려오게 된다. 이 작품을 직접 타보기 위해 미끄럼틀에 오른 사람들은 보편적인 미끄럼틀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이 작품을 ‘걸어 내려오는’ 경험을 통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색다를 체험을 하게 된다.

분당 2바퀴씩 도는 원형 플랫폼 위에 ‘목마’대신 책걸상이 놓여있는 작품 <회전목마(Merry-go-round)>(2005)는 학교에서 사용하다가 버려진 것을 작가가 직접 주워 제작한 것이다. 비현실적인 색채와 말의 모양을 본떠 만든 실제 놀이동산의 회전목마와 달리, 이완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책걸상에 앉아있다. <대관람차>(2005)에서도 마찬가지로 관람차 대신 책걸상이 매달려있고, 사람이 손으로 그것을 회전시켜서만 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 두 작품에서 놀이기구를 대변하는 원색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학교에서 예전에 쓰였던 나무 책걸상만이 덩그러니 그의 놀이동산 시리즈를 구성하고 있어, 놀이기구를 타는 동시에 공부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이는 기존에 놀이기구를 탈 때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관습화된 경험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같은 시리즈의 또 다른 작품 <세발자전거>(2005)는 두 개의 상이한 오브제를 한데 접목시킨 것이다. 작가는 어른들이 사무용으로 사용하는 낡은 의자의 다리를 제거하고 어린이들이 타는 세발자전거 위에 부착하여, 하이브리드(hybrid)적인 자전거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완의 <세발자전거>는 원래 자전거가 가지고 있던 기능과, 의자가 가지고 있던 기능을 모두 살려, 누군가가 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뒤샹(Marcel Duchamp)이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이용하여 특정 오브제를 미학적 질서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오브제의 본 기능을 박탈하게 했다면, 이완은 작품에서 사용된 각각의 오브제가 원래의 기능은 유지하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생성되는 모순적인 상황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표면적으로 드러냈다.

기존에 존재하는 놀이기구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모두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탈 때와는 묘하게 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그의 작품은 미술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직접 일상의 공간에서 관객을 마주한다. 많은 관객들,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에게 이 전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말하는 작가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경험하면서 소통의 한계를 몸소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린이날 즈음이 되면 다양한 기관에서 ‘어린이 작가’로 섭외가 들어왔고, 그렇게 참여했던 방향성이 맞지 않았던 전시들 때문에 남아나는 작품이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개념들은 놀이기구가 가지는 유희적 특성에 가려져 대중에게 전달되는 데 어떤 측면에서는 실패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작업은 좀 더 ‘어른들을 위한’ 방법론을 취하게 되었다.

‘라이딩 아트’에 이어 제작한 운동기구 시리즈는 기존의 사회 구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전복시키기 위한 시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세상적 기준에서 용인되는 가치들에 따라 더 가치 있는 사람과 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서열화된다. 이완은 그가 경험한 사회에서 지식의 서열, 정보의 서열에 따라서 줄 세우기가 이루어진다고 느꼈고,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책을 소재로 삼는다. 비슷한 무게와 색깔을 가진 종이를 엮은 것이 책임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같은 책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 되고, 지하철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무료 잡지 같은 경우에는 쉽게 잘리거나 버려지기도 한다. 이에 이완은 내용이 가지는 가치에 따라 서열화가 이루어지는 책을 무게라는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서열화를 시도한다. 영혼을 살찌우는 책이 무게로 판단되는 운동기구가 될 때, 그 안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거운 책이 더 큰 가치를 부여 받게 되는 것이다. <사전-덤벨>(2006)과 같은 작품에서는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양쪽에 매달아, 두 언어가 가지는 가치, 두 국가가 가지는 가치들이 동등해지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슬롯머신>(2006) 또한 마찬가지로, 이미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특정 구조가 가지는 패러다임을 전복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이완은 여러 개의 슬롯머신을 탑의 형태로 쌓아두었다. 각각의 슬롯머신은 원래의 기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작가가 슬롯머신 안에 있는 세 개의 롤 위의 이미지들을 모두 제거하고, 흰색의 롤을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슬롯머신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대상체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들어간 돈보다는 나오는 돈이 적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이미지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돈이 나오고 안 나온다기 보다는, 이미 그 기계는 흑자운영을 위해 언제 얼만큼의 돈을 내어줄지 다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끝없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으며, 정보를 전달받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시스템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룰이 존재하고 그에 맞추어져서 각각의 개인은 사회가 조장하는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2007부터 2008년까지의 작업은 이전까지 해오던 지배적 감각으로서의 시각에 대한 실재적이고 전복적인 경험성이라는 작가의 대주제를 잠시 접어두고 작가 개인이 느끼는 세대적 인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작가를 포함한 80년대 초반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무력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는 대신 현실과 괴리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상정하며 그 속으로 도피하는 특징을 보인다.

