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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올오버>(하이트컬렉션, 2018.10.26~12.1)

by ㅊㅈㅇ 2018. 12. 31.

월간미술 2018.12. 

 

페인털리(painterly)한 회화 작업이 가득 걸린 벽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손과 붓과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만나 만들어 낸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 눈을 가득 메운 그들의 치열함은 나로 하여금 시끄러운 바깥세상을 잠시 잊고 여유로움을 만끽하도록 한다. 시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얻게 되는 이러한 감각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만국공통어처럼 기능한다. 그것이 바로 회화의 가장 큰 힘일 것이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의 고리타분함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어떤 작가도 특정 장르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는 요즈음이기 때문이다. 설치미술과 스펙터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매체의 개발까지, 미술은 그야말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며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화라는 장르에 국한하여 기획전을 꾸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용기 있는 시도다.

회화 장르전이 많지 않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주제를 명료하게 언어화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몇몇 회화 전시가 있다. <오늘의 살롱>(커먼센터, 2014)이나 <그림/그림자>(삼성미술관 플라토. 2015)는 비교적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오늘의 회화에 주목하는 전시였다.[각주:1] 이후에 열린 필자가 기획한 <룰즈>(원앤제이갤러리, 2016), 구지윤 작가 기획의 <로비 머디 카펫>(2/W, 2018)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회화에서 보이는 비재현적 태도를 조망했다. 이번 전시 <올오버>는 이성휘 큐레이터가 가진 회화에 관한 전반적인 관심에서 시작되어 추상회화라고 불릴 법한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 서문에서 큐레이터의 고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추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다. 사전적 정의로만 본다면 대상을 알아볼 수 있게 재현하지 않은 미술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지칭하는 단어로 무리가 없다. 그러나 미술사적 맥락을 살핀다면, 추상회화라는 단어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폐기된 20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미술의 경향을 포함한다. 비재현적 미술은 맞지만 또한 1990년대 이전의 추상화와의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추상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사용하지도, 또 버리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동시대에 출현하는 추상적인 작업에 대해 더는 추상이라는 미학용어로 표현하거나 묘사하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동시대에 추상이라는 호칭/표현이 지양되는 까닭은 추상이 이미 구시대의 미감을 함의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동시대 작가들에게 추상의 외형을 지닌 작품은 각양각색의 형식실험 끝에 우연히 당도한 귀결점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모더니즘 시대의 추상미술과, 동시대에 추상의 외형을 지닌 미술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리라.”[각주:2]고 언급하였다. 결과물은 일견 비슷해보일지라도 제작과정이나 목적, 작가가 가진 방향성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개별 작품이 아닌, 전시에 관해 리뷰하는 일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전시의 제목과 서 문일 것이다. ‘올오버는 전면을 덮는다는 의미로, 1950년대 잭슨 폴록의 회화를 지칭하면서 사용했던 단어다. 일반 한국 관객에게는 올오버는 분명 낯선 단어일 수 있으나, 미술전문가들에게는 추상과 마찬가지로, 미술사적 맥락 안에서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일군의 작업을 연상하게 하는, 구체적 경향을 지칭하는 의미가 있는 단어다. “반복들의 축적위계적 구분은 소진된다는 의미에서 이번 전시 출품작들을 소개하는 데 좋은 대문이 되지만, 동시대 추상회화를 말하기에는 함의하는 레이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시는 글과 달리, 작가, 작품과 함께 숨쉬고, 공간에서 생동하기에 제목이나 전시서문만으로 충분히 이야기되기는 어렵다. 사실 한 전시에 관해 말할 때 제목이나 서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참여작가일 것이다. 참여작가 목록을 보면, 개별 작가의 이전 작업을 일부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전시가 던지고자 했던 질문을 역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올오버>에는 총 11명의 작가가 참여해 총 7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공간 크기에 비해 매우 많은 수의 작품이 출품됐으며, 참여작가는 202, 306, 402, 501명으로, 세대의 구분 없이 다양한 작가가 초대됐다. 비슷한 주제로 구성된 몇몇 다른 전시가 있었지만, 참여작가가 대부분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작가들이 비재현적 회화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이 적게는 5점 많게는 12점까지 걸렸다. 작품 수가 많은 것은 개별 작가의 맥락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김미영의 경우는 최근작뿐만 아니라 2014, 2016년의 구작도 함께 선보여 작품 경향의 변모과정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대체로 작가별로 작품이 모여서 같은 벽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미래, 이승찬의 경우가 기억에 남는다. 김미래의 경우는 추상표현주의의 즉흥성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하드엣지 페인팅을 연상시키는 기법을 활용하는데, 딱딱한 나무 표면 위에 기하학적 구조를 원색을 사용해 담는다. 이승찬은 디지털 프린팅 기법과 회화를 접목시킨 작업을 보여주는데, 잉크가 여러 차례 겹쳐지면서 원본 이미지는 흐려지고 재료의 물성만이 남게 된다.

실제로 많은 대학 회화과에서 현장학습으로 이 전시를 보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1명 작가의 회화 작업을 다채롭게 한자리에서 관람하고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11개의 작은 전시들의 모음 같기도 했기에, 작가별로 느껴지는 분위기나 맥락, 관람에 드는 시간은 편차가 있었다. 전시장 2층 한편에는 참여 작가의 예전 전시 도록들을 함께 비치하여 각 작가의 작업과 관심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제한된 예산과 시간, 인력으로 큐레이터가 실현 가능한 범주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성휘 큐레이터가 언급했던 것처럼, 해외의 유행이나 트렌드를 발 빠르게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한국 동시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이어져오는 한국 회화의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러한 과업은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그리고 작가에 이르기까지 회화에 관한 지속적 연구를 할 다양한 협업자가 함께해야 가능하다. 작가들 역시 이전의 추상미술과의 차이에 대해 스스로 규명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동시대미술의 전시사적 맥락에서도 전시와 전시를 하나의 선으로 이어나가며, 개별 관심사가 큰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더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사진 출처: 하이트컬렉션 페이스북 페이지 

 

  1. “중견이라 하기에는 경력이 조금 짧은 작가들로 자연스럽게 모였습니다. … 단색화와 민중미술 이후 몇몇 작가의 활약에도 한국회화의 역사는 파편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 그러한 현 상황을 조망할 형식적 얼개”를 만들기 위해 기획됐다. 총 69명의 작가가 참여해 15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 />��림자>(2015)는 “‘회화의 죽음’이 언급되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회화의 기원’을 재탐색”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두 전시 모두 비교적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회화를 다룬다. [본문으로]
  2. 반이정, 「동시대 미술에 출현하는 ‘추상’임직한 것에 관해: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자기 초상화」, 2018 https://blog.naver.com/dogstylist/2213777863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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