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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안소연 큐레이터 토크 2018.10.11

by ㅊㅈㅇ 2018. 10. 12.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토크 9x0x

안소연 큐레이터 "공간의 경험을 쌓아나가는 큐레이팅"


30년 동안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 많은 수의 전시를 진행한 바 있음. 텅 빈 전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음. <마인드 스페이스>(2003, 호암갤러리), <사춘기 징후>(2006, 로댕갤러리), <스페이스 스터디>(2010, 플라토) 세 개의 기획전을 중심으로 안소연 큐레이터의 큐레이터십에 관해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장 뒤뷔페의 논문을 쓰고 있던 당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미술관 개관전 준비에 합류하게 되었다. "큐레이터 1세대"로 불리는 이유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관한 인식이나 전문적 교육이 부재하였던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큐레이터 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업무의 진행과정에 있어서는 해외 주요미술관과의 교류전을 맡아 진행하면서 국제적인 기준과 프로토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컨디션 리포트나 퍼실리티 리포트와 같은 실질적인 자료 등.. 

1990년대 후반은 아트선재센터, 로댕갤러리를 비롯해 다수의 사립미술관이 설립되는 시기였다. 과천에서 10여년 간 근무한 뒤 삼성미술관에 합류하게 되었다. 1996년에 이직하여 미술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컬렉션의 종류와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해당 미술관의 정체성과 비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었다. 주요 작품을 엮어서 느슨한 형태로라도 미술사적 얼개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백과사전식 미술사 구성은 어렵지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작업들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이는 이후에 리움의 상설전시의 밑그림을 그려보는 작업으로도 활용되었다. 

2000년에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열렸던 <백남준의 세계>는 호암미술상 1회 수상자인 백남준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당시 뉴 밀레니엄을 기리면서 백남준이 보여주는 예술과 기술의 연관관계는 미래에 관한 비전을 보여주어 미술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도 개인전 제안이 있어서 그곳에서 전시를 하는데 삼성에서 후원을 해주고, 순회전 형태로 한국에서도 전시를 하게 되었다. 한국 버전의 전시에서는 규모를 좀 더 키워서 호암과 로댕 두 공간을 모두 사용하였다. 또한 백남준 일생을 보여줄 수 있는 아카이브를 비롯해 몇몇 중요 작품을 추가해서 전시했다.   

2003년의 <마인드스페이스>는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다. 호암갤러리가 현대미술 전시에 집중하고 리움의 전신과 같았다면, 로댕갤러리는 지옥문 작업을 비롯하여 로댕의 해석에 집중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이었다. <마인드 스페이스>는 빠른 물질 세계의 발전 속에서 정신적인 것의 가치에 대해 돌이켜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spirituality가 아닌 mind 로 이름 붙인 데에는 육체의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세계라는 이유가 있었다. 시대와 공간을 거슬러서 종합하는 용감한 시도를 펼친 전시였다. 작고한 거장과 지역의 젊은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일이 당시에는 흔치 않았다. (애니쉬 카푸어, 제임스 터렐, 마크 로스코, 볼프강 라이프, 김수자, 우순옥 등 참여)

2006년의 <사춘기 징후>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작가들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였다. 호암갤러리에서는 기성작가를 중심으로 소개를 했다면, 로댕갤러리에서는 비교적 젊은 동시대 한국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가 이루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한국은 몸집은 어른인데(과잉), 그에 합당한 시민의식은(결핍)은 아이와 같은 상황이라고 보았다. (배영환, 오형근, 서도호, 장지아, 임민욱, 박진영, 김홍석, 플라잉시티, YP 등 참여) 한 시각에서 3인의 작업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스팟도 있기는 했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넓은 편이기는 했다. 공간에 매우 예민한 작가들의 요구를 최대한 잘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2011년의 <스페이스 스터디>는 플라토의 재개관 전시였다. 로댕갤러리가 휴관하였다 재개관하면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건설적 의미에서 새로운 명분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서 시공을 가로지르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장소를 지칭하는 명칭인 '플라토'를 공간의 새로운 이름으로 지었다. 장소가 잘 알는곳, 길들여진 곳, 익숙한 곳, 영토화된 곳의 의미를 갖는다면, 공간은 알 수 없는 미지의, 탈영토화된 곳을 지칭한다. (김민애, 정소영, 정재호, 안규철, 김도균, 사사, 김수자, 장성은, 노재운, 이불, 김무준, 김인숙 등 참여) 

플라토는 또한 서울 내에서 개인전을 열기에 가장 큰 공간 중 하나였다. 주로 40대 중반의 미드커리어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플라토에서는 일년 에 총 3회의 전시를 개최했는데, 그중에 두번은 개인전, 한번은 기획그룹전으로 진행했다. 보통 큐레이터의 자아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획전이 더 적합할 지 모르나, 안소연 큐레이터는 미술관에 소속된 큐레이터로서, 개인의 성취보다는 미술관의 미션이나 장기적 계획에 더욱 집중했다. 보통 전시에서는 기획자가 아니라 작가가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나머지 스텝들은 충실한 서포터이자 매니저의 역할을 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개인전은 작고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개념적인 부분이 주가 되는 작가로, 물리적으로 운송을 해올 것조차 별로 없었다. 해당 시기 리움에서는 매튜 바니의 전시를 방대한 규모로 준비 중이었고, 플라토에서는 상대적으로 텅 빈 전시공간이 마련되었다. 안드레아 로젠이라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재단 이사장은 매우 많은 전시가 전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까다로웠다. double 이라는 개념으로 개인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작가는 작품의 유일성이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서는 진작에 내려놓은 작가였다. 문서로 남아있는 전시와 작품의 개념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법. 작가가 원래 원해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이전 전시의 설치 이미지나 책 자료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큐레이터는 .. 하랄트 제만이 말한 것처럼 자신 스스로가 창조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큐레이터가 창조자인 것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 작가의 충실한 협업자이자 조언자, 관객에게는 교육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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