<텔미>(2007)는 런던 아트하우스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으로 이전 작업과는 다른 형식적 특징을 가진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초반에 제작했던 오브제 작업이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셀 수 없이 많이 전시되자, 그 결과로 많은 작품들이 파손되기에 이르렀고,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정신적으로 고갈되는 일종의 ‘슬럼프 시기’를 거치게 된다. 당시 박준범, 안두진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과 함께 이완은 ‘매뉴얼 타입’이라는 작가 그룹을 만들어 홈페이지도 만들고, 직접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였는데, <텔미>는 그들이 기획하여 서울문화재단의 기금으로 서울과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그룹 전시에 출품되었던 것이다. 남한과 북한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전시를 만들어보자는 명목 하에, 이완은 작가 자신이 남북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지점을 표현하고자 했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렀던 작가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부모가 일구어 놓은 안락한 배경에서 자라난 지금의 30대 작가답게, 말 그대로 ‘북한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게 없는 상황’을 형상화했다. 북한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궁서체의 붉은색 글씨와 김일성의 사진 정도였던 작가는, 붉은 색 바탕에 흰색으로 남한에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가요인 원더걸스의 텔미 가사를 적었다. 제 3국에서 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 작품의 내용을 번역하거나 하지 않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 안에서 마음껏 이해하도록 열어두었다. 실제로 런던 주최 측에서는 이 작품을 보고 공산주의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으며, 작품이 설치되는 위치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상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대중가요의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3국의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여러 관계들이 서로 어긋나서 화합할 수 없는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이완에게 카메라를 던져주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박준범 작가였다. 여자친구도 떠나고, 돈도 없고, 그간 사용해왔던 오브제를 가지고 어떤 작업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가면 좋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비디오 카메라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생일을 맞이해 이완의 친구 몇몇은 케이크를 사들고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중, 먹다 남은 케이크에도 봄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곰팡이였다. 새하얀 크림 위에 녹색과 검정색의 곰팡이는 마치 봄에 새로 나오는 잎사귀처럼 나타나서는 점점 커져갔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막막함 속에서 작가는 곰팡이를 통해 독으로도 봄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완의 영상 작업 세 편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작가가 영상에 담은 광경들이 일련의 순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순환 과정이라 함은 영상에 담긴 대상이 물리적으로 도는 형태일 수 도 있고,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이 개념적으로 순환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이완의 영상 작업에는 전부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디오 작업에는 특정 내러티브가 들어있는데, 그는 그가 전달코자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 상태를 관객이 가질 수 있도록 적절한 음악을 작업에 추가시켰다.

2009년에 이완은 다시 일상적인 오브제를 사용해 시각적 환영의 오류를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마트와 집만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며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는,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상품이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이 느껴지는 순간을 겪었다. 어떤 재료는 미국에서, 어떤 재료는 호주에서 수입되었고, 가공은 중국에서 하고, 판매는 한국 기업이 한다고 깨알같이 쓰여 있는 맥주 캔을 보고,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작가가 신기하게 여겼던 것은 그 제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는데, 맥주 캔을 쥐어주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한 결같이 그것의 뚜껑을 열고 마시는 행위를 했다. 이완이 그러했듯이 그것을 예술작품 감상하듯 쳐다보거나 다른 특별한 용도로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에 작가는 어차피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방식대로 사물을 인지하여 사용하니, 그것의 외양은 원래의 사물과 똑같이 하되, 그것의 재료를 바꾸는 방식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도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닭고기로 만든 야구공이다. 그는 닭고기를 갈아서 그것에 플라스틱 액체를 섞은 뒤, 스티로폼으로 만든 틀에 넣고 굳혀 야구공을 만들었다.

이어서 제작한 시리즈는 쇠고기로 만든 합판이었다. 쇠고기로 만든 합판을 잘라, 어떤 것에는 테이프를 감아 몽둥이를 만들고, 어떤 것에는 날카로운 쇠붙이를 매달아 낫으로 제작하였으며, 어떤 것에는 솔을 달아 빗자루가 되도록 했다. 어떤 각목 조각은 덧붙여지는 오브제를 통해, 십자가가 되기도 했고, 어떤 조각은 둥근 형태로 잘라져 거울이 되기도 했다. 작가는 쇠고기와 플라스틱을 섞어 만든 각목에 각기 다른 오브제를 접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관객은 십자가나 빗자루를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특정 관념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이 사실은 쇠고기를 갈아 만든 합판으로 제작된 것을 알게 되면 충격적인 인상을 받게 된다. 재료의 실체를 들은 몇몇 관객은 혐오감을 표출하며 전시장을 떠나기도 했다고 회고하는 작가는, 대상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따라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2010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완은 이전 작업에서 같은 재료를 가지고 여러 종류의 다른 오브제를 만들었던 것과는 정 반대로, 각기 다른 오브제들에 같은 기준을 적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전의 작품들이 시각과 실재의 간극을 다소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면 2010년을 기점으로 더욱 개념화 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가 적용한 기준은 매끈한 표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표면을 갈아보는 것이었다. 진짜 거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청동 거울 같은 경우는 청동의 표면을 반복적으로 갈아내서 만들어졌다. 반면, 벽돌과 같은 재료는 아무리 표면을 간다고 해도, 거울과 같은 표면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완에게 이러한 작업방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준과 잣대가 주어지고 그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사회의 모습과 닮은 것으로 느껴졌다.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도록 이끄는 획일화된 기준들에 회의를 느낀 그는 그 모습을 책상다리, 보도블럭, 아스팔트, 구두솔과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다양하게 수집하고, 그것의 일부를 똑같이 간 뒤, 흰 책상에 얹어 제시하였다. <그들에게 처한 불가역적인 기준의 증거>와 같은 작품의 제목은 그가 매번 작품을 제작하면서 쓰는 작가노트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들만 모아서 합쳐놓은 것이다.

<우리가 되는 방법>이라는 이 작품 또한 하나의 기준을 여러 오브제에 동일하게 적용시킨 작품이다. 그는 그의 작품에 적용시킬 기준이 특정 사상이나 가치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원했기에, 무게라는 물리적인 기준을 선택했다. 가장 공평하고 객관적인 기준인 무게로 대상체를 획일화시키기 위해 우선 60개의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선택했다. 그 후, 그것들의 무게를 측정하여 평균값을 냈더니, 5.06kg이 되었다. 분명히 그 오브제들은 무게라는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안정적이고 평등한 상태를 갖추게 되었지만, 그 오브제 각각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행위는 상당한 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기능을 모두 상실하고, 이리저리 잘려서 다시 합쳐진 60개의 오브제들은 무게를 맞추는 기준, 하나의 목적 이외에는 그 어떤 목적성도 띄지 않게 되는 것이다. 5.06kg에 맞추어 재조합된 오브제 덩어리는 작가가 의도한 형태가 아니다. 시각예술을 업으로 삼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시각적 효과를 전달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완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순식간에 작품을 제작하고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순발력 있는 작가다. 삐삐에서 시디폰, 인터넷, 핸드폰, 이제는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30대 젊은 작가들은 빠르게 정보가 전달되고 확산되어가는 시대를 살아왔고, 이완도 역시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나 주제를 받아들이는 데에 열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그가 제작한 시각적인 구현물의 형태가 매번 다르고, 또한 작품 제작에 사용하는 매체도 다양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진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하나의 형태로 번역하여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형태는 비록 상이할지라도, 전달코자 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이 이완의 앞으로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 2012년 월간 아트인컬처 주관 신진평론 공모 <뉴비전> 제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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